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소공 Sep 24. 2024

7. 남편의 생일, 그리고 시어머니의 죽음

두 번의 장례식

시누이는 장례식이 끝나고도 우리 집에서 이틀을 더 머물다가 갔다. 마침 1월 2일이 남편 생일이라, 시누이가 남편 생일까지 지내고 갈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딸아이와 나는 시누이와 함께 남편과 즐겨 가던 강변의 한 전망 좋은 카페도 가고, 강변에서 산책도 했다. 겨울이라 별로 볼 것은 없었지만, 그동안 남편이 이곳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얼마나 행복했는지 최대한 보여주고 싶었다.


시누이는 과연 이성적인 독일인이다 싶게,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례식에서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눈이 살짝 젖어 있을 뿐이었다.


남편이 사후에 맞는 첫 생일날. 나는 남편이 좋아하는 굴라쉬와 포테이토 덤플링을 만들 계획이었다.


흔히 ‘헝가리인 굴라쉬’로 알려진 이 음식은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큼직큼직하게 썰어 베이컨을 구워 낸 기름에 겉을 지지고, 양파 당근, 피망, 버섯, 토마토 등의 채소를 넣어 뭉근히 끓여내는 음식이다. 핵심 양념은 쿠민가루.


마지막에 쿠민 가루를 넣어 구수한 굴라쉬 냄새가 온 집에 퍼질 무렵이면 남편은 코를 킁킁거리면서 부엌으로 들어오곤 했다. 온 얼굴에 웃음꽃이 핀 채, “우와, 냄새 좋은 데?”를 외치면서.


여기에 곁들여 먹는 게 포테이토 덤플링이다. 감자를 삶아 으깬 다음, 뜨거울 때 감자 가루와 달걀을 넣어 반죽을 만든 다음, 동글납작하게 빚어서 뜨거운 물에 끓여내는 음식이다. 모양은 앙코 없는 찐빵을 닮았다.


남편은 사실 이 덤플링을 굴라쉬보다 더 좋아했다. 어릴 때, 시어머니가 덤플링을 만들면 1인당 몇 개씩 식구 수대로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그때는 독일 경제도 어려웠던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정도가 아니었다고 했다.


군대를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시어머니가 푸짐하게 덤플링을 만들어 앉은자리에서 덤플링을 스무 개나 먹었다는 얘기를 하면서 남편은 낄낄거리며 웃은 적도 있었다.


그러니 덤플링은 남편에게 고향과 어머니의 손 맛, 그리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소울푸드에 가까웠다.


그런 음식이었지만, 만들기가 은근히 까다로웠다. 그러니 굴라쉬는 1년에 꽤 여러 차례 해 먹었지만, 덤플링은 1년에 한 차례, 남편의 생일에만 만들었다.


덤플링 만들기는 시어머니에게서 배웠다. 결혼하고 몇 년 뒤 크리스마스가 끼인 어느 해 독일을 방문했을 때, 시어머니가 크리스마스 특별식으로 덤플링을 만들었다. 함께 감자를 벗기고, 삶고, 으깨고, 모양을 만드는 과정을 지켜봤다.


한번 봤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매번 남편과 함께 만들었다. 남편은 덤플링을 만들 때마다 손에 감자가루를 잔뜩 묻히고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그런 추억을 떠올리며 덤플링을 만들기 위해 감자를 꺼내 왔다. 우리 밭에서 수확한 감자였다. 시누이의 도움을 받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감자를 깎아서 반으로 가르는 순간,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챘다. 감자 속이 전부 꺼뭇꺼뭇해져 있었다. 감자가 속병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알 수 없는 속병!


감자 10개 중 한두 개만 빼고 대부분이 그랬다.


대부분의 감자를 버리고, 겨우 몇 개의 감자로 덤플링을 만드는 대신 굵게 썰어 삶았다. 이 역시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감자만 삶으면 되기에, 나 역시 덤플링보다 삶은 감자를 선호했다.


하지만 남편의 소울푸드를 만들지 못해 아쉽긴 했다.


남편의 생일상을 막 차리고, 음식을 먹으려고 했을 때, 시누이의 전화벨이 울렸다. 독일에서 온 전화였다. 시누이 목소리에 당혹감이 묻어 있었다. 간간히 ‘무띠’라는 단어가 들렸다. ‘무띠’ 또는 ‘Mutter’는 독일어로 엄마를 뜻하는 말이다.


