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소공 Sep 10. 2024

2. 어느 완벽한 겨울 날

산책을 하고 삼겹살을 먹었다.

**죄송합니다. 이 글이 브런치 북 <하모니우스> 2번째 글인데, 다시 보니, 브런치 북에 들어가지 않았기에 재발행합니다. 자꾸 실수가 생기네요. ㅠㅠ


"여보, 우리 산책이나 갈까?"


남편이 늦은 아침을 먹고 나서 산책을 제안했다. 나는 웬일인가 싶었다. 남편이 먼저 산책 가자고 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추운데?"


내 말에 남편은 "좀 답답해서 바람도 쐬고 싶고, 햇살도 좋아 보여서!"


그날은 남편 말처럼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겨울날이었다.


며칠 동안 내리던 눈이 그치고 따사로운 햇볕이 대지를 감싸는 날. 날씨는 여전히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날씨였지만, 밝은 햇살이 얼어있던 모든 것에 생명의 에너지를 가득 불어넣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양평 집 '하모니우스'에 와 있었다. 6일 동안의 휴가를 필리핀에서 보내고 돌아온 것이 일주일 전. 크리스마스는 이 집에서 보내자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작은 말다툼이 불러온 냉전 상태로 크리스마스조차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나는 나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데면데면하게 크리스마스를 막 지낸 참이었다. 며칠 동안 눈까지 많이 내려 집 밖으로는 나갈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남편이 산책을 제안한 그날 아침은 마침 내가 며칠에 걸쳐서 보던 드라마가 끝난 날이기도 했다. 송승헌 주연의 OCN 드라마 <블랙>. 저승사자를 내세워 삶과 죽음을 보여주는 드라마였는데, 그 드라마가 그렇게 재미있었다.


나는 크리스마스 휴일에도 그 드라마에 빠져서 살았다. 남편은 언제나처럼 내가 하는 일은 뭐든지 존중하고 지지해 주는 편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드라마가 뭐길래 그렇게 재미있게 보는지는 몇 번 물어봤다. 나는 대충 '죽음에 관한 드라마'라고만 알려준 듯하다. 그런 드라마가 끝났다고 했으니, 남편은 얼마나 속이 시원했을까.


그러니까 그날은 산책을 나가기에 아주 완벽한 날일 수밖에!






남편은 "산책 나갔다가 강변 가까운 작은 식당에서 삼겹살이나 먹자"라고 했다.


집에서 강변까지는 걸어서 족히 40분은 걸리는 거리였다. 추운 날씨에 걷기에는 좀 멀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며칠 동안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몸이라 약간 자극을 주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우리는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걷기 시작했다. 남편이 입은 거위털 파카는 내가 최근에 사 준 것이었다. 옷 욕심이 없는 남편인지라 거의 10년도 더 된 무거운 외투를 그동안 입고 있었다. 이 외투를 입어 본 남편은 가볍고 따듯하다며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역시 나오길 잘했어!"


햇살은 따뜻했지만, 살갗에 닿는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곳곳에 쌓인 채 녹지 않는 눈이 추위가 여전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앞서 걷고 중학생인 딸아이가 내 뒤를 따랐다. 남편은 천천히 걸었다. 원래부터 걸음걸이가 빠른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매사에 느린 사람인데도 이상하게 걸음걸이는 빨랐다. 남편과의 거리가 갈수록 벌어졌다. 어느 순간 10미터 이상 벌어져 남편이 너무 느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아이는 뒤돌아서서 남편 사진을 찍고 있었다. 딸아이를 불렀다.


"아빠가 왜 그렇게 느리게 걷는지 물어봐!"


딸아이가 마치 어린아이 마냥 깡충거리며 아빠 곁에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깡충거리며 내게로 왔다.


"엄마, 아빠가 늙어서 그렇대!"  

 

딸아이도 나도 피식 웃고 말았다.



남편과 나는 13살 차이다. 나는 50대 초반, 남편은 60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남편은 요즘 정신적, 신체적 기능이 많이 떨어져 보였다.


'치매라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뭘 자주 까먹기도 하고, 유난히 움직이기를 싫어했다. 평소에 추위를 잘 안 타는 사람이었지만 추위도 잘 탔다.


