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모든 이름들(=이름 없는자들의 도시) & 데미안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오래전 많은 사람들을 가슴 설레게 한 영화가 있었다. 건축학개론. 아, 참 수지가 예쁘기도 했지만 영화의 힘은 첫사랑의 기억을 건드린 데에 있었다. 다소 평범한 이야기 구조는 관객들이 각자의 첫사랑을 떠올리는데 도움을 주었다. 관객들의 눈은 서연과 승민을 보면서 제각각 마음속에 미애, 순희, 유리, 은혜 … 그리고 민혁, 영수, 승준, 민수… 라는 다른 이름들을 품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영화의 포스터는 이렇게 가장 보편 적면서 유일한 기억을 표현하고 있다.
소중한 첫사랑의 이름을 종이에 써보면 어떨까? 안타깝게도 이 로맨틱한 작업의 결과는 사실 ‘미어터짐’이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므로 종이에는 지금 살아있는 모든 사람을 포함해서 이제는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넣어야 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무대인 중앙 등기소는 ‘모든 이름들’을 기록하는 건축물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그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히는 증명서가 ‘산 자들의 책장’에 꽂힌다. 그가 이사를 가거나 졸업을 하거나 결혼을 하면 증명서에 기입된다. 그가 마침내 죽게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증명서에 사망이라는 글자와 함께 ‘죽은 자들의 책장’으로 옮겨지게 된다. 일감이 떨어질 일은 없는 것이다. 이 작업을 하는 것이 등기소의 직원들이며 그중 가장 말단인 한 명이 주인공인 주제 씨이다.
주제 씨는 50대의 외로운 보조 서기원이다. 그는 중앙 등기소에 딸린 작은 방에서 혼자 생활한다. 철저한 상하관계와 인간미 없는 등기소에서 그의 유일한 취미는 ‘유명인’들의 증명서를 몰래 빼와서 자기만의 수첩에 정리하는 일이다. 정작 본인은 구름처럼 지나간 흔적도 없이, 혹 비가 되어 내릴지라도 땅을 적시지도 못하는(p33) 무명인이다. 바로 우리들처럼.
어느 날 주제 씨는 유명한 사람들의 증명서를 가져오면서 실수로 전혀 모르는 한 여자의 증명서를 함께 가지고 온다. 그는 갑자기 책장에 있는 백 명을 모두 모아놓아도 이름 모를 한 명보다 더 무게를 갖지 못함을 느꼈다(p34). 아마도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 갑작스러운 전개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가로 불리는 주제 씨, 아니 주제 사라마구 소설의 특징이 드러난 것은 아니다. 사랑은 원래 마술적인 리얼이기 때문이다.
<추적>
이야기의 대부분은 주제 씨의 관점에서 미지의 여자에 대한 추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녀가 어릴 적 대모에 의해 낳아 길러졌고 한 번의 결혼과 한 번의 이혼을 했다는 이야기들. 대모와의 대화 속에서 주제 씨는 별거 아닌 무명인 들의 외로움을 전한다. 생판 남인 주제 씨에게 처음으로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대모는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p67)이다. 추적의 경과를 대모에게 알려주었던 것은 대모가 미지의 그녀의 반쪽 엄마인 이유도 있었지만 주제 씨에게 ‘고독이 결코 좋은 친구는 아니었기’때문이다(p82)’
주제 씨의 추적은 영화 ‘본 시리즈’에서나 나올 법한 거대 음모와 위기 혹은 쏘우에서나 나올 법한 트릭과 잔인함 없이도 충분히 긴박하고 그 이상으로 흔들리는 그를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조퇴를 내거나 휴가를 쓰는 일에도 매우 조심스러운 그가 미지의 여자를 쫓기 위해 작은 일상을 깨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쫓고, 쫓기기 때문이다. 그는 비밀스러운 사랑의 관심으로 그녀를 쫓지만 스토킹으로 오해받는다. 거기에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등기소 소장은 감시의 눈은 그를 쫓는다.
<This is not a love song>
그러면 이 소설이 적당한 긴장감을 가진 두근거리는 연애소설로 보아야 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다시 이름의 문제로 돌아가 본다.
‘너에게 붙여진 이름은 알아도 네가 가진 이름은 알지 못한다.’ (모든 이름들 P0)
<인간의 이름>
육지에 사는 동물 중 몸집이 가장 크며 긴 코를 자유롭게 이용하여 먹이를 먹는 동물. 의 이름은 코끼리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으로 인류에게 보편적이며, 인격적인 교제 또는 인격 이외의 가치와의 교제를 가능케 하는 힘. 의 이름은 사랑이다. 코끼리나 사랑 같은 이름은 그 이름이 지칭하는 대상의 속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 이름으로 소통하는 것은 그 이름이 포함하고 있는 의미들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름은 대상의 정체성을 한데 묶은 보자기와 같다. 보자기는 안에 무슨 내용물이건 관계없이 쌀 수 있다. 그래서 이름은 자의적으로 지어진다. 하지만 사물이나 어떤 속성을 위한 이름은 보자기 안에 넣을 것을 먼저 정하고 나서 보자기를 싼다. 즉 그 의미가 사전(事前)적으로 결정된다. 하지만 한 인간 아이가 태어나면 그가 울기만 하고 기억도 못할 시기에 이름을 지어준다. 보자기 안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 보자기를 묶어서 던져준다. 모든 이름들이 그렇게 지어진다. 그래서 우리 이름의 의미는 사후(事後)적으로 결정된다.
