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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독성 Jan 18. 2023

돌아가는 것도 괜찮아.

방학 4일 차, 집밖으로 나가지 못 한 프로집콕러는 탈출을 시도했다.


사촌언니네가 놀러 왔다. 저녁을 거하게 먹은 뒤, 사심을  듬뿍 담아 데려다줄까 물어봤다. 괜찮다 뿌리치는데도 기어이 신랑한테 애 셋을 토스하고 차키를 챙겼다. 어른 여자 사람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시원한 밤거리를 달렸다.

언니네 도착하니 밤 8시, 피곤하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어차피 집에도 별일 없는 이 시간, 집으로 가기도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빠른 길을 놔두고 굳이 시내길로 살짝만 돌아가려 마음을 먹었다.


상암동에서 출발해 홍대, 신촌 젊음의 거리를 오랜만에 느껴보고 싶다.

내비게이션의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스릴 있다. 오랜만의 밤거리, 지나 만 가도 보기만 해도 어깨가 들썩인다. 자꾸 경로를 이탈했다고 짜증을 내는 내비게이션 언니의 멘트를 가볍게 무시하며 계속 직진, 인생 뭐 있니 직진이지. 경로만 살짝 이탈했을 뿐인데 사춘기 방황처럼 질주하는 사십춘기는 밤바람이 그리웠나 보다.







처음엔 밤 운전이 위험하니 시내길로 천천히 가면서 겸사겸사 눈요기나 할 참이었는데, 일이 커졌다. 상암동에서 안암동까지 오는 동안 홍대의 젊음도 느끼고, 핫한 연트럴파크도 처음으로 지나가 보고, 1년 전 둘째 생일에 가본 연희동 맛집도 지나쳤다. 외삼촌이 입원해 계셨던 홍은동 병원도 불이 켜져 있었고, 광화문 동상이랑 인사도 했다. 청와대 뒷길 삼청동 가로수의 반짝이는 전구에 연말 분위기도 즐기고, 데이트할 때만 와보던 북악 스카이웨이를 혼자 요리조리 핸들을 꺾으며 드라이브했다.


방황은 역시 길면 개고생인 법, 계속 경로를 무시하다 깜깜한 북악 스카이 웨이에서 정신을 번쩍 차렸다. 운전자는 북악 스카이 웨이 경치를 즐길 수 없다. 그저 뱅글뱅글 돌아가는 길에서 '오빠 운전 멋지지?' 느낌으로 초보운전 딱지를 뗄 뿐이다.



이제 믿을 건 내비게이션뿐.

방황하다 돌아온 사춘기 학생은 내비게이션 선생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이제라도 착한 학생 노릇을 해 볼 참인데, 경로를 이탈했다고 질타를 한다.

안 하던 짓 하지 말라는 뜻인가, 계속 딴 길로 새던 내 행동이 못 마땅하셨나요. 북악 스카이 웨이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더니 성북동 부잣집 일대 임장을 돌았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담벼락 높은 집들에 정신이 팔려 오르막 길 내리막 길 롤러코스터를 타는 줄 도 몰랐다.






드디어 빠져나온 익숙한 큰길에서 안도의 한숨 뒤로 북악 스카이 웨이 운전 합격에 실없이 웃었다.

일부러 돌고, 잘못 가서 돌고, 원래대로 가려다 돌고 계속 돌고 돌아 30분 만에 올 거리를 1시간 넘게 장거리 운전을 뛰었다.



서울 한 바퀴를 구경하고서 돌아온 집은 새삼 따뜻하다. 밤공기 한번 거하게 들이켰으니, 이제 며칠은 끄덕 없이 채워질 빈 공간이 뚫렸다. 한순간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하거나 잘못 들어섰다고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질풍노도에서 빠져나 올 수 있는 힘은 돌아올 곳이 있다는 믿음의 지지 때문이겠지. 문득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 돌고 돌아 제자리로 한번 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그 제자리가 믿어주고 기다려준 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는 순간, 인생이 참 고맙다.




Photo by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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