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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by Hee언니

차가운 **차 1.5리터 한 병을 짊어지고 출근을 했다. 얼굴이 아직도 화끈거리고 몸이 축축 쳐진다. 아무도 없는 아침, 물 먹는 하마처럼 벌컥벌컥 차가운 물을 들이켜고 책상에 널브러져 있다. 뭔가 이상하다. 이 선생님, 저 선생님 자꾸 전화가 온다. 어제 무슨 일 없었냐며 자꾸 물어본다.







경기도 **시에 교수님, 강사 선생님 몇 분과 행사를 갔다. 일을 마치고 자연스레 저녁을 먹는 분위기다. 회식이다. 회식의 꽃은 뭐다. 술이다. 알코올 분해 효소가 제로인 엄마를 닮아 1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져 소방차를 불러야 하는 사람은 항상 술자리가 괴롭다. 이런 건 아빠를 닮아도 되고, 반씩 나눠 닮아도 될 텐데, 안 좋은 건 한쪽만 닮는 건 왜 그럴까.

그날도 어떻게 하면 어른들 눈치를 보며 술을 한잔이라도 덜 마실 까 궁리를 했다. 첫 잔은 당연히 원샷이다. 두 번, 세 번 까지는 다들 지켜보고 있기에 거기까지는 일단 마셔야 한다. 한잔 마시고 불 타오르는 얼굴이 되면 화장실에 도망도 가있고 눈치껏 왔다 갔다 덜 먹으려고 기를 쓰면 어르신들은 그러려니 하신다. 세 잔쯤 마셨으니 내 임무는 끝났다며 열심히 고기를 흡입했다. 먹고 먹고 또 먹고. 고기는 항상 옳다.


집에 가기가 멀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회식은 일찍 끝났다. 일찍 집에 갈 수 있는 이런 횡재가 있냐며 좋아한다. 오늘은 몇 잔 안 마시고도 용케 잘 버텼다며 좋아라 했다. 아. 집에 어떻게 가지.

버스도 지하철도 어디서 타는지도 모르는 곳에서 택시를 타야 하는 건가. 택시비가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어떡하지 어떡하지. 돈은 그렇다 치고 혼자 여기서 택시 타는 것도 무서운데. 차 타면 졸 텐데. 무섭다. 술이 깬다. 어떡하지.


다행히 같은 방향으로 가는 A선생님과 짝이 됐다. 가는 길에 내려주신다 한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택시를 타고 가는 길. 차도 안 막히는 밤이지만 1시간 넘게 졸린 눈을 떴다 감으며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졸았다. 집에 도착하자 선생님께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이게 어제의 일이다.


"어제 A 선생님이 무슨 말 안 해? 교수님 이야기한 거 없어?"


왜 다들 달려들어 득달 같이 물어보는 걸까. 사냥감의 약점을 찾는 순간 덥석 물어버리겠다는 맹수들 같았다. 예상치 못한 물음에 어안이 벙벙했다.

본능적으로 살고 싶었나 보다.


"제가 술을 마셔서 기억이..."


계속되는 물음에 죄지은 사람의 묵비권 마냥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를 반복했다. 어둑어둑한 경찰서 취조실, 공범이 불어서 나는 다 알고 있으니 어서 자백을 하라는 드라마 속 한 장면. 저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대단한 것도 아닌데 독립투사 마냥 연신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단순히 다른 사람에 관심이 적고 공감이 부족해 맞장구칠 줄을 모른다. 말이 말을 낳는 세상에서 이런 공감 능력 부족은 의외로 침묵이라는 절묘한 예의에 맞닿아 입이 무거운 아이라는 믿음이 돼버렸다. 이왕 이렇게 얻어걸린 거 침묵의 아이콘이 되기로 했다. 이 날 이후로 저는 몰라요 콘셉트를 유지하며 평화로운 조교 생활을 했다.


비밀유지 서약서를 쓴 건 아니지만 비밀을 유지하겠다.

그날 선생님과 했던 대화는 또렷이 기억이 난다.



비밀 [秘密]
1. 남에게 알리지 않고 숨기는 일
2. 남에게 무언가를 알리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태도가 있다.
[출처 : 다음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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