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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독성 Dec 07. 2023

청설모와 마주하기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오를 때면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그가 나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 소름 끼친다. 쿵쾅거리는 마음을 부둥켜안고 잽싸게 그곳을 지나간다. 마주해야 한다. 3, 2, 1. 다다다다. 눈을 감을 수도 없다. 재빨리 지나가는 게 상책이다. 그의 동그란 눈은 나보다 더 놀란 모습으로 나와 마주친다. 순간의 영원을 간직 한 채 바라보는 눈빛이 가끔 애처롭기도 하다. 옥상으로 가는 관문, 그 잠깐의 찰나를 마주하기가 아직도 두렵다.


딱 집에 들어가는 현관까지만 내 집이라 생각했다. 옥상을 올라갈 일이 없었다. 하나였던 아이가 둘이 되고 그 아이들이 뛰어다니자 그제야 옥상의 존재가 생각났다. 아무것도 없는 옥상은 우리만의 놀이터가 됐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아직도 험난하다. 오래된 물건들은 계단 곳곳에 켜켜이 눌러앉아있다. 뽀얗게 쌓인 먼지들은 작은 숨결 하나만으로도 사막의 거대한 모래바람을 일으킬 것 같다. 세월의 흔적 앞으로 선뜻 손내밀기가 힘들다. 외면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 손길로 바뀔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라고나 할까. 가장 의외의 물건, 생각지도 못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박제된 청설모.


가끔 근처 숲에 가면 청설모가 나무 사이를 오가며 바쁘게 움직인다. 먹이를 찾아다니다 가까이 다가올라 치면 숨죽이며 지켜본다. 자연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때 가장 자연스러운 동물이 우리 집에 있다. 동그란 눈을 마주한 채로. 왜 이곳, 그것도 계단 한편에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버님이 사다 놓으신 거라는데, 그냥 옛날부터 있었기에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그 아이가 우리 집 계단에 혼자 있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혼자서만 겁을 먹고 옥상으로 뛰어간다.








겁이 많다. 심장이 콩알만 한 아이였다. 유치원 놀이터 미끄럼틀 사이 작은 출렁다리에서 멈춰있던 두 다리가 아직도 기억난다. 처음 기억하는 두려움이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친구들이 모두 떠나간 놀이터에 홀로 남았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는 그곳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후들거리를 다리에게 용기 내라며 최면을 걸고 있었다. 분명 스스로 출렁다리에 발을 내밀었다. 한 발자국 내밀고는 한참을 멈춰있었다. 두려움이 발을 옥죄었다. 성큼성큼 서너 발자국만 걸으면 끝일 것을, 왜 그리 머뭇거렸을까. 두려움에서 구해줄 사람은 나 자신 뿐이었다. 어떤 용기였는지는 모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정지화면 속 다리는 한 발을 겨우 내디뎠다. 스스로 탈출했다. 다리 끝에 마지막 발자국을 딛자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공포, 그저 자신이 마주하기 싫은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의 해방감이란. 눈앞에 두려움이 사라지는 그 시원함이란.


공포 영화를 보면 며칠이고 꿈을 꿨다. 악몽에서 헤매다 이불 속에 들어가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며 발가락으로 이불을 꼬집어 장판 바닥에 꾹 눌렀다. 생각해 보니 여간 우스운 게 아니다. 내가 만든 세계, 그 작은 이불 속에 들어간다고 해서 누가 못 들어오는 것도 아닐 텐데. 혼자만의 세계에서 나를 온전히 보호하고 싶은 소녀의 마음이 어쩐지 귀엽기까지 하다. 아직도 그 귀여운 마음으로 놀이동산 바이킹은 타질 않고, 전망 엘리베이터에서는 창을 내다보는 걸 피한다. 싫어하는 것을 피하는 방법으로 두려움을 원천 봉쇄했다.


우리 집 청설모는 피할 수 없다. 마주 보고 맞서야 하는 두려움이다. 어쩌다 발 내밀어 오도 가도 못하는 미끄럼틀의 출렁다리 같은 존재. 스스로 용기 내 한 발자국 다가서야 옥상 문을 열고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 세상으로 나가는 탈출구를 위해 힘을 내야 한다. 하얀색 타이즈에 검은색 리본 달린 에나멜 구두를 신은 어린아이도 극복한 두려움, 어른이 된 지금은 쉽게 지나칠 수 있을까.


여전히 한 발자국 내딛기 위해서 고군분투 중이다. 학교만 졸업하면 되겠지. 결혼만 하면 되겠지. 이것만 끝나면 되겠지. 바로 앞의 탈출구만 찾아다니며 급한 불만 끄면서 어른이 됐다. 싫어하는 건 요리조리 피하며 몸만 커버린 걸 수도 있다. 애를 낳으면 어른 된다더니 산 넘어 산이다. 어쩌자고 애를 셋이나 낳은 건지. 무식해서 용감했다고 밖에. 고민 없는 사람 없다며 고작 그거 가지고 그러냐며 속으로 비웃은 적이 많았다. 나쁜 심보 되돌려 받았다. 고민 없는 인생 없을 건데. 겉으로만 해맑았지, 속으로는 끙끙 앓는 고민 많은 피곤한 인생이다.


쇼펜하우어의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급자족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을 빗대어 행복의 모든 외부 원천은 본래 아주 불안정하고 의심스러우며 우연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아주 유리한 상황에서조차 막혀버리기 쉽다고 설명한다. 행복은 스스로 만족하는 이의 것이라는 당연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진리를 강조한다. 간단하지만 실천은 어렵다. 가능은 할까.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청설모라는 약간의 두려움만 스스로 해결하면 드넓은 하늘을 마주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스스로 단단하게 잘 자라고 있다. 엄마라는 이름아래 책임감이 고민 될 뿐. 고민이라는 것도 해결되지 않는 건 없다. 마주하는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했을 때 괴로울 뿐이다. 이 친구, 청설모가 왜 우리 집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됐다. 한번, 두 번 마주칠 때마다 용기 내 마주 본다. 조만간 또렷이 눈 마주치며 머리를 쓰다듬어 줄지도 모른다. 계단을 올라 옥상에서 아이들과 다 함께 신나게 뛰어다닐 수 있다. 닿을 듯 닿지 않는 하늘과 함께한다. 행복이 손끝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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