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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독성 Jan 29. 2023

숨도 못 쉬게 딱 붙는 그 아이보리 원피스

"장미 소원 아직 남아있어."

"가장 큰 소원 이뤘네. 나랑 결혼하는 거."


말렸다. 까먹을게 따로 있지 진작에 써먹을걸 그랬다.

소고기 10인분 정도는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아깝다.


흑장미를 자청한 어리석은 그날.

동생 결혼식 때 입으려고 샀던 숨도 못 쉬게 딱 붙는 아이보리 원피스를 입은 그날.

단지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강남역 지오다노 앞, 서른 넘어 2대 2  미팅을 하겠다고 사람 많은 길거리서있다니. 언제 적 강남역이더냐. 한마디로 너무 쪽팔린다.


아침엔 일산 요가원, 서초동 선배언니 결혼식을 찍고 이곳으로 왔다. 버스 타고 졸면서 돌아다닌 지친 몸뚱이는 남자고 연애고 다 필요 없고 결혼식이라는 명목 아래 걸쳐 입은 이 불편한 옷을 집어던지고 널브러질 집에 가고 싶다.

아직 그들이 도착하지 않았다.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고 눈에 뵈는 게 없어질 시간이다. 만나자마자 밥부터 먹어야겠다. 메뉴는 밥만 먹고 헤어지도록 삼겹살을 먹었으면 좋겠다.








어제저녁 퇴근길에 갑자기 걸려온 매니저의 전화를 받았다. 자기랑 미팅을 같이 나가달라 한다.

갑자기 내일. 바로 내일.

그냥 혼자 나가지 왜 굳이 나를 데리고 나간다는 건지. 

그러나 그녀는 같이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동갑이지만 관리직, 나는 그냥 강사. 미묘한 계급차이로 인해 마지못해 같이 간다고 했다.


그렇게 붐비는 토요일 저녁 강남역 한복판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배가 고프다. 집에 가고 싶다.


그들이 왜 늦는지는 모르겠으나 매니저는 화가 났다. 오든지 말든지. 안 오면 더 좋고.

그들의 등장과 동시에 매니저의 한마디


"별로다."


별로던 핸섬가이던 난 관심이 없다. 배고프고, 다리 아프고, 그냥 집에 가고 싶다.

밥부터 먹으러 가자고 해서 신이 났다. 밑져야 본전 철판을 깔고 고기를 살짝 외쳐본다. 구워지는 고기에 말없이 젓가락질 삼매경에 빠져 열심히 배를 채우고 동태를 살폈다.

밥만 먹고 바로 가면 싸가지가 바가지라 욕먹겠지. 매니저는 별로라더니 가기 싫은 눈치다.

빨리 가고 싶다.


2차는 호프집.

그래. 마시자. 어차피 집에 빨리 못 갈 거 술이나 먹자.

게임하고 술 먹고. 또 술 먹고 게임하고.

이렇게 전형적인 처음 만난 남녀들의 술자리라니.

빨리 가고 싶다.

A가 게임에서 걸려 벌주를 들었다. 흑장미를 외친다. 에라 모르겠다. 원샷. 막 나가도 집에만 잘 가면 된다.

저 술잔 들며 흑장미를 기다리는 순간조차도 기다리기가  싫다.

빨리 가고 싶다.

빨리 가고 싶다.


3차도 무슨 술집.

얘는 아직도 갈 생각이 없다. 버리고 갈까.

내일 보면 민망하려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동태를 살펴야겠다. 별로라던 그 말은 뒤집어엎어서 집에 보낸 지 오래됐고, 그분은 집에 갈 생각이 점점 더 없어지는 듯하다.

갑자기 팥빙수가 먹고 싶다 한다. 밥도 먹고 술도 먹었으니 디저트까지 먹고 싶다는 건가. 이해할 수가 없다.  또 둘이 굳이 팥빙수를 사러 가는 거니. 

빨리 가고 싶다.

빨리 가고 싶다.

빨리 가고 싶다.


말을 건다. 작업인 건가. 지금 너와의 미묘한 기류가 문제가 아니다. 아까 먹은 흑장미가 이제야 올라온다. 울렁거리는 속을 초면에 쏟아부을 수는 없으니 건성건성 대답을 하고 물만 홀짝였다.

팥빙수 사러 간 둘은 얼음을 얼려서 갈아오는지 올 생각을 안 한다. 이 어색한 둘만의 분위기가 술기운으로 어우러지는 건 더 싫다.


드디어 팥빙수가 왔다. 이것만 다 먹으면 나는 집에 갈 수 있다. 저 얼음이 다 녹기 전에 일어날 수는 없겠지.

팥빙수를 같이 사러 갔다 오더니 이제는 더 집에 갈 생각을 안 한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내가 눈치 없는 애가 될 수 있겠다. 눈치를 챙겨 얼른 일어났다.


그가 같이 나가자 한다.

왜.








집에 가고 싶어서 원샷한 흑장미는 이렇게 낚인 건가. 자꾸 속이 울렁거린다. 소중한 아이보리 원피스를 지켜야 한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심호흡을 해본다.

그는 택시를 같이 타고 가자고 한다. 같은 방향이라 같이 가자고 우기는 정도는 참을 수 있다. 집에 갈 수 있으니깐.

이 들러붙는 원피스는 사람의 자세를 꼿꼿하게 만들어주는 참 좋은 원피스다. 옷을 핑계 삼아 정신을 바짝 차리라며 졸린 눈꺼풀에 힘을 주며 겨우겨우 가고 있던 때, 그가 살며시 내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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