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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Apr 01. 2017

[베를린 살이] Angsthase

겁이 많은 사람, 겁쟁이

베를린, 베를린에서도 베를린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는 스테글리츠(Steglitz)에 도착하기까지 나는 이미 베를린의 모든 운송수단을 이용해버렸다. 인천공항에서 경유지 뮌헨까지 비행기를, 뮌헨에서 베를린까지 또 비행기를. 그리고 내가 쥐고 있는 두 개의 캐리어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택시를 타고 집 앞까지 가버릴까? 때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택시비가 50만 원 정도 나올까 봐 (근거 없음) (다행히도) 미리 알아둔 대중교통 경로를 따르기로 했다.


베를린 테겔공항(TXL)에서 내가 머물 스테글리츠의 비욘슨스트라세(Björnsonstraße)까지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우선 공항에서 TXL 급행버스를 타고 4번째 정류장인 투름 스트라쎄(U-bahn Turmstr.)에서 내리는 것이다. (15분 소요) 그리고 이 역에서 U9라인인 라트하우스 스테글리츠(Rathaus Steglitz)행 지하철을 타고 환승역 스피헤런 스트라세(Spichernstr.)에서 하차하는 것이 1차 관문이었다.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없다면 주저 않고 택시를 부를 요량이었다. 

하지만 나는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있음에도 우버를 불렀고, 내 요청에 응한 택시기사는 없었다. 여기에서도 여전히 일반택시 요금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던 터라, 이게 내 운명이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역에 들어가려는 순간, 멀리서 노숙인으로 보이는 청년이 구루마(!)를 끌고 사람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는 1:1 전담 마크로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삥 뜯기를 시전 중인 듯했다. 그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번 더 택시를 불러보기로 했다. 그때 지하철역으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그다음 상황은 빨리 종료됐다. 우버는 예상대로(?) 묵묵부답이었고, 코와 입 주변에 버짐이 핀 젊은 노숙인이 후드를 뒤집어쓴 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미는 바람에 나는 얼결에 5유로를 건네주고 말았다. (동전을 주면 그대로 이마를 들이받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가 영어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베를린에는 이른 저녁에 도착했지만 혹시나 밥을 먹는 동안 날이 어두워지는 게 무서워 주린 배로 길을 찾는 중이었다. 그런 나에게 저녁을 먹고 싶다고, 춥고 배고프다고 협박하는 덩치 큰 거지에게 5유로나 내어주다니. 허탈하게 역으로 돌아가는데, 독일에서 첫 번째 '바보비용'을 지불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랜 친구가 내 여행을 응원하며 남긴 메시지를 곱씹어봤다.


"계획대로 딱 들어맞게 재단되는 삶은 없다. 불필요한 일에 노력을 쏟기도 하고, 한 순간의 실수를 돌리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이기도 하며, 아무리 조심해도 예상치 못한 비용이 들 때가 있다. 인생이 언제나 딱 들어맞을 수도, 효율적일 수도 없다.


이 정도 바보짓은 인생에 있을 수 있다고. 이 정도 삽질은 어쩌면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인생이 언제나 효율적일 수는 없다고.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라 그게 나도 좀 어려웠다고 말이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中




두 번째 목적지인 스피헤런 스트라세에 도착했다. 종착지인 브라이텐바하 플라츠(Breitenbachplatz)를 가기 위해 U3라인인 크루메 랑케(Krumme Lanke)행 지하철로 환승하는 미션만 남아 있는(줄 착각한) 밤이었다. 

이윽고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환희도 잠시, 양 손에 캐리를 끌고서는 도무지 구글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 사이 밤은 더 깊어져 있었다. 다행히도 지하철 역 앞 햄버거 가게 할아버지와 택시를 기다리던 젊은 여성의 도움을 받아 (나는 여전히 택시를 타고 싶지 않았다) 비욘슨 스트라세(Björnsonstraße) 거리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의 위치와 번호를 알 수 있었다. (코앞이었고, 코앞의 그 정류장에는 282번 버스만 다니는 길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가게로부터 새어 나오는 불빛을 받으며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이 장면이 꼭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면 나는 다시 또 낯선 거리에 덩그러니 서 있을 테지만 어디에도, 어디라도 이들처럼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되뇌며 말이다.


...이제 그만 숙소로 향하는 여정을 줄여야 할 것 같다. 길눈, 밤눈, 마음의 눈까지 어두워져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이 이상 유쾌할리 없기 때문이다. 고백건대 나는 버스에서 내리고도 방향을 찾지 못해 결국 (이제야) 택시를 탔고, 또 한 번 5유로를 지불하고서야 마침내 나의 호스트, 크리스티안의 현관문 벨을 누를 수 있었다. 


도합 10유로의 바보비용으로 간신히 이 밤을 건너왔다. 비욘슨 스트라세 5번지에서 시작될 매일에는 얼마 큼의 바보비용이 필요할까. 인생에 여백을 만든다는 건, 훗날 그만큼 비어있을 주머니를 담보로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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