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왜 가르치는가.

by Hee언니

괜스레 몸이 말을 듣질 않는다. 운동 부족인지 허리가 아픈 것 같더니 골반이 뻐근하다. 무릎도 시큰거리고 뚝뚝 거리는 관절의 소리는 리듬감이 느껴진다. 발목을 돌릴 때마다 뿌드득 뿌드득 맷돌 가는 소리가 들린다. 어깨가 뻐근하더니 그다음에는 목이 그다음에는 머리가 콕콕 쑤신다. 온몸이 쑤신다. 몸살이 났다.


새 학기 증후군은 아이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마흔 넘은 아줌마도 새 학기는 버겁다.

3월, 새로운 학생들을 만나야 한다. 준비가 되었느냐는 마음속 질문에 답하기가 꺼려진다.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건, 몸이 아니라 자신감이었나 보다.

고작 몇 시간 안 되는 강의에도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존재한다. 내가 가르치는 게 맞는지, 자격이 되는지. 검색만 하면 뭐든지 알려주는 A. I 세상에서 과연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있는지.


올해는 대면수업이 전면적으로 시행된다. 솔직히 설렌다. 마스크를 벗을 수 있으니,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야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공부를 한다는 것, 지식의 습득이 아닌 서로의 이야기를 함께하는 시간이 그리웠나 보다.








시작 시간에 땡 하고 우아하게 들어가고 싶지만, 어영부영 딴짓하다 시간을 못 맞추느니 일찌감치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게 마음이 편하다. 좀 없어 보이지만 아무도 없는 빈 강의실에 먼저 가서 기다린다.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운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오늘따라 그들의 젊음이 눈에 띈다. 예뻐 보인다. 젊음에 주눅이 든다. 어른들이 항상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예쁜 나이. 이런 시절이 없었던 것 마냥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어떤 마음으로 배웠던 걸까. 철이 없어 용기가 있었고, 아는 척을 했다. 안다는 걸 이야기하는 건 좀 우습다. 아는 척이 잘난 척이 되기도 하고, 상대방이 모르는 걸 아는 척했다가 아니라고 틀렸다는 답이 돌아오기도 한다. 아직도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과목명은 교과교수법이다. 수업을 할 때 필요한 교수법과 지도안을 만들어보는 시간이다. 수업을 한다고 가정하고,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6하 원칙으로 연결해 생각을 정리 한 뒤, 다음 시간에 만나자고 했다. 훗날 선생님 될지도 모르는 학생들에게 왜 가르치는가를 생각해 보자고 했다.


그것을 되묻는다. 왜라는 그 한마디의 시작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왜 무용을 했는가.

왜 가르치는가.



훌륭한 가르침은 교사의 정체성과 성실성에서 나오며, 하나의 테크닉으로 격하되지 않는다. 나쁜 교사는 과목과 자신을 격리시키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과도 멀어진다. 반면, 훌륭한 교사는 유대감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어서 자신의 자아, 학과, 학생을 생명의 그물 속으로 한데 촘촘히 엮어 들여 학생들 스스로 하나의 세계를 엮어 내는 방법을 가르친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유대감은 방식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는 것이다.

파커 J. 파머(2005), <가르칠 수 있는 용기>
keyword
작가의 이전글If I could meet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