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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의대지 Apr 09. 2021

[현실] 퇴근하고 길을 건넌 이야기

우리의 삶이 종착지에 도착하면 모든 예전들은 결국 기다린 시간으로 판명날뿐인 걸까


내일이 휴가라서 주말까지 3일 연휴가 생겼는데 예전만큼 설레지 않았다. (이런 밋밋한 첫 문장의 뒷부분을 누가 읽겠느냐고 물어볼 수 도 있겠지만 직장인이라면 꽤나 충격적인 시작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예전이라 함은 대한민국 4강 신화라는 말이 전혀 촌스럽지 않았던 2002년도 아니고, 아직 대학생의 끝자락에 서 휴가의 달콤함은커녕 주 8일을 일해도 좋으니 제발 뽑아달라고 기업의 바짓 자락을 물고 늘어지던 2012년도 아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예전은 내가 기대하는 예전보다 훨씬 더 시간이 흘러 있었다. 불과 시간을 5~6년만 돌려도 연휴에 대한 거대한 갈증과 설렘이 살아 있었다. 신입사원인 나는 갑작스럽게 던져진 낯선 공간에서 본격 사회인이라는 형상을 따라잡기 위해 꽤나 필사적이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수능이 전부인 듯이 굴었던 고3 시절과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 상상할 수 있는 시련이 그게 전부 인 건 별 수 없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전혀 모르던. 어쨌든 이후의 나는 회사에서 예전에 걱정했던 것들, 놀랐던 것들, 바람맞았던 것들, 모멸감을 느꼈던 것들, 조금 감동했던 것들로부터 얼마간의 면역을 갖게 되었는데 그 사이 그 순간들은 모두 예전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나는 나의 일부를 내가 협상하지 못한 비율로 환전해서 낯선 사회를 받아들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서 있었다. 닫혀 있는 출입문의 유리가 안쪽으로는 긴 터널의 어둠을 보여주고 있었고 흐릿하게 그 위에 비친 나를 내가 쳐다보았다. 모두에게 익숙할 텐데 지하철은 가는 방향을 기준으로 양 쪽에 모두 출입문이 있고 도착하는 역마다 열리는 문이 다르다. 그런데 내가 회사에서 집으로 가는 동선은 공교롭게도 내가 내릴 때까지 계속 내가 처음 탄 방향으로만 문이 열린다. 그 의미는  탈 때 입구에서 출입구로 거세게 들이닥치는 사람의 물줄기를 계곡 사이에 눈치 없이 박힌 돌처럼 가로막지 않으려면 자연스럽게 반대편 출입문으로 걸어가는 것이 가장 안정적인 동선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흐름을 따르는 안정적인 장소로 가는 길을 나는 선택했으며 가만히 서서 예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내가 지하철에 대해 빠져 있는 생각이 있다. 별 진전도 없이 꽤 오래되었는데 이런 것이다. 지하철은 차례대로 다음 역으로 가는데 그건 누군가에겐 목적지이고 출발지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지하철이 가는 길에 놓인 모든 역은 다음 목적지로 가는 동선이자 그 자체로 목적지이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되는데 그건 바로 나의 존재다. 나는 집에서 가까운 역이 목적지이므로 다른 역들은 관심이 없다. 그 외의 것들은 빨리 지나가야만 하는 성가신 동선일 뿐이다. 내가 목적지로 가는 동선에서 만나는 역들에 무언가를 기대한다면 그건 그들로부터 멀어지는 속도이지 그 역 자체로 향하는 것에 있지 않다. 재미있는 것은 그 역이 누군가에겐 목적지이고 나의 목적지도 누군가에겐 성가신 동선이라는 점이다. 또한 지하철에서 휴대폰도 보고 책도 보지만 결국 그 시간은 기다리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어딘가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탄다면 그 안에서 하는 모든 일들은 기다리는 일일 뿐인 게 아닐까. 우리의 삶이 종착지에 도착하면 모든 예전들은 결국 기다린 시간으로 판명날뿐인 걸까.


그런 오글거리는 감상에 빠져있을 때 지하철은 광화문에 도착했고 나는 불현듯 내렸다. 광화문이라는 역에 내리는 사람 중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겠지만 내가 목적지가 아닌 성가신 동선에 마치 탈출하듯이 내렸다는 사실은 어떤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명할만한 필요성과 그럴싸한 이유가 있는지는 별개인데 과연 무엇이었을까. 휴가라서? 코로나라서? 지구온난화? 미세먼지? 집이 비싸서?  아니면 내가 아직 환전을 하지 않았던 어느 예전에 한 번쯤 그런 적이 있었기 때문이려나.


