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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May 15. 2019

The record #6_기묘한 청소

어제의 내가, 아니 그제의 내가 더 빨리 더 멀리 지나가버렸으면 한다.

Good Soul Shop / https://unsplash.com/@goodsoulshop

어제는 장장 5시간의 대청소를 했다. 혼자 살고 있지만 엄마의 흔적이 묻어 있는 주방과 다용도실에 처음으로 손을 대었다. 이가 나가 그릇과 와인잔, 커버가 누렇게 변색된 찬합통 따위를 과감하게 버리며 1인가구다운 살림살이만을 남겨두었다. 선반에는 1년 동안 (과연 1년뿐일까?) 한 번도 쓰지 않은 전골 사이즈의 냄비가 있는 반면 코팅이 다 벗겨져도 미련하게 자리를 차지하게 내버려 둔 프라이팬이 나란히 엎어져 있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유통기한을 알 수 없는 양념들도 한데 모아 버리고 다음 장보기에 채워 넣을 것들을 메모했다. 평소 냉장고와 옷장 정리는 집요할 정도로 하는 편이지만, '방'이 아닌 곳을 작정하고 건드린 것은 처음이라 혼자서 (가끔 동거인이 있다 없다 하지만) 이렇게나 필요 이상의 것들을 쌓아두고 살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내 그 같은 너저분한 풍경에 좀 질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상황을 모면할 다른 방도는 없었다.


늦은 저녁부터 시작된 청소는 전자레인지까지 닦고 나니 자정에 가까워졌지만 그럼에도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혹시나 해서 안전지대(?)라고 생각하는 침대방으로 건너가 협탁과 화장대를 살펴보았다. 그러자 매일 문을 여닫기를 반복하는 그곳에도 무용한 존재들을 꽤 발견할 수 있었다. 난데없이 집안을 뒤엎는 일은 평소에도 평온하지 않은 일상이 본격적으로 엉망으로 흘러가버린 날에 내가 벌이는 지독한 이벤트 같은 것이었으니, 보통 때라면 좀 관대한 마음으로 부대껴 지낼 것도 이날은 가차 없이 쓰레기 종량제 봉투에 ‘던져’넣었다. 그럴 때마다 내 안에 내재된 폭력성 같은 것을 느끼면서. 통쾌하고도 불쾌한, 찝찝한 기분으로 새 하루를 맞이했다.


무언가를 자꾸 비워내는 반면 마음은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표정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한 것은 서재라고는 하지만 창고를 겸하고 있는 작은방을 정리하면서부터였다. 냉장고나 옷장과 달리 책장은 5년 전 이곳에 이사 온 뒤로 거의 손을 댄 기억이 없는데, 어제는 기어이 이 공간도 어느 정도 덜어내야만 성이 풀릴 것 같았다. 켜켜이 쌓인 책들은 적요에 익숙해 보여도 눈으로 그것들을 천천히 훑을수록, 가까이 다가가 하나씩 손으로 쓸어볼수록 그 안에 담긴 엄청난 이야기들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들썩이는 듯했다. 이 엉성한 서재는 그래서 고요하지만 언제나 소란한ㅡ꼭 어수선한 풍경 때문만은 아니라도ㅡ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책을 솎아내는 것은 유리나 플라스틱 그릇, 혹은 잡동사니를 던지고 밀봉할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또 아주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가능한 한자리에 머물게 하는 식으로. 특히 오래전에 샀던 책은 영영 다시 펼쳐보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도록’ 두었다. 그중에서도 교복을 입고 태평하게 용돈을 타 쓰던 시절에 사들인 책은 전부 기특하고 뭉클한 기분을 들게 한다. 그동안 결코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할 순 없지만, 꾸준히 책을 읽어온 사람치고는 어째서인지 그리 근사한 어른으로 자라지 않은 걸 보면 (역시 더 많이 읽었어야 했나!) 이렇게 감상에 잠기는 것도 우스운 일이기는 하다.


특정한 시기에 만난 특정한 책들은 분명 얼마간 나를 감동케 하고 또 나름의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 확실히 일조했겠지만, 나는 여전히 화가 나면 상대에게 (이 상대란 종종 그 상황과 무관한 대상으로 엇나가기도 한다) 아픈 말만 쏙쏙 골라 뱉고, 도리어 내가 엉엉 울어버리고, 이 모든 것을 악착같이 쏟아낸 뒤에는 돌연 서늘한 시선으로 주변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엉망이 된 일상을 지워버리는 일에 몰두한다. 버리고, 또 버리면서.


미치광이 같은 날들을 수십 년간 반복하면서도 나쁜 마음으로 책장을 들쑤신 적은 없어서 나는 책 정리를 하면서 조금씩 온화해지는 자신이 점점 낯설어졌다. 과연 한 시간의 독서로 누그러들지 않는 걱정은 없다더니, 그저 책을 꺼내들고 몇 장 넘겨보며 책과 나 사이에 얽힌 시시콜콜한 시절들을 더듬다 보니 몰아치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물론 정리는 한 시간 안에 끝날 리 없고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겨우 샤워를 하고 잠을 청할 수 있었지만.


그래서 오늘은 기묘하게 정돈된 집에서 어제의 나를 부끄러워하며 이 글을 쓴다. 글을 쓰는 사이 어제는 벌써 그저께가 되어버렸다. 어제의 내가, 아니 그제의 내가 더 빨리 더 멀리 지나가버렸으면 한다.


맬러리 뮤직 Mallory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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