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목소리는 넘어질 때 머리가 살짝 찢어진 옆 방 어르신이 1시간 넘게 앓고있는 고통의 소리입니다.
"자꾸 그렇게 소리 지르시면 치료 못 합니다."
의사의 한마디에 앓는 소리가 묵음처리가 되고 있는 순간입니다.
드디어 어르신의 목소리가 탁 끊기고, 스템플러 소리만 탁탁 터진다.
여기는 응급실 처치실, 옆방 어르신의 앓는 소리가온몸을조여 온다.
아이들이 집으로 모두 돌아온 늦은 오후,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엄마 삼매경에서 잠시 여유가 생겨 식탁 의자에 몸을 맡겼다. 털썩.
순식간에 의자 다리가 살짝 떴다 바닥을 쿵 내리찍었다.
악. 소리가 절로 나왔고, 굉장한 고통이 따라온다.
털썩 떨어지는 엉덩이 말고도 떨어져 나간 것이 하나 있었다.
발톱.
의자 다리는 왼발 네 번째 발톱을 데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혼자서 새로운 곳에 자리 잡은 발톱이 눈에 띈다. 너 왜 거기 있는 거냐며 어안이 벙벙해 눈을 껌뻑거렸다. 순간 헛것을 본 것 같았다.
반짝반짝 핑크색 빛나는 매니큐어 높게 쌓인 발톱 조각이 덩그러니 널브러져 있다. 원래 있던 왼발 네 번째 발가락에는 의외로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은 깔끔한 흔적이 낯설다. 의자 다리, 발, 발톱의 인과 관계를 깨닫는 순간 깔끔한 흔적 위로 붉은 피가 스며올랐다. 발톱 대신 자리 잡은 핏자국을 멍하니 바라봤다. 생각지도 못한 아픔이 찾아와 버렸다.
떨어져 나간 발톱 조각을 조심스레 봉투에 담았다. 더 이상 빛나지 않는 핑크빛 매니큐어가 미워 보인다. 분명 예쁘다고 칠했던 매니큐어였는데, 더운 여름의 예쁨이 계절에 맞지 않는 어색함으로 변해버렸다.
피가 나는 발에 급한 데로 식염수로 소독을 해본다. 별거 없는 소금물은 따끔따끔한 느낌으로 나쁜 것들을 데려간다며 굳이 말을 하며 간다. 아픔을 데려갈 때는 그냥 말없이 사라져 줘 버리면 좋을 텐데.
어스름한 저녁 무렵의 응급실은 조금 한가해 보였다. 앞에 방금 들어온 CPR 환자가 있어서 좀 오래 기다릴 수도 있다고 한다. 입구에서 마주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멈추던 구급차에 타고 있던 분이겠지.
빈 침대라도 내놓으라고 하고 싶지만, 급하지 않은 내 상황에는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도 감사하다며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엉덩이만 허용하는 작은 플라스틱 의자는 기다림을 지치게 만들었다. 한참을 기다려 그냥 집으로 갈까 포기할 때쯤 소독을 해주신다. 집에서 뿌렸던 차가운 식염수, 똑같은 차가운 물로 다시금 아픈 흔적들을 씻어 내린다. 조금이라도 아플까 조심스러워 발가락에만 졸졸 흘러내리던물을 의사 선생님은 병을 촥촥 누르며 시원한 물줄기로 의도치 않게 발을 씻겨주셨다. 식염수로 샤워라도 한다면 온몸이 개운해질 수 있을까. 약간의 성스러운 의식 같은 소독이 끝나자 또 다른 기다림이 기다리고 있다.
의자 다리의 쇠붙이가 혹시 모를 감염이 있을 수 있어서 파상풍 주사를 맞았다. 파상풍 주사를 맞은 적이 있냐는 간호사의 물음에 왜 기억이 안나는 걸까. 아무리 애도 낳고 뇌도 낳았다지만 이상하리 만큼 기억나지 않는 것들은 머릿속에서 생각을 하지 말고 살라는 압박 같아 기분이 썩 좋지가 않다. 어제 그제도 맞지 않았으니 안 맞았겠거니 하고 주사를 맞는다. 오랜만에 맞는 주사 바늘의 뾰족함이 팔뚝 전체로 퍼져나간다.
꼬박 2시간을 의자에 붙어 있었다. 드디어 의사 선생님은 봉합을 한다고 누으라했다. 허리가 너무 시원해서 차가운 침대 위 눈부신 불빛을 피하려 눈을 감는 순간 이곳은 너무 편안한 곳이란 착각에 잠이 들뻔했다.
"발톱은 마취가 잘 안 돼요. 많이 아픈데 혹시 뜯을 거 드릴까요?"
편안한 걸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응급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잘못 들은 걸까.뜯을 거라니, 쥐어뜯다의 그 뜯는 것? 사극에서 출산 장면이면 등장하는 고통을 참기 위해 흰 수건 앙다문 산모가 떠오른다.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선생님.
2시간 동안 기다렸다 이제 겨우 허리 펴고 누웠는데, 왜 그러시는 건가요. 지금 벌떡 일어나면 보내주실 건가요.
진작 얘기해 주지. 기다린 게 아깝지만 그냥 갈까 생각하는 순간 마취주사를 놔주신다. 마취주사부터 아프다. 심상치 않다.
