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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May 06. 2017

[베를린 살이] Zu Teuer & Zu Billig

너무 비싸거나, 싸거나

Kottbusser Tor역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Zentrum kreuzberg, 크로이츠베르크의 중심지라고 알려주고 있네요.

일명 베를린의 홍대라는, 크로이츠베르크 탐방 2일차. 오늘의 일정은 아주 심플하다. 유명한 편집숍 부스토어(Voo Store)에서 모든 걸 해결하려 한다. 이게 다 부스토어 내부에 입점한 컴패니언 커피(Companion Coffee) 덕분!

실은 아침부터 비가 내려서 (언제는 안 내렸니?) 몸이 으슬거리는 기운에 잠에서 깼다. 평소 9시 정도면 눈을 뜨는데, 스며드는 한기 때문인지 7시 즈음에 눈이 떠지고 계속 뒤척이기만 했다. 사실 이런 기상은 예삿일이 된지 오래다. 이런 날에는 외출하기 전, 플라시보 효과를 기대하며 독일의 유명 감기차 '바트 하일부르너'를 마시면 그만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코끝부터 정수리까지 은근히 열이 오르는 기분이라 아예 외출 자체를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그 고민은 아이러니하게도 씨리얼을 먹고, 화장을 하고, 옷을 챙겨 입는 동안에도 계속됐다.

그리고 11시경,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다행히, 정확히 1시에 번쩍 떠졌는데 피곤은 가셨지만 어째 머리는 더 지끈거리는 듯했다. 그래도 왠지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이제야 여행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나 싶어 웃음이 났다. 그래, 이쯤이면 이곳에서의 설렘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동기부여가 필요할 때도 되었지. 나는 감기차도 마시지 않은 채 허둥지둥 집을 나섰다. 어차피 걸릴 감기라면 감기차 예방으로는 어림도 없으리라.

담쟁이덩굴과 건물의 콜라보는 언제나 옳다. 하물며 꽃은 어떠하랴.

@Voo Store @Oranienstr. 24, 10999


부슬부슬 비 내리는 오라니엔 거리(Oranienstrasse)의 작은 뜰, 비밀 같은 공간 부스토어에 도착했다. 입소문에 비해 지도 어플로는 쉬이 찾아볼 수 없는 곳에 있어 조금 헤매긴 했다. 매거진 B의 조언처럼 이렇게 거울 입간판을 찾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블로그나 가이드북에 메인 사진처럼 걸려 있는 에메랄드빛 네온사인 간판은 건물의 안뜰로 들어가야 비로소 보이기 때문이다. 




부스토어에는 예술/디자인 관련 서적도 소량이나마 구비되어 있다. 한 달 동안 베를린의 서점을 둘러본 결과- 이곳은 메이저 중에서도 엑기스들만 모아 놓은 느낌.

화장실에서 숨 쉬고 있는 진한 백합 향기가 이곳의 힙력(!)을 증폭시키는 듯했다.

부스토어의 매장의 메인 섹션. 하이패션과 스트리트 웨어의 고급 셀렉션이 좌우로 늘어서 있고, 그 끝에는 큰 거울이 통째로 자리하고 있다.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들고 거울 뒤에 숨어 있는 피팅룸으로 들어가기까지 마치 짧은 런웨이를 걷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저 마르니 트렌치, 정말 '갖고' 싶었는데 착장은커녕 가격표를 확인해볼 용기도 안 나더라.

그런데 이곳 부스토어의 힙력에는 어딘가 안정적인(?) 기운이 감돈다. 나 같은 머글도 안심하고 기웃거릴 수 있는 느낌이랄까. 탈의실에서 머리는 헝클어지고 허름한 차림의 중년 여성이 나올 때에는 살짝 흠칫했지만 그래, 여기 베를린이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으니까. 매장 구석에 위치한 컴패니언 커피의 따뜻한 소리와 향기가 차분함을 더해주는 지도 모르겠다.