넌 이름이 뭐야? 응 난 ~야. 이 간단한 대화가 보자기에 대한 은유라면 대답은 어려울 것이다. 자신의 명함을 뚫어져라 쳐다봐도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대답은 쓰여있지 않다. 그런 맥락에서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이름을 아는 것에서 시작하여 채 이름을 다 알기도 전에 장례식이 찾아온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사람은 우리가 누구인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자문하기도 한다. 타인으로부터의 대답이 ‘너에게 붙여진 이름’이라면, 우리가 정말 넣어야 할 것으로 채운 이름이 ‘우리가 가진 이름’이다. 그들이 내 보자기에 넣은 나의 정체성과 우리가 정말 넣어야 할 것은 차이가 있다.
<감시>
우리는 ‘너에게 붙여진 이름에 집착’한다. 타인의 시선(視線)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거울은 대표적으로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실재적이자 비유적 상징물이다. 하지만 외출 전에 거울을 보는 나의 눈이 과연 나의 눈인지 다른 사람들의 눈인지 생각해보자. 그런 식으로 자기 성찰도 기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하고 싶었던 일, 하지만 엉뚱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쫓는 일은 스토킹으로 치부된다. 범죄자는 다시 시선의 감옥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그렇게 타인을 위한 이름으로 살아간다.
<추적- This song is voted alone>
알지 못하는 여자에 대한 추적은 우리가 모르는 이름, ‘우리가 가진 이름’에 대한 추적이다. 미지의 여자는 우리가 시간의 갈림길에 버리고 왔던 사랑하던 우리 자신이다. 이것은 사랑노래라기보다는 존재자의 여정이다. 주제 씨가 그러했듯이 우리의 이름을 홀로 선택하는 노래이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나는 그것을 살아보려고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에서
그것은 어렵다. 그럴싸한 핑계들이 그럴만해 보이기 때문이다.
<자살>
주제 씨는 추적의 여정에서 미지의 여인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자가 우리의 어떤 가능성이라면, 자살의 이유는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잊는다는 건 그것이 죽도록 내버려 두는 일이다. 우리가 어떤 가능성으로서의 자신을 잊으면 그건 자살이다.
주제 씨는 그녀의 자살을 확인하기 위해서 ‘죽은 자들의 서류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은 완전히 어두워서 돌아오려면 밖과 안을 잇는 줄이 필요하다. “주제 씨는 줄의 한쪽 끝을 소장의 책상다리에 묶었다,… 또 다른 한쪽은 자신의 발목에 묶어 약간의 줄을 풀어 바닥에 늘어뜨렸다. 그는 산 자들의 서류장 사이의 복도를 통해 앞으로 나아갔다.(p175)”. “넌 안전해, 엄마의 배와 연결된 탯줄을 가진 아이와 같은 거야(p184)”.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어 완전히 나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거기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거기서 나는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데미안에서
줄 하나에 의지해서 내면으로 들어가는 늙은 주제 씨에게서 싱클레어를 발견한다.
<rE - 다시>
소장은 주제 씨가 하는 행동을 모두 지지하고 있었다. 감시의 눈이란 것도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인지 모른다. 게다가 중앙 등기소 내의 산 자들의 서류와 죽은 자들의 서류를 한 공간으로 합치라고 말한다. 죽은 자들은 더 가까이에서 기억될 것이다. 주제 씨는 미지의 여자의 사망진단서를 찾아서 없애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미지의 여자는 더 이상 죽은 여자가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제 씨가 그녀의 사망진단서를 태우기 위해 죽은 자들의 서류장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결국 그녀를 살려서 ‘우리가 가진 이름’을 찾았을까? 알 수 없다. 싱클레어는 어땠을까?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그[Er]와
-데미안에서
우리는 아직 데미안과 하나가 되지 못했다. Er [그]로 삼위일체 된 ‘신격’을 암시하지 못한다. 주제 씨는 미지의 여자와 입 맞추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주제 씨는 다시 어둠으로 갔다. 한쪽 발에는 소장의 책상과 연결된 줄을 매달고(p297). 우리도 길을 잃지 않도록 줄이 필요할 것이다. 탯줄은 오래전에 잘렸다. 실을 뽑아줄 아리아드는 신들의 노여움으로 죽었다. 남은 것이 나를 감시하는 듯한 시선(視線)뿐이라도 괜찮다. 발목에 묶고 다시 어두운 거울이 있는 곳으로, 운명의 영상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도 이별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한 번도 잊지 않았던 것처럼 죽은 가능성을 만나는 것이다. 오래된 갈림길로 되돌아가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가진 첫사랑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으니까. 다시(rE) 만나면 꼭 물어보자.
네[내] 이름이 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