우리가 크리스마스 이틀 전에 다툰 이유도 보일러 온도 조절 문제였다.


나는 전날 가스비도 아낄 겸, 2층 복도 보일러를 끄면서 남편에게 양해를 구했다. 꺼도 되겠느냐는 말에 남편은 그러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보일러를 왜 껐는지 이유를 말해보라고 닦달을 했다. 가스비 때문이냐, 가스비 낼 돈은 충분하지 않으냐, 보일러를 끄면 진짜로 가스비가 절감되는 줄 아느냐 등을 계속 되물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그까짓 보일러, 꺼서 추우면 다시 켜면 되지, 뭘 자꾸 이유를 말하라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만 남편이 그 당시 약간의 치매증세를 보여왔기에, 화도 나고 착잡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나는 “알았으니, 보일러 다시 켜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남편은 물리 법칙을 들고 나왔다. 보일러를 껐다가 다시 켜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 물리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솔직히 뭔 말인지 알아듣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그런 설명을 계속 이어 나갔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그때 크리스마스 음식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주걱으로 뭔가를 휘저으며 분노와 두려움을 삭이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부엌에 와서 또다시 보일러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나는 휘젓고 있던 주걱을 집어던지면서 고함을 쳤다.


“제말 나 좀 혼자 내버려 둬!”


그리고 나는 조금 울었던 것 같다. 딸이이도 옆에서 생전 안 보던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고 울면서 자기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날이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나는 나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딸은 딸대로 각자의 방에서 따로국밥으로 놀았다. 결혼 이후에 맞는 최악의 크리스마스였다.


 



그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었던지, 나는 느리게 걷는 남편 옆에 가지 않고 계속 앞서 걸었다. 어느 순간 남편의 얼굴이 유난히 창백해 보였지만, 남편이 백인이라 그렇겠거니 했다.


남편은 독일 사람이다. 우리는 17년 전 결혼해 나름 '닭살 커플'로 살아왔다. 닭살 커플인 우리도 가끔은 삐걱거리는데 최근의 삐걱거림이 가장 심했다.


그래서인지 남편의 걸음걸이가 유난히 늦거나 말거나, 얼굴이 창백해 보이거나 말거나 당시엔 신경 쓰기가 싫었다.


우리는 40분 넘게 걸어서 ‘털보네 식당’에 도착했다. 털보 아저씨가 운영하는 정육점 겸 식당이었다. 간판도 없었기에 아는 사람만 찾아가는 야매식당. 양평이 고향인 친구가 소개해 준 곳이었는데, 고기 맛이 좋았다.


봄가을에는 우리 집 정원에서 바비큐를 해 먹지만, 한겨울 한여름에는 주로 이곳에서 삼겹살을 먹었다. 삼겹살은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다. 거의 매일 먹으라고 해도 질려하지 않을 정도로 좋아했다.


단골 식당인 만큼 털보 아저씨는 이번에도 우리를 반가이 맞았다. 삼겹살과 소주를 시켰더니, 술을 못 마시는 딸아이를 위해 매실차도 내주었다.


남편은 참 맛있게 먹었다.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셨다. 덕분에 언제 얼굴이 창백했나 싶게 얼굴도 다시 발그레해졌다. 표정도 밝아졌다.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다.


삼겹살을 먹고 나서 남편은 밖에서 담배 한 대를 맛나게 피웠다. 우리는 다시 40여 분을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집에 왔을 때는 4시가 넘어 있었다. 아주 늦은 점심이었던 셈이다. 추운 날씨에 상당히 오래 걸었고, 삼겹살에 소주까지 곁들였으니 노곤했다.


나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TV를 봤다. 아이는 자기 방으로 올라갔고, 남편도 쉬고 있을 터였다. 졸음이 밀려왔다. 얼핏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잠결에 남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여보!"라고 부르는 소리.


놀라서 두리번거리며 "어디 있느냐?"라고 물었다. 남편은 "내 방"이라고 하면서 다소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소리쳤다.


"여보, 119!"


이전 02화 3. 사망하셨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