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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Apr 08. 2017

[베를린 살이] zweiseitig

양면의, 양면이 있는

아침에 느낀 인생의 양면. die Licht(빛) + Schattenseiten des Lebens(삶의 어두운 면)

라트하우스 스테글리츠(Rathaus Steglitz)에서 S1반 지하철을 타고 브란덴부르크문(Brandenburger Tor)로 향하는 지하철 안. 누군가 팁박스도 놓지 않은 채 기타를 치기 시작했고 나는, 나는 덕분에 보다 아름다운 상념에 빠질 수 있었다. 생각만 해도 배가 꼬이고 살살 아프기 시작하는 상상 말고, 지금 이 순간이 약간은 영화 같다는 착각을 하며 말이다. 

 



베를린 파리저 광장(Pariser Platz)에 위치한 브란덴부르크 문. 베를린 지하철의 문마다 이 문이 새겨져 있다. 
독일 통일의 상징뿐만 아니라, 이 자체가 독일의 상징이 되는 브란데부르크 문.

이 문은 독일 분단 시절에도 일반인들이 동·서 베를린을 왕래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협정됐으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허가받은 사람들만이 이 문을 통해 동·서 베를린을 왕래할 수 있게 됐다고. 마침내 내가 태어나기 1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비로소 이 문은 통일의 상징이자 독일, 베를린의 상징이 되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이 닫혀 있는 한, 독일 문제는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통일 전, 서 베를린 시장이 남긴 이 말은 지금 우리나라에도 대입해볼 수 있을 것이다.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Berlin Holocaust Memorial)

독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과 나치에 의해 학살된 유대인을 기리는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100m 남짓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다. 수도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만큼 처음 베를린에 도착한 일주일 동안은 이 거리를 몇 번이고 지나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너무 큰 온도차에 놀라곤 했다.


패전과 분단의 아픔을 씻어주는 브란덴부르크 문, 그리고 씻기지 않는 아픔을 묵묵히 끌어안고 있는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오늘은 되도 않는 영어 실력이나마 총동원해서 박물관에 들어가길 잘했다. 비석을 형상화한 이곳에 앉아 쉬는 동안만이라도 유대인들의 고통을 느껴보는 것, 나아가 그들의 피로 새겨진 역사를 올바로 돌아보는 일이 그 비극에서 한참을 비껴간 세대이자, 이방인인 내가 할 수 최선의 추모일 테니까.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에서 마주한 몇몇 유대인들의 마지막 기록. 숨을 참고 읽었다. 독일의 역사의식에는 더 이상 놀라지도 않는다. 그동안은 막연하게 그들의 과오에 대한 반성에 조용한 박수를 보냈는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사이를 직접 거닐어 보고, 또 유대인들의 찰나 같은 삶이 보존된 박물관을 들여다보고 나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마음껏 가슴 아파하는 일에도 '감히 내가'라는 생각이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잔인함과 또 다른 인간의 순수함이 이 거대한 역사와 한데 속해 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비극이었다. 왜 그들은, 우리는 이토록 서로 달라서 삶을 나락에 빠트리는 걸까.




베를린 장벽 일부에 조성된 미술 갤러리 'East side Gallery'. 세계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야외 공개 갤러리로 알려져 있다.
이 갤러리는 슈프레 강이 보이는 지역에 위치한 1.3km 길이의 장벽에 조성되어 있는데,


벽화를 따라 걸으면서 세계 각국의 미술 작가들이 그린 105개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오늘은 작정하고 독일역사 관광코스를 짠 만큼, 톨레랑스를 여러 번 느꼈다. 그런 정신을 마음의 영역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손과 발이 행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여지없이 부러워졌고.


… 에버하르트 쿠어트 전 서독 내독관계부 과장에 따르면 동독 정권의 붕괴에 대한 결정적인 원인으로 소련 경제의 위축과 이에 따른 위성국가에 대한 통제력 약화를 꼽았다. 이는 중앙통제식 공산주의 경제체제가 초래한 필연적인 결과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베를린장벽 붕괴가 독일 통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독일 내부에 있었다고 강조했다. 수십 년 분단 기간에도 동서독 주민이 결속력을 유지하고 통일에 대한 의지도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서독의 강력한 경제력과 정치 역량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고 덧붙였다. … 

- 2016년 3월, 연합뉴스와의 이메일 인터뷰 참조

 

마지막 벽화의 끝 문장이 오늘의 하루를 설명해준다. In the beginning was freedom. 태초에 자유가 있었다 쯤으로 해석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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