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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독성 Oct 10. 2023

유기초 입양

주차장 화단에 뿌리째 뽑혀 가지런히 놓여있는 식물이 있다. 확실히 기억이 난다. 아침에 분명히 땅에서 잘 자라고 있던 식물이다. 이게 뭘까.


오늘 아침 애들을 차에 태우고 차문을 닫다가 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청난 호박 덩굴들이 산을 이루던 곳에 커다란 호박잎은 없어지고 라일락 나무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그 옆에는 이 친구가 있었다. 생뚱맞게 꽂혀 있는 모습에 이런 것도 여기 심을 수가 있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서둘러 차를 탔다.


우리 집 소유의 화단이지만 우리는 식물을 모른다. 몇 년 전 원래 심어져 있던 개나리가 너무 거대해져서 뒷집 할머니가 좀 잘랐으면 하셨다. 신랑은 이왕 자르는 거 팍팍 싹둑싹둑 잘랐다. 반은 죽은 것 같고, 반은 자른 만큼 또 금세 자랐다. 올해, 개나리가 없어진 자리가 허전해 보였는지 안경점 사장님은 라일락을 심었다. 라일락을 심어도 비어 있는 곳에는 호박씨를 뿌리셨는지 호박잎이 무성해졌다. 다시 개나리가 무성하던 그때로 돌아가 커다란 장벽이 세워졌다. 그랬던 그곳이 깨끗해지고 이름 모를 식물이 나타난 것이다.








집으로 올라오자 궁금한 마음이 샘솟는다. 분명히 기르고 있던 식물일 텐데 안경점 사장님이 가지고 가려고 뽑았을까. 어쨌든 우리 집 화단인데 그냥 가져올까. 그래도 기르는 식물인 것 같은데 물어볼까. 어쩔까 저쩔까 고민을 하다가 신랑에게 물었다.


"밑에 화단에 아침에 뭔가 심어져 있었는데, 지금 보니 뽑혀있더라. 안경점 사장님이 심으셨겠지? 근데 왜 뽑혀있지? 그거 그냥 내가 키울까? 물어봐야 하나? 물어보고 데려올까?"


뭘 그런 것까지 주워오냐고 할까 봐 마구마구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신랑은 그렇게 궁금하면 물어보고 오란다. 그렇지. 궁금하면 물어봐야지. 아마도 이 궁금증이 풀리지 않으면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객사할 식물이 악몽으로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주차장으로 달려가 다시 한번 확인했다. 혹시 몰라서 식집사 커뮤니티에 이 식물이 키울 수 있는 것인지 의견을 물어봤다. 다들 퇴근 시간인지 바로 답이 없다.


눕혀놓고 찍었더니 정말 버려진 것 같은 아이


일단 사장님께 용기 내 여쭤본다. 이 친구는 사장님이 심어둔 게 맞았다. 열대 식물이라 밖에서 키는 잘 자라는데 날씨가 추워져서 파보니 영 힘들 것 같다고 가져가려면 가지고 가라고 하셨다.


암만 다시 봐도 이 아이를 버릴 수는 없다. 드디어 식물을 보는 눈이 생긴 건가. 버려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뽑혀있으니 버린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런 애매한 상황에서 유기초를 입양했다. (그로로 에서 유기견, 유기묘도 아니고 유기초(?)를 데리고 올 생각을 했다고 댓글을 달아 주신 분이 있다. 신박하다. 이렇게 신종어가 생기는 건가. 감사합니다.)



다시 봐도 이 아이는 키울 수 있는 식물이 확실하다.



아뿔싸, 급하게 데리고 오려고 보니 집에는 이 친구를 심을만한 흙이 없다. 밖에 있는 흙에 바로 심어 들이자니, 벌레도 함께 입양할 것 같다. 물꽂이를 하자니 해본 적이 없어서 겁이 난다. 급하게 옆집 꽃가게로 뛰어갔다. 꽃집 사장님이 다행히 화분에 심어주실 수 있다고 했고, 뿌리가 있으니 물꽂이를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했다. '알로카시아'라는 이 친구의 이름도 알려주셨다. 만나서 반갑다. 알로카시아.


예쁜 토분에 심은 모습을 보니, 화단에 누워있던 그 모습은 어디 가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귀한 아이를 찾아냈구나. 영화 레옹의 마틸다처럼 옆구리에 화분을 끼고 신나게 집으로 향했다.



@레옹



아이들은 궁금해했고, 신랑은 저걸 정말 가져왔냐는 듯한 입 벌림으로 말을 대신했다. 집에 가서 물을 흠뻑 주라는 꽃집 사장님의 말이 번뜩 떠올라 잘 자라길 바라는 마음을 듬뿍 담아 물을 줬다. 어디에 자리를 잡을까 곰곰 생각하다 티브이 옆 지구본을 옮겼다. 커다란 초록 식물이 자리 잡자 온 지구가 초록초록 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멋질 일인가. 원래 우리 집에 살던 것처럼 자연스레 풍경에 자리 잡았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던 그다음 날 아침,  눈을 의심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줄기가 모두 꺾여서 축축 쳐져있었고, 잎은 시들어가고 있었다. 몇 시간 만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죽이기만 하던 내 이력에 보너스를 얹어주는 건가. 뭐가 문제일까 고민하다 혼자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아서 그로로 커뮤티니에 물었다. 잎을 잘라주고, 물꽂이를 해보라고 한다.


물꽂이는 무섭다. 내 손으로 건드리면 바로 떠나갈 것 같아서 두려웠다. 꽃집으로 달려가보니 점심시간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면서 물어보려 했는데, 놓쳤다. 어쩔 수 없이 가장 시든 잎 두 개만 잘랐다. 인터넷 서핑을 눈이 빠지게 했지만, 딱히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초보 식집사는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하루를 지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다행히 잎 하나가 살아났다. 희망은 있다며 갑자기 변한 환경에 적응하는 중이라며 마음을 달랬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더 안 좋아졌다. 잎사귀는 다 마르고 줄기가 아예 꺾여버린 것도 생겼다. 튼튼한 줄기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 잘라냈다. 처음 본 우아한 자태는 온데간데없고 줄기 하나만 살아있는 외로운 아이가 되어버렸다. 속상하다. 잘 키워보려 데려왔는데 정성이 부족하다기엔 시간이 너무나 짧은 만남 아닌가. 정성을 쏟을 시간을 달란 말이다.


오늘 드디어 물꽂이를 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하나 남은 잎이 누런색으로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아이들을 다 재운 고요한 시간, 마음을 다잡고 삽을 들었다. 비장하게 흙을 파내며 제발 뿌리가 상하지 않았기를 기도했다. 흙밖으로 나온 뿌리를 보는 순간 안도했다. 우리 집에 올 때 그대로 뿌리는 자리 잡고 있었고, 아주 작은 뿌리가 조금씩 나오는 중이었다. 눌러보니 무른 곳도 없었다. 성급했던 걸까. 흙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걸까. 어쨌든 잎이 변하고 있으니, 화병에 물을 채워 조심스럽게 담갔다.


우리 집에 데려온 이상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한다. 할 수 있는 건 모두 했으니 믿고 기다려 줄 시간이다. 이제 괜찮겠지.



처음 온 그 날처럼 잘 자라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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