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소공 Sep 03. 2024

프롤로그

하모니우스의 탄생


아침에 일어나면 집 중간에 있는 데크로 나간다. 그곳에서 건너편 산을 보면서 담배를 한 대 피운다. 연기가 하늘로 올라간다. 이 연기는 하늘에 닿을까? 잠시 엉뚱한 생각에 잠기다 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목소리!


“여보, It’s too much green!”


한국에 온 이후로 남편은 항상 나를 ‘여보’라고 불렀다. 할 줄 아는 한국 말이 별로 없지만, 이 ‘여보’라는 단어가 ‘Honey’에 해당하는 한국말이라는 것은 안다.


우리가 외국에 살 때는 ‘Honey’라고 불렀지만, 한국에 오면서 호칭을 바꿔버렸다.  


내가 하는 모닝 리츄얼은 남편이 하던 그대로다. 아침에 일어나면 데크에 나가 맛나게 담배를 피우면서 건너편 산을 쳐다보며 감탄을 터뜨렸던 남편. 내 담배연기는 남편과의 대화이자, 남편을 향한 연가(戀歌)인 셈이다. 


얼핏 불평 같아 보이는 남편의 ‘Too much green’은 찬탄의 다른 말이었다. 이렇게 초록초록한 자연을 보면서 살 수 있어서 좋다는 말.


이어지는 남편의 말은 “나, 너무 행복해. 내 꿈이 이렇게 다 이뤄질 줄 몰랐어”였다. 그리고 꼭 되물었다.


“당신도 행복해? 당신도 우리가 이렇게 살 줄 알았어?”


물론 나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 나 역시 이렇게 꿈같은 생활을 할지 몰랐다고도 했다.




남편은 독일 사람이다. 미국 반도체회사에 40년 가까이 다녔다. 우리는 인터넷 펜팔로 알게 돼, 밀레니엄이 갓 시작되던 2000년에 만나 결혼했다. 결혼생활 대부분을 타이완에서 보냈다.


어느 날 남편은 한국에 땅을 사서 집을 짓자고 했다. 그 직전까지 우리는 노후를 독일에서 보낼 계획으로 지역을 물색하고 집 가격을 알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국이라니!


남편은 “당신한테는 한국이 더 편하지 않느냐”라고 되물었다. 그리고 자기도 한국이 좋다고 말했다. 독일에 살아서 좋은 점은 와인과 치즈가 싸고 좋다는 정도인데, 한국에 살면 당신이 더 행복할 것 같다고 설명도 덧붙였다.


“와인과 치즈를 당신 행복과 맞바꿀 수는 없지”라는 말과 함께.


그렇게 우리는 2011년 경기도 양평에 땅을 샀다. 550평의 농지였다. 농지는 당시 외국인 이름으로 매입이 안 된다기에, 내 이름으로 구입했다.


2013년 초에 남편과 말이 잘 통하는 건축가를 만나, 같은 해 9월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다. 우리는 타이완에 살면서 건축가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집 짓는 과정을 공유했다. 두세 달에 한 번씩 집을 보러 왔다.


당시의 남편은 행복에 들떠 있는 모습이었다. 나도 물론 설렜다. 집을 한번 지으면 폭삭 늙는다고 했지만, 우리는 그저 즐겁기만 했다.


아마도 집을 짓는 세부 과정에 일일이 개입하지도, 간섭하지도 않고, 건축가와 시공사에게 모든 것을 맡겨 버려서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2014년 7월에 집이 완공됐다. 거의 100평에 달하는 2층 집. 한쪽 벽 전부가 통창인 데다, 1층 거실과 2층의 일부가 툭 트인 구조였다. 넓고 높고 환한 집. 남편의 꿈이 담긴 집이었다.  


집 이름도 지었다. ‘하모니우스’ 독일인 남편과 한국인 부인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집이라는 뜻을 담았다.


당초 우리 계획은 집은 완공했어도 타이완에 몇 년 더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국 집은 우리가 한국에 올 때마다 쓰는 일종의 별장 같은 곳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집 구조도, 누군가가 따로 살면서 집을 보살필 수 있도록 집 뒤편에 방과 화장실, 부엌을 따로 넣어서 지었다.


그러나 다 지어진 집을 본 남편은 하루라도 빨리 그 집에서 살고 싶어 했다.




