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신체검사를 하던 날, 시력 검사 판의 글씨가 안 보이는 걸 인정할 수가 없었다. 글씨가 점점 작아질수록 숫자를 외칠 수 없었다. 대왕 숟가락으로 눈을 너무 세게 눌러서 그런 거라며 손을 번갈아가며 손잡이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날 이후, 칠판의 글씨가 안 보이기 시작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안과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바로 안경점으로 가서 안경을 골랐다. 금색으로 반짝이는 커다란 안경테가 낯설었다. 플라스틱 알로 할까요, 유리 알로 할까요란 안경점 사장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건네주는 안경을 썼을 때, 희뿌옇던 세상이 환하게 빛났다. 하나를 받았으니 하나를 내놓아야 하는 세상의 진리가 작용했다. 밝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졌지만, 안경의 코바침 실리콘이 그다지 높지도 않은 코를 더 납작하게 눌러주는 효과가 있었다.
안경 흠...
외모가 신경 쓰이는 나이 5학년이 되었을 때, 안경을 벗어버렸다. 묘한 해방감에 사로잡혔다. 안경 하나 벗은 것뿐인데 용기가 생겼다고나 할까. 눈에 뵈는 게 없어졌다. 툴툴거리던 입이 앙다물기 시작했고, 까칠한 마음에는 사포가 닳도록 밀어대도 미끈해지지가 않았다. 사춘기의 파도는 안경을 삼키고 저 멀리 나아갔다.
정신 차리고 보니 중학생이 됐다. 시력 검사판의 숫자들이 모조리 사춘기와 함께 사라졌나 보다. 이제 정말 뵈는 게 없다. 질풍노도의 시기의 끝맺음을 무용으로 풀었다. 무용을 시작하고 보니 안경은 더 쓸 수가 없었다. 땀이 흘러 코받침과 함께 안경은 미끄러졌고, 턴을 돌 때마다 원심력으로 함께 안경이 돌아갔다. 흘러내린 안경을 손으로 쓸어 올리기엔 양손은 동작을 따라 하기 바빴다. 맞지 않는 초점이 신경 쓰여 동작은 잘 될 리 없었다. 중학교 2학년 꽤 이른 나이에 콘택트렌즈를 끼기 시작했다. 신세계였다. 안경 말고도 눈이 환하게 보이게 할 수 있는 물건이 있다니. 그날 이후 낮에는 렌즈, 밤에는 안경을 끼며 이중생활을 했다. 렌즈는 몇 년 이상 못 낀다는 이야기에 겁을 먹으면서도 한번 맛본 신세계는 끊을 수 없는 마약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중생활이 끝난 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이후이다. 둘째를 낳고 1년 후, 애도 낳을 만큼 낳았으니 라식 수술을 했다. 어릴 때는 돈이 없어서 못하고, 무서워서 못하고, 애 낳으면 시력이 떨어진다고 해서 못했던 수술이다. 얼떨결에 조리원 동기가 라식 수술을 같이 하러 가자 제안했다. 신랑은 안경 낀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난시가 심해 렌즈 값과 안경 값이 엄청났기에 수술을 적극 찬성했다. 걱정도 됐다. 아이들을 돌봐야 했기에 각막을 조금만 깎는 라섹은 회복 시간이 길어서 할 수 없었고, 한번 수술하면 재수술을 할 수 없는 라식으로 해야 했다. 몇 년 있으면 노안도 올 테고, 난시가 심한 눈이라 또다시 시력이 떨어질 것도 각오해야 했다. 이왕 마음먹은 거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수술을 하기로 했다.
결과는 대 만족이었다. 이 좋은 걸 왜 이제야 한 걸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온 세상이 보이는 게 얼마만인가. 다시 태어난 기분이란 게 이런 걸까. 아이들이 안경을 밟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렌즈가 돌아가서 눈꺼풀을 뒤집으며 찾지 않아도 된다. 몸의 변화는 삶의 질과 연결되어 있구나. 역시 오복이 그냥 있는 게 아니구나. 시력이 좋아졌을 뿐인데, 세상을 바라보는 눈까지 정화가 됐다.
셋째까지 낳을 줄은 몰랐지만, 출산 이후에도 시력은 아직도 1.0을 유지하고 있다. 노안이 올 때까지 열심히 시력을 위해 노력을 해볼 참이다. 어떻게 다시 찾은 시력인데 아끼고 아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