통화를 끝낸 시누이가 말했다. 시어머니가 위독한 상태란다. 시누이의 남편과 딸이 시어머니를 돌보고 있다고 했다. 당시 시어머니는 102세로 요양원에 머물고 있었다.


그날은 다행히 시누이가 독일로 돌아가기로 한 날이었다. 우리는 착잡한 마음으로 공항에 도착했다. 시누이도 나도 웃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억지로 서로에게 위로의 웃음을 건네면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떠나기 전 시누이는 내 손을 잡고, ‘힘내’라고 말했다. ‘너는 강하니까 잘할 수 있을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 나는 그 말을 그냥 덕담으로만 받아들였다. 나는 스스로 강하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시어머니의 건강이 염려스럽긴 했지만, 102세의 노인이 죽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다만 시누이가 도착하기 전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가졌다.





내 바람은 역시 바람에만 그쳤다.


시누이는 다음날 아침에 전화를 했다. 잘 도착했다는 전화였다. 하지만 또 다른 소식도 있었다. 시어머니는 그녀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우리 시간으론 1월 3일이었지만, 독일 시간으로는 1월 2일, 남편의 생일 당일에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1주일 사이에 오빠와 엄마, 두 피붙이의 죽음을 맞아야 했던 시누이의 심정이 어땠을까. 나는 이 생각을 하면서 가슴이 아팠다. 시어머니가 왜 하필 그날 돌아가셨을까 라는 생각은 나중에 들었다.


시누이는 시어머니의 장례식에 오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겁을 했다. 남편을 잃은 지 1주일 만에 시어머니 장례식에 간다고?


그게 가능한가 싶었다. 남편이 있었다면 당연히 가야 할 장례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없었다. 과연 내가 제정신으로 갔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못 가겠다고 말했다. 시누이도 이해한다는 듯, 알았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의 내 결정에 시누이는 서운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시어머니의 외며느리였다. 외며느리라는 위치가 한국처럼 큰 의무나 책임과는 무관했지만, 관계로 따지면 꽤나 비중이 큰 자리였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자애로운 분이었다. 40여 년 목사의 부인으로 살면서 삶에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분이기도 했다.


결혼 초 시어머니를 방문했을 때, 시어머니가 한 말이 생각난다. 시어머니는 나에게 자신의 아들과 결혼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남편에게는 나한테 잘하라는 당부도 했다고 들었다. 남편이 해 준 말이다.


시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17년 여름이었다. 우리가 한국으로 오기 하루 전날, 남편은 시어머니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 나는 이게 어쩌면 시어머니를 보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언뜻 했다.  



2017년 여름, 독일에서 시어머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남편. 이게 진짜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그런 시어머니의 장례식에 가지 못한 내 마음도 편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당시 모든 게 너무 두려웠다. 심지어 독일에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시어머니의 장례식은 남편의 고향에서 치러졌다. 남편의 고향은 베를린에 가까운 작은 도시였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 장례식은 남편의 장례식까지 겸해서 진행됐다. 시어머니의 사진과 남편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는 장례식. 시누이는 심지어 남편의 묘지까지 만들었다.


시신이 없이 이름만 있는 남편의 묘지는 2019년 여름, 딸아이와 함께 독일에 갔을 때 방문했다. 착잡하고 서글픈 마음이었다.  


시누이의 그때 마음이 어땠는지, 하나뿐인 오빠의 죽음을 얼마나 애도하고, 또 오빠를 기억하고 싶어 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장례식은 또 다른 파문을 불러왔다. 장례식이 남편의 고향에서 치러지는 바람에 남편의 전처에게 남편의 죽음이 알려졌던 것이다. 남편의 전처는 같은 고향 사람이었다. 당시 미국에 살고 있었지만, 장례식에 왔던 친척이 그 죽음을 전처에게 알렸다고 했다.


남편의 죽음을 전처의 자녀에게 알리는 것이 당연했지만, 최소한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우리가 남편의 죽음을 숨기고, 남편의 재산을 독차지하려고 했던 것처럼 모든 상황을 몰아갔는데, 이 장례식이 그 빌미를 제공했다.









이전 06화 6. 한 줌 재가 된 크서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