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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et Lounge Jun 02. 2021

[직장인의 하루] 10년간의 플래너를 버렸다

10년의 괴로움을 버렸다

퇴사를 앞둔 어느 날.

최대한 느릿한 동작으로 사무실을 정리해본다. 수년을 머물렀던 이 곳, 이 공간. 높은 책장에서는 먼지가 쏟아지고 오래된 낡은 서류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먼지 속에 쿨럭이며 좀 치우면서 일할걸 그랬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한다. 우아한 퇴장을 하고 싶었는데.. 청소만 나흘째다. 글렀다.  


책장에서 플래너가 무려 10개나 발견되었다. 

그렇다. 나는 플래너를 한 번도 버리지 않았다. 아니 버리지 못했다. 이전 기록을 찾아봐야 할 때도 있고, 대외비 정보가 적혀있기도 했기에 버리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그렇게 억지로 쌓인 10년간의 플래너라니. 흡사 유물 같은 자태의 플래너들은 먼지가 쌓였고 볼펜으로 쓴 글씨는 번져있으며, 종이는 바래 있다. 새해 매끈한 자태를 뽐냈을 플래너들은 하나같이 볼품없는 모습이다.


하나씩 펼쳐본다.

10년 전 나의 하루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잊고 있던 업무의 흔적들. 미팅, 교육, 채용, 스터디, 갖가지 이슈, 보고서, 계약들.. 글씨체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고민의 흔적. 치열한 전투의 기록이자,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중압감이 한 장 한 장 진하게 묻어있다. 나 정말 고생 많았구나. 


한 장 빼곡하게 일정이 가득했던 날, 나는 밥이라도 먹으며 일했을까. 종이 한편에 물음표를 수없이 겹쳐 쓰다 종이에 구멍을 내고 말았던 나는, 과연 몇 번이나 깊은 한숨을 쉬었을까. 글씨를 크게 휘갈기던 그날의 나는, 무엇이 그렇게 다급했을까.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어보지 말아야 할 것을 열어본 느낌.


너희들은 열심히 살았던 내 인생의 기록이기도 하고,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단했던 과거의 증거이기도 하다.  


팔짱을 끼고 쌓여있는 플래너를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버리고 싶지만, 버리고 싶지 않다고 되뇌다 결국 버리기로 결심한다

분리수거장에 들고 내려가 종이 분리수거함에 하나씩 던져 넣었다. 고민이 한 개, 두 개, 괴로움이 한 개 두 개, 부담과 긴장이 한 개 두 개, 순서대로 버려지고 있다.


10년간의 플래너를 버렸다.

10년간의 괴로움이 이렇게 분리수거되었다.


우리의 과거는 이토록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기억 속에 남는다. 아름다운 과거만 있을 수는 없기에 버리고 싶은 과거들도 무수히 많을 테다. 플래너를 분리수거하며 생각했다. 버리는 것 역시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고단했던 내 노동의 흔적을 사무실 한편에 두면 안 되었듯이, 잊고자 하는 과거를 마음 한구석에 담고 살면 안 되는 것이다.


버리고 싶은 건 다 버리자. 

배신감과 패배감에 몸서리 쳐질 만큼 괴로운 과거가 인두로 지진 흉터처럼 가슴속에 남아 내 영혼을 찢어놓았을지라도, 버리자. 버려야 산다.   


노동자의 삶을 벗어나며, 다짐을 해본다

매일같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리라

자주 비워내고 버리며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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