남편은 회사와 딜을 했다. 한국으로 보내주는 대신, 집값도 학비도 받지 않겠다는 조건이었다. 큰 회사의 해외 근무자가 집값이며 아이 학비를 모두 지원받는 혜택에 비하면 엄청난 양보였던 셈이다.


남편의 직무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반도체 파운드리 비즈니스를 책임지는 것으로, 꽤나 중요한 역할이었다.


자기 회사 매출의 60~70%를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에서 올린다는 말도 들었다. 바로 위 직급이 부사장이라고 했으니, 우리나라로 치면 전무급 정도 됐던 것으로 보인다.


회사는 남편의 손을 들어줬다. 업무는 타이완을 오가며 그대로 하는 것으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2015년 한국으로 왔다. 결혼한 직후부터 시작한 12년 동안의 타이완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 정착했던 것이다.


한국에 정착한 이후로도 우리는 양평 집에 완전히 입주하지는 못했다. 아이가 서울 연희동에서 외국인 학교에 다니고 있었기에 학교 가까운 곳에 전세를 얻어 이중생활을 했다.


양평 집에는 주말마다 왔다. 남편은 집에만 오면 입꼬리가 찢어질 정도로 좋아했다. 정원을 기어 다니면서 풀을 뽑고, 잔디를 관리하는데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틈틈이 친구들을 불러 바비큐 파티도 했다. 주로 내 고향 친구들이나 대학 친구들이었지만, 간혹 남편의 회사 동료들도 불렀다.


주말마다 양평 집에 오는 것도 부족했던지, 남편은 2016년 말에 퇴직을 했다. 집에서 온전히 즐기고 싶다고 말했다. 정원을 가꾸면서 틈틈이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도 연주하고 또 음악을 만들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남편의 꿈은 음악가였다.


나는 반대하지 않았다.


남편이 그렇게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고, 또 먹고살기에 충분할 만큼 돈도 벌어 놨다는데, 반대할 아내가 어디 있을까. 오히려 남편의 퇴직을 반겼다. 남편이 평소에 하고 싶다고 한 것들, 전부 다 하면서 살기를 원했다.


한국에 정착해 정원을 가꾸고, 친구들과 파티를 하면서 지내던 그 시절. 남편과 나는 가끔 농담처럼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우리가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호사다마라고 했는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


우리는 인생이 너무 잘 풀려서 불안해할 정도로 '행복 과잉'증세를 겪고 있었다.


나는 남편이 언덕에서 풀을 벨 때마다 혹시나 다칠까 두려워했고, 사춘기였던 딸아이가 혹시 한국 생활에 적응을 못할 까봐 걱정을 하기도 했다. 나 또한 갱년기를 겪는 중이어서 이곳저곳 아픈 곳이 많았다. 그러니 내 갱년기 증상이 더 심해지지 않을까 불안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운명의 여신은 참 얄궂다.


남편이 죽는다는 시나리오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남편은 자신의 꿈동산처럼 여겼던 이 집에서 퇴직한 지 1년 만에 갑자기 죽음을 맞았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기에 아무런 준비도 유언도 없었다.


남편은 나와 결혼하기 전 전처와의 결혼 생활에서 1남1녀를 두었다. 하지만 이혼과 동시에 이들과는 인연을 끊고 살았다. 그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는 추측만 했을 뿐, 자세한 내막은 묻지 않았다. 남편도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우리 딸에게도 말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단순한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이후에 생긴 상속재산 분할 소송과 세금 문제,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나와 딸 역시, 마치 행복이란 산의 꼭대기에서 절벽아래로 떨어지듯 그렇게 굴러 떨어졌다. 그런데 굴러 떨어진 곳이 하필이면, 하이에나가 우글거리는 정글과도 같았다. 피냄새를 맡고 달려온 하이에나들!


단순한 상실감의 문제가 아니었다.


영화 라이온 킹에서 심바가 아빠 사자를 잃은 상실감을 채 느끼기도 전에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던 것처럼, 딸아이와 나는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써놓고 보니, 엄청난 비극 같지만, 비극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먹고 자고 마시고 웃었다. 웃을 기회가 적긴 했지만, 여전히 웃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 보니 진짜 웃을 일도 생겼다. 


그러니 이 글에는 웃음도 있고 눈물도 있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지 않던가. 


어쩌면 이 글은 한 외국인 가장의 집과 죽음을 소재로 한, 남은 가족의 시련 극복 및  성장 스토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