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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 듬뿍 아르바이트

by Hee언니

방학이나 연휴 때 고향에 내려가면 어김없이 야간 아르바이트 스케줄을 비워두시는 친절한 부모님 덕분에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종종 했었다. 아르바이트는 시키지만 집에 와서 쉬지도 못한다며 괜한 걱정을 하시는 부모님 모르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대를 하는 것이 있었다.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편의점 옆 아파트에는 옛 남자 친구가 산다. 뭐 옛 남자 친구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고등학교 때 잠깐 만난 남자인 친구이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같이 밥 먹고 오락실 다니던 풋풋한 시절이 있었더랬다. 좁은 땅 덩어리,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촌구석 시내를 싸돌아다니던 우리는 엄마 친구=그 친구랑 같은 아파트 사는 아줌마의 시야에 걸려들었다. 엄마의 레이다망에 걸린 날,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이 벌써부터 연애질이냐며 혼나지는 않았지만 은근한 압박이 시작됐다. 엄마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내내 찜찜해서 그 친구를 만나는 게 부담스러워졌다. 그렇게 풋내기들의 만남은 멀어졌다.


같은 아파트 사는 엄마의 절친 아줌마 덕분에 요즘도 그 친구 이야기는 간간히 듣는다. 공부에 관심 없던 애가 갑자기 공부를 열심히 한다나 뭐라나. 괜히 야밤에 혼자 편의점을 지키며 불 켜진 아파트를 바라보니 궁금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정말 진짜 그냥 궁금한 거. 약간의 기대감과 그냥 궁금한 감정. 잘 생기고 키 크고 착했던 그 아이가 어떻게 변했나 그 정도의 궁금함 딱 그 정도였다.


한참 조용하고 졸린 시간, 담배를 사러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새벽 1시,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큰 키에 하얗고 쌍꺼풀 없는 익숙한 얼굴. 그다.





아니, 그 남자의 누나이다.
예전에 지나가다 본 적이 있다. 누나라고 얘기해 줬기에 정확히 기억한다. 180은 돼 보이는 큰 키의 날씬한 몸매, 쌍꺼풀 없는 눈에 새하얀 얼굴은 웬만해선 잊을 수 없는 비주얼이다. 닮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담배를 사고, 잔돈을 받으려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인사라도 할까. 혹시 OO누나 맞나고 괜히 물어보고 싶어 입술이 벌름거린다. 그 입술 다물라 방정맞은 짓 하지 말라며 입술이 뜯어말린다. 그 친구가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다. 그냥 궁금하다. 이 언니를 보니 더 궁금하다. 그 아이를 본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심장이 나대는지 모를 일이다. 뭐 대단한 첫사랑이라 칠 수도 없는 풋만남 주제에 왜 그러는 건데. 무슨 기대를 하는 건데.


손은 못 잡았고, 말도 걸지 못했다. 감사합니다라는 편의점 직원 멘트만 날렸고, 그녀는 돌아섰다.

저기요라고 끝내 말하지 못했다. 안녕히 가세요란 친절한 직원용 인사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다.








괜히 그 언니를 봤더니, 내심 더 기대하게 된다. 생각도 안 하고 룰루랄라 지내더니 괜히 지나가던 여인을 보고 가슴이 설레어한다. 그 언니가 너무 닮은 탓에 생각이 난 거겠지. 그 언니도 봤으니 그 아이도 볼 수 있다는 조금의 기대겠지. 손 잡고 돌아다니던 그때도 별로 반응 없던 심장은 왜 이럴 때 빠르게 뛰는 걸까.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피곤하고 지치는 몸에 힘들 법도 한데, 이상하게 힘들지가 않다. 그 아이가 혹시나 지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눈이 부릅떠진다.

동이 트려 하고 예정된 시간은 다가온다.



결국 그는 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그 아이를 만나려는 기대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간간이 소식은 여전히 들려온다. 그 아이도 내 소식을 간간히 듣고 있겠지.



Photo by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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