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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et Lounge Oct 21. 2021

[회사의 비밀] 본사 정책

"신이 나는" 본사 정책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다면 난 지금 내 방이 아닌 회사 회의실에서 목요일 미팅을 주관하고 있었겠지.


미국에 있는 본사의 회사 창립자, 즉 회장님은 당연하겠지만 절대 권력자다.

 

2020년 초부터 전 세계적인 경기 불황이 찾아왔고 우리 회사는 그 불황 속에 매출이 줄기 시작했다. 2019년 말에 이미 설정해둔 2020년 목표 매출 계획에 따라 2020년 상반기부터 힘차게 도약해야 했으나, 코로나의 영향을 받은 업계는 그리 쉽게 움직이지 않았고 고객들은 지갑을 닫았다. 미국 본사의 매출은 나날이 떨어졌으나 한국지사의 매출은 전년도 대비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2020년 예상 목표 매출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예기치 못한 코로나 발 불황 속에서 제법 선방하고 있는 것이다.


본사의 매출이 급감하기 시작하자 다급해진 회장님은 회사 전체의 비용 절감 정책을 지시했다. 출장을 없앴으며 직원 혜택을 줄이고 기업 관련 마케팅과 홍보 활동을 중단했다. 하반기가 되어도 하락세를 지속하던 본사는 회사 전체의 채용을 중단했고 급기야 2021년 직원 연봉을 동결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한국에서는 개발자들의 몸값이 치솟고 있던 시기였기에, 개발사인 우리 회사에 가장 큰 리스크가 찾아왔다고 나는 판단했다.


나는 본사의 어떤 결정도 수긍할 수가 없었다.


본사의 매출 급감이라는 짐을 왜 지사가 함께 짊어져야 하는 것인가. 이러한 불황에도 안정적인 매출을 유지하고 있는 지사에게까지 마케팅과 홍보까지 중지시키면서 비용을 절감한다면, 본사와 지사 우리 모두 다 함께 가라앉자는 것인가. 회사 전체의 경영까지 살피지 못하는 일개 리저널 사장은 회장님의 큰 뜻을 헤아리지 못해 답답함에 가슴을 친다.


채용 중단.

새로운 사업은 기회와 위험이 공존한다. 새로운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이를 수행할 전문가가 필요하고 충분한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지사로서는 너무 중요한 새로운 사업 기회를 얻었고 이를 추진하고자 했으나, 수행인력이 없다. 채용이 시급하다. 사업 기회와 향후 비전, 기대효과에 대해 본사에 전하고 채용 승인을 요청했다(그렇다, 나는 예산 권한이 없는 하찮은 사장이다). 회장님은 이에 크게 환호했다. 너무 좋은 기회이며 꼭 성공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채용은 불가하다고 했다. 방금 뭐라고 했냐고 되물었다. 불가능하다는 대답이 다시 들려온다. 코로나로 뭐라고 뭐라고,,, 회사 상황이 어쩌고 저쩌고,,, 비용절감이 얼씨구절씨구,,,, 즉 채용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본사에서도 채용이 동결되었으니 지사도 그래야 한다고 형평성을 논한다. 그러나 개발 프리랜서 채용은 가능하다고 한다.

아 그렇군요. 이런 신사업 개발을 프리랜서를 구해서 하라는 말씀이시군요. 너무나 기대가 됩니다.


프로젝트는 지속적으로 시작되는데 인력 채용 승인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꽤나 단순하게 해석할 수 있다. 속된 말로 사람을 갈아 넣으라는 것이다. 회장님, 제발 밤 10시에 회사에 한번 나와보세요. 얼마나 많은 개발자들이 회사에 남아 일을 하고 있는지 직접 보세요. "야근수당 주잖아"라는 대답할 거면 일등석 타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세요, 도움 안되니까.

이 직원들은 정말로 야근 수당 벌려고 밤 10시에 자리에 앉아있을까. 라면 먹고 햄버거 먹으면서 저 자리에 앉아 있을까. 애인 없고 가족 없어 심심해서 과연 저러고 있을까. 인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불만을 갖기보다는 어찌 됐건 맡은 프로젝트를 정상적으로 완료하고자 밤 10시에 회의를 해가며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거북목이 되어 프로그램 짜고 있는 소중한 개발 직원들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다면 회장님은 뭐라고 할까. "내가 프리랜서 구하라고 했잖아." 회장님, 미국에 썩 돌아가시라니까요.    


연봉 동결.

이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나는 식음을 전폐했다. 물론, 국내 많은 회사들이 코로나로 연봉 동결이나 삭감을 감행한 것을 알고 있다. 동결이 된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도, 법을 위반하는 것도 아니며, 주변을 둘러봐도 동결 소식은 심심찮게 들려왔다. 하지만, 내 직원들의 연봉은 동결되지 않기를 바랐다. 2020년 정말로 열심히 해준 직원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봤기에, 연봉 동결이라는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고구마를 통째로 다섯 개를 삼킨 듯한 답답함과 울분에 사로잡혀 며칠을 잠을 자지 못했다. 난 과연 훌륭한 경영인 정신이 부족해서, 빅픽쳐를 그릴 줄 몰라서, 진정으로 회사를 위하는 마음이 부족해서 그랬던 것일까.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포인트는, 연봉 동결이라는 결정에 대한 그룹 차원의 어떠한 메시지도 직원들에게 전하고자 할 의지가 없었던 점이며, 향후 어느 시점에 연봉을 다시 검토하겠다거나 연봉 인상 대신 다른 혜택이나 약속을 해주고자 하는 노력이 전무했다는 점이다. 그렇다. 이것은 다 나의 몫이 된다. 내 의지가 아닌 회사의 결정을 내가 직원들에게 설명하고 설득시켜야 한다. 위기관리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도 내가 운영하고자 하는 방향과 맞지 않은데 이를 직원들에게 전달해야 하다니 자괴감이 심하게 밀려온다.


미국과 한국의 정서, 관례, 법규, 어떤 것 하나 닮은 점이 없다. 그렇기에 참 오랜 세월 동안 그 사이에서 조율을 하면서 한국 지사를 성장시키고 본사와는 다른 우리만의 특화 서비스를 구축해가며 발전시켜왔다. 그런데 코로나를 마주하며, 본사는 창립 이래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만났고 소통이 되지 않는 독불장군형 경영을 선택했다. 위기 속에 투자를 하고 씨앗을 뿌리는 것이 아닌, 위기 속에 잔뜩 웅크려 움직이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 상황 속에, 내 신념이 허락하지 않는 결정들을 직원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날들이 많아지며 나는 나의 하찮음을, 무력함을 느껴야 했다.


본사 정책, 또는 회사 정책, 부서 정책 등, 우리는 정책이라는 말로 치장한 수많은 규칙 속에 직장 생활을 한다. 정책에는 회사의 신념이 짙게 묻어난다. 경영진이 회사를 어떻게 경영하는지, 위기 속에 직원을 어떻게 보호하는지, 회사가 어떤 비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회사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를 조금이나마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정책이 회사의 상황에 따라 생기고 없어지고 하는 경우일 텐데, 그러한 회사는 사시사철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경영을 하다가 조직과 인력이 흔들려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리더들이라면 회사 정책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던 경험과 좌절이 다들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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