광화문 교보문고의 슬로건은 언제 봐도 참 절묘하다. 그렇지만 '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책을 만든다'는 말을 배반하는 건 다름 아닌 크고 아름다운 서점이다. 서점은 들어오자마자 알 수 없는 희망을 준다. 책을 한 글자도 읽지 않고 제목만 보면서 괜히 서성거리기만 해도 나는 더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러니까 돌아다니면서 별 시답잖은 생각을 할 뿐인데도 나는 마치 소요학파의 학습법에 따라 세상의 진실에 다가가는 것과 같은 망상에 빠진다. 가령 광화문 교보문고의 소설 섹션에 배정된 알파벳은 J인데 그건 내가 어느 독서 살롱에 개설된 문학 읽기 모임의 리더 이름과 같았으며, J는 I 다음에 오는 것이니까 소설은 사소설에서 자기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표현한 셈이니까... 소설이 J에 있다는 건 참 절묘한 게 아닌가.... 하고 혼자 억지스럽다는 사실도 잊은 채 감탄하는 것이다. 음... 정말 허접한 생각이 아닐 수 없는데 그만큼 서점의 아우라는 대단하다.


한동안 제목 쇼핑을 하면서 또 한 번 책은 정말로 많고 그 안에 꽉 차있는 문장은 더욱더 많으며 평생 내가 다 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할 시간에 한 문장이라도 더 읽는 게 더 좋은 게 아닌가만은) 게다가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읽은 것들 중에 기억하는 건 훨씬 더 적다. (그래서 사람이 덜 된 것인가. ) 그렇지만 파스 퀸트 쥐스퀸트의 <깊이에의 강요>에 수록된 동명의 에세이를 떠올렸다. 저자도 엄청나게 많은 책들을 읽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책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라는 질문에 한 문장으로 끝나는 줄거리 외에는 기억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고백을 했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기억나지 않는 문장들이 지금의 본인을 바꾸어 놓았을 거라는 다소 비약적인 긍정으로 끝냈다. 그러니까 <사일런스>라는 영화에서는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성화를 밟지 못해서 죽어간 일본의 초기 기독교인들이 나오는데 그건 내게 신이 없어도 종교인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망각의 신이 있어도 책은 사람을 만들고 신이 없어도 사람은 종교인이 된다.


그런 역설 같은 문장을 내 머릿속에 띄워놓고 나는 지금까지 써 내려온 글을 보았다. 여기까지 나는 예전이 너무 오래되었다는 사실과, 기대할만한 일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과, 나는 기다리는 일에만 묶여있다는 사실과, 내가 읽은 문장들을 잊어버린다는 사실과, 나는 결국 혼자가 아닌가 하는 사실에 대해서 썼는데,


또한 오늘이 내가 기대하던 예전이 되는 날도 있으리라는 추정과, 기대할만한 일들을 채워보기로 한 비약과, 오늘 갑자기 광화문 역에 내려 기다리는 일을 멈추었던 충동과, 내가 잘 잊어버리곤 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는 기억과, 세상엔 나 같은 혼자들이 잔뜩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호소에 대해서 또한 쓴 것이 아닌가. 했다.


마침내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에서 내린 나는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서 보행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빨간 불은 내게 성가신 동선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왼쪽으로 바라본 6차선 도로의 상행선에는 신호로 막힌 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으나 하행선에는 차가 한 대 밖에 없었다. 신호에 걸린 상행선의 차들은 좌회전이나 유턴을 기다리거나 직진이나 우회전을 기다리는 차들도 있었다. 양껏 달리다가 선착순으로 차곡차곡 채워진 차의 후면 불빛들은 한 때 낯설었으나 익숙해진 곳을 연상시켰다. 그곳은 사회라고 부르는 모호한 곳이었다. 나는 선착순으로 들어온 차들을 보며 내가 이긴 경쟁과 진 경쟁을 떠올렸다. 또한 상행선과 반대로 향하는 하행선의 텅 빈 도로를 보면서 나는 내가 선망했으나 선택하지 못한 길을 떠올렸다.


또 어느 날 나는 예전부터 지긋지긋하게 그랬듯이 슬픔을 과장해 넋두리를 하거나 불행을 볼모로 마음을 치장하려 들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경쟁에서 나를 이긴 자들과 나는 용기 내지 못한 길을 선택한 자들을 시샘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나는 상행선과 하행선을 옆에 둔 채 횡단보도를 건넜으며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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