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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Mar 31. 2017

[베를린 살이] Tschüss!

잘가!

남자친구와의 영상통화를 마치자마자 껌을 밟았다. 124번 게이트 근처 여자화장실 입구, 12년 연속 세계 1위의 서비스를 자랑한다는 인천공항에서였다. 나는 괜한 눈물로 끈적거리는 얼굴로도 모자라 발바닥에도 끈끈한 불쾌함을 더해버렸다. 이 산뜻하지 못한 기분이 꼭 여행 내내 나를 따라다닐 것만 같아서 연신 발을 비벼댔다. 먼 길을 떠나는 이에게 어김없이 찾아오는 액땜이 아니라 액을 당할 운수라고 찍힌 낙인 같달까. 하지만 (하는 수없이)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고, 티켓과 저 멀리 보이는 비행기 꼬리 부분을 겹쳐 찍기까지 했다. 아- 여유로워라. 


과연, (언제나처럼) 액땜의 얼굴을 찾아온 액운이었을까. 내 기내용 캐리어는 5킬로도 채 되지 않았는데 어쩐 일인지 손목에 힘이 풀려 짐칸에 싣기까지 두 명의 승객의 머리와 팔을 사이좋게 쳐야만 했다. (심지어 캐리어를 욱여넣을 공간은 이미 만석이었다) 달아오른 얼굴을 숙이고 좌석을 곱씹어보았다. 내 좌석은 56H, 겨우 찾은 짐칸은 49C. 행운은 늘 가까운 듯 먼 곳에 있다. (오직 내 눈을 통해서만-'우리'들은 이코노미석이었다-) 세상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타인의 실수를 보며 작은 탄식을 뱉을 위치에 있는 승객들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약간의 허세와 고집이 원동력이 되었을 뿐, 맹세코 어떠한 욕심 없이 시작된 이 여행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평범한 상황에 놓인 이들을 부러워하며 조금씩 결핍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이륙 전, 때마침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누가 애써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라도 하는 듯, (혹은 그러길 바라는 사람처럼) 나도 모르게 인터뷰용 목소리가 튀어나와 버렸다. 과도하게 차분하거나 부드러운 나머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역효과뿐인 목소리를 말이다. 물론 나는 그냥 증명하고 싶었던 거다. 저는 이 공간에 해롭지 않은 사람입니다. 보세요, 이렇게 상냥한 걸요.




곧 경유지, 뮌헨에 도착한다. 11시간이나 비행기를 탔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장거리 비행은 처음이라 그런지 유난히 이동하는 힘이 느껴지질 않는다. 곧 다른 나라에 발을 붙인다는 것 또한. 요란스러웠던 시작 때문일까, 기분은 계속 약간 우울한 상태다. 다행히 완전히 무기력해지진 않는다. 이 여행에 쏟은 (쏟아갈) 시간과 돈을 생각하면,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리라.


아니면 여행이 다가올수록 나를 엄습하기 시작한 실체 없는 두려움을 (이제와) 달래고자 시청한 애니메이션, <모아나> 덕분인지도 모른다. 모아나와 그녀의 할머니는 노래한다. 나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그래, 매사에 지나치게 선량해 보일 필요도, 눈앞의 외면하고픈 현실에 애써 무심할 필요도 없다. 어떤 순간에도 나다움을 유지한다면 그 모습이 어떻든 자체만으로도 자연스러워 보일 테니 말이다.


창밖은 눈이 부신데 비행기는 여전히 어둡다. 쾌적한 듯 음울하고, 건조한 듯 습하다. 마치 큰 섬이 움직이는 것 같다. 지금 나는 삶의 어디로 향하는 키를 쥐고 있나. 모쪼록 잘 항해해 나가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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