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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독성 Nov 30. 2023

뒤주의 속삭임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열리면 커다란 밤색 뒤주가 우리를 맞이한다. 뒤주는 나무로 만든 곡식을 담는 궤(櫃 : 물건을 넣어두는 정방형의 상자)이다. 평범한 가정집에 뒤주라니. 문화재로 지정된 으리으리한 한옥도 아니고, 고가구에 취미가 있는 사람이 사는 집도 아니다. 평범한 가정집이지만 뒤주가 있다. 오래된 집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라고나 할까.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신랑의 증조부는 이곳에 터를 잡으셨다. 신랑이 군대 간 사이 어머님은 오래된 한옥을 허물고 새집을 지으셨다. 새집은 20년 된 헌 집이 됐다.

     

처음 이 집에 발을 들이던 그날이 생각난다. 그땐 몰랐다. 이게 무슨 물건인지. 연애 시절 잠깐 와본 남자친구 집에는 서로 눈 맞추며 웃기 바빴다. 이 집에 뭐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집이 아니었으니깐. 결혼을 하고 알았다. 현관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건 뒤주라는 걸. 신기했다. 그뿐이었다. 신혼 2년을 아파트에서 살 때까지도 내 집이 아니었으니깐. 관심 밖의 물건이었다.

 

둘째를 품에 안고 이 집으로 이사를 들어오던 날, 분주하게 오고 가는 짐들 사이로 정확히 눈동자에 박힌 물건이 있다. 뒤주. 이게 왜 이곳에 있는 걸까. 항상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인데,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내 집이라 생각해서일까. 그제야 현관 앞을 지키고 있는 커다란 물건의 정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낯설다.


명치보다는 아래에 허리보다는 큰, 커다란 갈색 나무 상자 세 개가 왠지 모르게 두렵다. 그냥 나무 상자일 뿐인데. 설마 뒤주 하면 떠오르는 사도세자가 우리 집 뒤주에 있다는 착각을 하는 걸까. 괜스레 어둑어둑한 공포감만 밀려온다. 무섭다 핑계 삼아 외면하고 싶은가 보다. 그냥 보기가 싫은 걸 지도, 정 붙이기가 싫었던 것일 수도.


뒤주 속에 갇혀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새로운 삶들이 펼쳐질 때마다 두려움에 휩싸여 숨어있는 내 모습들이 뒤주 속에 있었다. 뒤주만 바라보면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 숨죽이고 있는 내가 보였다. 숨이 막혔다.

        

외롭다.
'외롭다'라는 말은 형용사가 아니다.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동작 동사다. 텅 비어버린 마음의 상태를 못 견디겠을 때에 사람들은 '외롭다'라는 낱말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발화한다. 그 말에는 외로움을 어찌하지 못해 이미 움직여대는 어떤 에너지가 담겨 있다. 그 에너지가 외로운 상태를 동작동사로 바꿔놓는다.   

쓸쓸하다
'외롭다'라는 말에 비하면, '쓸쓸함'은 마음의 안쪽보다는 마음 밖의 정경에 더 치우쳐 있다. 정확하게는, 마음과 마음 밖 정경의 관계에 대한 반응이다. 외로움은 주변을 응시한다면, 쓸쓸함은 주변을 둘러본다. 마음을 둘러싼 정경을 둘러보고는, 그 낮은 온도에 영향을 받아서 마음의 온도가 내려가는 게 바로 '쓸쓸함'이다.

김소연의 <마음 사전> 중   



 오랜 옛날 가득 채워 둔 쌀알은 사라지고 쓸모를 다해 혼자 우두커니 있는 뒤주의 삶이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쓸쓸하게 했다. 이제 겨우 학업을 마치고 꿈에 한 발짝 다가섰다고 생각했는데, 또 한 번의 출산은 있지도 않은 경력을 깡그리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할 거란 걱정에 쓸쓸함이 밀려왔다. 애를 둘이나 낳으면 이제 여자가 아닐 것 같은 쓸쓸함을 상상했다.

 

마주했던 쓸쓸함으로 나를 다시 바라봤다. 너도 외로웠구나. 나도 외로웠구나. 우리는 서로의 외로움을 마주했다. 용기 내 말을 걸었다. 아침이 달라졌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인사하는 사이가 됐다. 내가 만들어 낸 편견들을 마주하며 인사했다. 오고 가는 시선들 사이로 쓸쓸함을 거둬들였다. 이젠 웅크리고 울고 있던 모습들이 뒤주 안에서 꿈틀거리지 않는다.


오히려 겁이 없어졌달까. 셋째가 생겼다. 결혼이라는 굴레가 더 이상 갑갑하지 않다. 여전히 경력을 쌓는 중이고, 꿈에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중이다. 혹시라도 커다란 뭔가가 되지 않아도 좋다는 마음도 생겼다. 내가 나를 가두던 억지스러움에서 벗어나는 중이다.

                    

우리는 항상 뒤주 같은 편견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자신을 가둬둔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 원래 나는 이렇다는 편견 또한 스스로 만든 것일 뿐. 뒤주는 쌀독이 아니던가. 단단한 마음으로 가득 찬 쌀독으로 만들어야겠다.     


셋째를 낳기 전, 하루 종일 집을 둘러보며 닦고 쓸던 때가 있었다. 애정을 주고 싶어서였을까. 이제는 어디로 갈 수가 없다는 걸 알기에 포기한 걸지도 모르겠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밥을 먹고 잠을 청하는 반복된 일상이 7년째 접어들고 있지만 아직도 가끔 낯설다. 우리 집인데.


오래된 집과 나누는 대화는 이제 시작이다. 겨우 뒤주 하나를 극복했다. 차가운 현관 바닥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바라봤다. 짙은 나무의 결이 흩어져 곳곳에 파여있는 자국들이 아른거린다. 더 이상 손끝에 스쳐 지나가는 가시들이 날카롭지 않다. 자연스레 나뭇결을 훑고 있다. 나무의 오래된 숨결에 스며들고 있다. 뒤주는 우리 집을 지켜주는 든든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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