부스토어 입구 왼편 구석에 자리한 컴패니언 커피(Companion Coffee)

그러니- 부스토어에 왔으면, 쇼핑백은 손에 쥐지 못하더라도 컴패니언 커피잔은 잡아봐야 한다. 신맛이 나는 커피를 딱히 꺼려하는 건 아니지만, 바디감이라고 하나? 향이나 전체적인 맛이 가볍게 느껴져서 깊고 고소한 맛이 강한 커피를 더 좋아하는 편이다. (막입에다가 원두의 '원'자도 모르지만 뭐 개인적으로는 그렇다고요) 하지만 컴패니언 커피의 아메리카노는 예외였다. 한 모금 마시자마자 아뿔싸, 신맛이네 하고 속으로 작게 탄식했지만 두 번째 드링킹부터는 신맛이 나는 커피가 이렇게 진하고 맛있을 수 있다니.. 감탄하며 마셨다. 
그리고 직원의 추천으로 먹은 진저 파운드케이크가 오늘의 내 힐링푸드였다. 생강차 대신 생강 케이크 먹었으니까 감기 기운도 물러가겠지, 역대급 비약으로 잠시 긴장했던 오후를 진정시켰다. (지갑 사정도 그렇지만) 컴패니언 커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스토어를 다시 들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두 유 리드 미?!'에서부터 눈여겨보던 <The Happy Reader>를 읽겠다는 의지.


에디터스 레터 쯤으로 보이는 첫 페이지에서 처음 네 개의 문장이 가슴 한구석을 푸욱 찌르는 듯해 아예 각 잡고 해석을 해보았다. 물론 딱 그 네 문장만. 그 이상은 능력도 안 될뿐더러, 네 개의 문장을 온전히 이해하는 동안 전의는 진즉에 상실되었으니까.

그래도 아예 제자리에 가져다 놓기는 아쉬워서, 커피를 마저 마시며 간간이 책장을 넘겨보았다. 이렇게 일단 표지를 넘긴 잡지에 대한 기대가 이어질 때마다 불과 몇 달 전의 내가 생각나서 웃음이 난다. 기획회의를 앞둔 날이면 꼭 동네 서점이나 도서관에 들러 자료조사를 하곤 했는데. 아무튼, 눈에 익은 단어나 어느 정도 문맥이 읽히는 문장이 나오면 스윽 훑어보는 와중에 어느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과 답변이 꽤 인상적이어서 찍어 두었다.




'전설의 연필'이라 불리는 블랙윙 연필. 베를린의 디자인 숍이나 웬만한 서점에서는 쉽게 볼 수 있다.

요즘 내가 가는 곳마다 블랙윙 연필이 놓여 있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 교보문고에서 진행한 프로모션 기간을 통해 나름 득템한 연필인데! 이렇게 여행지에서 발견할 때마다 괜히 반갑다. 이곳은 리필용 지우개도 따로 팔아서 분홍색으로 구매했다. 저 손톱만 한 게 500원이라니... 그래도 블랙윙 연필은 이름값은 하는 지우개다. 우리가 흔히 생각(불신)하는 연필 꼭대기에 달린 지우개라고 여기면 오산이다. 참, 스페셜 에디션으로 나온 빨간색 버전도 이곳에서 처음 보는데 살 걸 그랬나. 사실 블랙윙 연필은 그 명성에 비해 지극히 일반적인 가격인데... 나는 왜 '조금은' 가난한 여행자인 걸까. 문득 황인숙 시인의 시를 묘사한 글이 생각난다. 나 조금 가난함, 나 조금 우울함, 나 조금 우스움, 나 조금 슬픔….

줄곧 포스팅 상단에 놓이곤 하는, 아침 아니고 저녁상입니다. 토마토 스프 맛이 참 좋았어요.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아직도 외부의 시선들을 아주 많이 의식하는구나 새삼 자각했다. 내면이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자 떠나온 여행이기도 한데. 문득, 이게 과연 연습이 필요한 (연습으로 가능한) 일인가 의심스러워진다. 아무래도 나는 이곳에서 나름 생존의 의미가 강한 날들을 보내고 있기 때문일까. 이 희미한 긴장이 소멸되지 않는 한 '보다 강한 자유'가 흐르는 삶은 불가능하겠지.

하루의 끝이 찾아오면 매일 그날의 여정을 정리하고 편집하는 데에 내 수면시간을 나눠 쓴다. 지난 한 달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정량의 글을 써왔다. 오늘은 이렇게 글을 쓰는 일이 돈이 되지 않아도 괜찮을까? 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아니, 돈이 되지 않는 글을 써도 괜찮냐고 물어야 하나. 글을 쓰는 일이 내 생활에, 체면에, 지갑에 일종의 폭력으로 다가와서는 안 돼. 라고 자문자답하는 나를 보면서 다시 또 '조금은' 막막해졌다. 
나 조금 먹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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