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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Apr 02. 2017

[베를린 살이] Heimweh

향수, 향수병

베를린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아침이 밝았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어떤 여행에서도 좀처럼 물갈이를 하지도, 잠자리를 가리지도 않는 나지만 이번만은 예외인 듯했다. 간밤에 비오킬을 수십 차례 뿌리고도 베드버그가 나올까 전전긍긍했고, 군데군데 출처를 알 수 없는 머리카락이 보이는 침대를 보며 테이프 클리너를 챙기지 않은 자신을 원망하며 잠들었더랬다. 세미 결벽증이 있는 우연찮게도 온통 남자 게스트들뿐인 이곳에서 그들과 화장실을 셰어 하는 것부터 시작해 침대 아래에 카펫이 깔려 있는 것까지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참, 라디에이터 필터에도 먼지가 쌓여 있었지. 악몽을 꾸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어젯밤부터 꾹 참았던 말이 결국 터져버리고 말았다. '집에 가고 싶어.' 베를린에 도착한 지 겨우 24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래도, 정말 새들이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는 지저귐과 그 매끄러운 선율에 귀를 의심하며 창문을 열었을 때 눈앞에 펼쳐진 작은 연못이 딸리 정원에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특히 창문 밖으로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높이 자란 자목련 나무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더 진한 봄을 기다리고 있을 수백 송이의 꽃봉오리를 바라보며 기어나갈 준비를 했다. 목이 무척이나 말랐다.




U9라인의 Schlossstrasse부터 U9라인의 Walther-Schreiber-Platz까지가 스테글리츠, 혹은 슈테글리츠라고 불리는 이 동네의 다운 타운이다. 우산을 쓰지 않는 베를리너 사이에서 형광 노색 우산을 쓰고 3 정거장, 15분 거리의 길을 30분가량 헤매 발견한 곳이다. 돌아가는 길에는 비가 개어 있었고, 걸음이 빠른 탓에 10분 남짓한 시간 안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만 다른 게 아니라, 길을 익히기 전과 후의 기분 또한 천지차이임을 깨달은 오전이었다. 처음으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창가에 꽃들이 놓여 있는 건물들과 눈을 맞추며 걸었더 기분은 잊지 못할 거다.


베를린에서의 첫 쇼핑, 첫 목축임

유기농 슈퍼마켓 <basic>을 발견했다. bio만 읽고 대충 때려 맞춘 건데, 육안으로도 쉬이 가늠이 되는 매장 제품들의 퀄리티가 마음에 들었다. 크기는 15분만 둘러봐도 모든 섹터를 외울 수 있을 만큼 아담하지만, 1인 가구이거나 나처럼 중장기로 머무는 여행객들이 간단하고도 건강하게, 합리적인 가격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데에 더없이 좋은 곳이지 싶다. 나는 숙소 냉장고에 할당된 내 칸의 크기를 확인한 뒤 이곳에서 바로 일주일 치 정도의 장을 보았다. 아래는 그 결과물.

23.15유로의 행복

팩에 담긴 양송이는 한국의 그것보다 크기가 컸고, 베이비 채소는 상태가 아주 좋았다. 소시지는 일부러 작은 것을 골랐는데 왜 독일 소시지를 찬양하는지 알 것 같더라. 나는 미식가도, 혀가 고급인 편에 속하지도 않지만 이렇게 담백하고도 감칠맛이 나는 소시지를 당분간 꽤 자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살짝 감격했다. 짠맛과 고소함의 조화가 기가 막힌 한 끼였다. 또한 다음 날 아침으로 먹은 베리 뮤즐리는 너무 상큼한 나머지 덜 깬 잠을 단 번에 깨워주었다. 식감이 꽤나 큰 말린 과일들이 아침식사의 흡족함을 더했다. 제대로 돈을 쓴 기분이 났다고 해야 하나. 미르히-라고 부르는 우유 역시 텁텁하지도, 비리지도 않아 시리얼 용으로 적당했다. 벌써부터 완벽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게 아니다.


아직은 낮이든 밤이든 방에 들어와 혼자 있으면 얼마간은 심장이 유난스럽게 빨리 뛰어서 보고 싶은 사람들 생각이 많이 난다. 몇몇 얼굴들을 떠올리다 보면 가슴은 점차 진정되고 기분도 어느새 까라져 있다. 일단 연애는 하는 주제에 싱글 라이프를 외치며 班독신주의의 삶을 표방하던 나인데, 이미 혼자인 걸로도 부족해 조금 더 고립된 환경에 놓여 있길 바랐던 지난날의 오만이 후회스러웠다. 그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단순히 감상에 빠지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실체 없는 두려움에 휩쓸리다 보면 여행은 나락에 빠질 것이다.




베를린 3일 차, 미세먼지는 없지만 담배냄새가 진한 베를린의 카페테라스에서 아침을 열어본다. 독일의 프랜차이츠 카페, 백 벅(Back Werk)에서 5유로가 채 안 되는 식사를 했다. 여전히 카운터 앞에서 느리게 동전을 새면서도 결국엔 근사함을 만들어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나에게 여행을 마냥 즐기는 유희가 아니다. 매 순간이 노력의 산물이다. 한편 비효율적이고 불공평한 시간의 연속이다. 길을 찾는 데에 30분을 쓰기도 하고, 커피는커녕 그 흔한 물도 없이 2유로짜리 샌드위치만 먹고도 행복해하곤 한다.

베를린 자유대학교 / Free University of Berlin, Freie Universität Berlin
학생 Mensa(식당)에서 누린 6유로의 행복

숙소에서 가깝기도 하지만 워낙에 유명한 베를린 자유대학교에 들렀다. 최대 규모의 캠퍼스와 미학적으로 지어진 언어학도서관이 있는 곳. 한국보다 7시간이 느린 이곳은 어쩐지 벌써 봄이 한창이었다. 봄날의 캠퍼스 중 어디든 분홍이 아닌 곳이 있을까. 그리고 캠퍼스라는 장소처럼 봄이 넘실대는 곳이 또 어디 있을까. 신입생까지는 아니고, 지나치게 낭만에 젖은 고학번 선배 흉내라도 내볼성싶어 반나절을 내리 대학교에서만 머물렀다.


베를린에서 맞이하는 나의 첫 번째 불금을 노랗게, 노랗게, 싱그럽게 물들여놓았다. 맥주의 감동은 소시지보다 덜했다. 그러고 보니, 집 밖에서의 혼술은 처음이네? 하긴, 여기서 내가 뭘 한들 처음이 아닌 게 있을 리 없지. 그리고 28살에게 쏟아져내리는 모든 처음들은 전부 귀한 선물 꾸러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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