대망의 봉합 시작.
읍! 꿰맬 때는 더 아팠다. 어릴 적 낚시 바늘에 손가락이 걸렸던 그때가 떠오른다. 그건 새발의 피.
한번 푹 들어간 바늘의 가느다란 흔적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다시 뚫릴 구멍의 존재를 짐작하는 순간 예상되는 고통에 온몸이 마비됐다.
아까 의사한테 혼나던 할머니가 생각나서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어금니 앙 다물고 입술을 깨물고 깍지 낀 손만을 의지한 채 바늘의 길을 따라갔다.
발톱은 마취가 잘 안 되는 부위이다. 원래 이렇게 아프냐는 말에 아프다는 대답만이 돌아온다.
"안 아프세요? 잘 참으시네요."
하, 얘 왜 이러지. 순간 화가 나서 봉합이고 나발이고 그대로 발을 빼고 도망갈 뻔했다.다독이는 말 따위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모든 부사를 동원해서 표현해 본다. 정말 너무 무지 굉장히 엄청 매우 아팠다.
한번 더 으읍! 뜯을 거라도 있었음 좀 나았을까. 손 잡아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고통이 덜했을까. 아플 때 누군가 옆에서 지켜준다면 고통은 나눠지는 걸까. 나의 아픔을 누군가 보는 게 싫다. 대신 아파해 달라전과시키고 싶지도 않다.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아직도 자존심을 내세우는 걸 보니 덜 아픈 건가.
으으으읍. 읍. 읍. 읍. 읍. 으으으으음.
하나, 둘, 셋, 넷. 발톱 모서리 네 귀퉁이를 다 꿰맸다. 한번 보라는 의사의 말에 용기 내어 눈을 떴다. 프랑켄슈타인 얼굴 같은 퉁퉁 부은 발가락에는 실밥들이 뾰족뾰족 콕콕 가시처럼 박혀있다. 소독약이 닿는 순간의 따끔함 정도는 이제 느껴지지도 않는다. 순식간에 몸에 힘이 턱 풀려 식은땀 가득한 손가락들이 파르르르 떨고 있었다.
계속 발가락을 찌르는 느낌이 지워지지가 않아 고쳐주신 건 너무 감사하지만 빨리 병원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한 발을 내디뎠다. 하... 빨리 걸을 수가 없다. 발가락 닿지 않게 신고 나온 커다란 슬리퍼를 질질 끌며 병원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하... 약을 타러 가야 한다. 휠체어를 타겠냐는 직원의 말에 괜찮다며 웃으며 나왔다. 벽에 의지해 절둑거리며 걸어가는 30초 거리의 약국에 여간해선 도착할 생각을 안 한다. 드디어 약을 받아 들고 다시 문 밖으로 나섰다.
하... 집에는 어떻게 갈까. 택시를 타고 가긴 해야겠는데, 아무도 없다. 언덕내리막길에서 전력질주 5분이면 갈 수 있을 텐데, 코앞에 보이는 집에 어떻게 갈지 고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걸어가자니 내리막 길에서 굴러서 다시 응급실로 올 것만 같다. 하... 일단 택시를 타러 걸어 나가본다. 다행히 주차 정산소 직원분이 택시 잡는 걸 도와주신다. 깜깜해져 버린 밤공기가 서늘하다. 괜히 슬리퍼 사이로 삐져나온 발가락이 시리다.
드디어 빈 택시 한 대가 오고 있다. 내 아픔이 해결이 되니 그제야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들어온 환자는 어떻게 됐을까. 괜히 궁금하다.
핑크 반짝이가 유독 거슬리는 그날의 발
다음날, 온몸이 아프다. 온갖 긴장으로 채워진 몸이 스스로를가두고 조이다 풀어졌으니 아플 만도 하다. 발을 다쳤다는 핑계로 침대와 한 몸이 되어 가족들의 보필을 받으며 며칠 휴가를 보냈다.
드레싱을 하러 간 병원 의사에게 떨어진 발톱을 꼭 붙여야 하는 거냐고 물어봤다. 떨어진 발톱은 죽은 발톱이지만 새로나오는 발톱을 보호하기 위해서 붙이는 게 좋다고 하신다. 오늘의 아픔은 결국 내일의 미래를 위한 거였나.
발톱은 한동안 핑크 네일팁과 함께 다시 발가락에 묶여 겨우 발을 보호했다. 껍데기라도 붙여 보호해 보겠다고 힘겹게 붙어있는 발톱이 불쌍하다. 언제 떨어져 나갈지 모르는 인생을 부여잡고 있는 처량함 같다.
아픔은 삶을 생각하게 된다. 삶은 또 다른 아픔을 낳기도 한다. 뫼비우스 띠처럼 반복되는 삶의 도돌이는 영원히 풀 수 없는 문제 일지도 모른다.
문득 바라본 왼발에는 언제 자란지도 모르게 새 발톱이 붙어있다. 어느새 잘 자라난 발톱을 보니 신기하다. 생각하기도 싫은 고통의 결과가 만족스러워 흐뭇하다. 새롭게 자란 발톱은 두꺼운 네일팁을 예쁘게 매달고 있던 헌 발톱 보다 더 단단하게 자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