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혜은 May 06. 2017

Guten Appetit

맛있게 드세요

간밤에 뉴스를 보고 목덜미가 뻐근해져 쉬이 잠들지 못했다. 대선을 코앞에 두고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와 상관없이 세월호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누구나 같기를 바라는 게, 그리고 이 같은 의견에 동의하길 기대하는 게 아직도 이 나라에서는 그렇게 어렵다니. 실로 비극적인 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부처님 오신 날이 밝았다. 엄마가 챙겨준 묵주를 팔에 차면서 오늘 하루 동안만큼은 가능한, 건강한 생각을 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크로이츠베르크 2일차, 이 지역의 거대한 푸드 홀 '마크트할레 노인(Martkhalle Neun)'에서 점심을 먹었다. 세계의 다양한 스트리트 푸드를 맛볼 수 있는 공간이다. 주말이면 지역 주민들뿐만 아니라 관광객까지 모여들어 프로모션으로 붐비는 곳인데, 퀄리티가 상당하다. 특히 대부분의 간판들에서 Bio를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웰빙 식문화에 주력하고 있다는 얘기가 맞았구나. 

*베를린 거리에서도 마찬가지이듯 이곳에서도 단연 비건을 위한 메뉴/식당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점심시간이 지난 수요일에 방문해서인지 굉장히 한산한 마크트할레 노인과 마주했다. 얼핏, 폐점을 앞둔 수산시장 같기도 했다. (하하) 음식점 주인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탐방을 시작했다. 

이왕이면 평일 주말 상관없이 저녁이나, 혹은 마켓이 열리는 목요일에 가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나는 이번 주말에 한 번 더 가볼 예정! 위장 공간이 부족해 꼭 먹고 싶었던 파스타를 패스했기 때문이다. 군데군데 문을 닫은 곳이 은근히 많아 아쉽기도 했고. 








*마크트할레 노인(Markthalle Neun) @Eisenbahn Strasse 42-43

휴대폰 사진첩에서는 나름 느낌 있어 보였던 사진인데.

*Japanese Bakery, KAME(거북이)에서 해결한 점심


여전히 익숙지 않은 베를린 식당의 메뉴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민하고 있는데, 베를린에서 꽤 유명한 일본식 베이커리-주인도 당연 일본인-카메 발견! 운 좋게도 마크트할레에 오픈하는 날과 맞아떨어졌구나. 긴 고민을 마치고 주문을 했다. 내가 사랑하는 카레 크로켓과 이름부터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마차 치즈 케이크를 먼저 해치웠다. 이걸 먹고 입맛이 돌아 소고기 주먹밥과 기린 맥주를 주문. 식사와 디저트의 순서가 바뀌었지만 뭐 어때. 미련 없이 마크트할레 노인을 벗어나는데- 뭐랄까, 중요하지 않은 숙제를 손쉽게 해결한 기분이 들었다. 어깨가 절로 으쓱.




노이쾰른(Neukölln) 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베를린의 풍경은 대체적으로 채도가 낮고, 부드럽고 따뜻한 파스텔톤의 건물들도 대개는 우울이 더 많이 묻어 있다. 왜일까? 빈티지 상점 세 곳이 나란히 붙어 있는 라인을 순회하면서 지갑을 열까 말까 고민하다 참았다. 이제 우연히 발견하는 빈티지 숍에도 큰 감흥이 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적으로 너무 많잖아요.. 보물은 귀해야 제맛인데 가는 곳마다 반짝이는 것 투성이면 어째요.

오늘은 커피 대신 아이스크림. 바닐라 아이스크림.


정말 오랜만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기본적으로 견과류나 말린 과일이 박혀 있거나 초코칩이라도 뿌려져 있는 아이스크림만 먹는 내가 어쩐 일로다가. 오랜만에 맛보는 순수함이 너무 달콤해서 좀 놀랐다. 하긴, 그런 것과는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지.

생각 스위치를 잠시 끄고 먹기만 했다.


오늘은 나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부지런히 씹고 마시고 삼켰다. 이만하면 체하지 않고 잘 소화시킨 것 같다. 의외로 하루를 꿀꺽 삼키는 게 쉬웠다. 하지만 이렇게만 사는 건 어쩐지 재미없는 기분이 들어 또 한 번 어깨를 으쓱. 사실 별로 먹은 것도 없는데 쉽게 배가 불러서 그런가. 쉽게도 달이 차고 또 하루가 저문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호스트 헬가의 친구인 빅토르가 와 있었다. 그는 셰프 출신인 스위디시인데 비건인 헬가를 위해 오늘 저녁 솜씨를 뽐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도 한자리 차지하고 모처럼 따뜻하고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저녁을 맞았다. 문득 입시 준비를 할 때 습작 주제로 받은 문구 하나가 생각이 났다. '빵 냄새가 풍기는 저녁'.
그 당시 나는 아픈 동생을 놀이공원에 유기한(..) 언니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이야기를 썼더랬지. 심지어 시험 당일 제시어로 나온 한자를 해석하지 못해(..) 자포자기인 심정으로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는데 붙어버린 게 참 용하다. 꿈보다 해몽인 건지, 우리 대학 실기 시스템이 허술했던 건지 참.

두 번째 디쉬가 너무 좋아서 세 번 덜어 먹었다. 고구마 사랑해! 그리고 이런 맛의 가지라면 매일 먹을 수 있겠다.

치즈 예찬으로 넘어갔던 세 번째 디쉬와 디저트, 그리고 단맛이 강했던 흑맥주


첫 포크를 들기 전, '잘 먹겠습니다'를 알려주고 나의 한국어 강습은 막을 내렸는데 전의를 상실한 그들의 표정이 너무 귀엽고 웃겼다. (매일 독일어 속에서 귀를 반쯤은 닫고 사는 내 심정은...) 오랜만에 누군가와 잔을 부딪치고 큰 소리로 웃고 떠들고 손뼉 치고 눈을 크고 가늘게 뜨기를 반복한 시간이었다. 미각과 청각을 곤두세우고 적당한 긴장 속에서 즐긴 오늘의 이 식사를 아마 오래 기억하게 되겠지. 잘 먹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베를린 살이] Egal!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