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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소공 Oct 01. 2024

9. 남해 집과 가족들

칙사 대접은 받았지만... 문제가 된 집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남해 친정 집은 지은 지 60년이 넘어 낡은 데다, 그 전해에 왔던 태풍으로 지붕 한쪽이 날아가면서 폐가 수준으로 변해 버렸다.


둘째 오빠가 살고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 집을 보수할 돈이 없었다. 다른 가족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지붕 사진을 보여 주면서 친정 집이 무너질 것 같다고 걱정을 하자, 남편은 “그 집 내가 지어주면 안 되냐?”라고 물었다.


그때 나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아니, 당신이 왜?”라고 되물었다. 사위가 처갓집을 새로 지어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흔한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남편은 딱히 돈이 남아 돌만큼 부자는 아니었다. 그저  월급쟁이라, 우리가 먹고살기에 넉넉할 정도로 돈을 벌어두었을 뿐이었다. 나는 당시에 그렇게 생각했다. 내 생각보다 남편의 돈이 많았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당신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집이니 내가 보존해 주고 싶어!”


남편의 말은 그랬다. 그 집이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남편이 그 집을 보고 싶어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남해 친정집에 도착했을 때 가족들 모두가 우리를 반겼다. 특히 친정집에 살고 있던 둘째 오빠와 올케언니는 이제 편안하게 살 집이 생겼기에 남편을 보는 눈이 극진했다.


사실 가족들 중 한 명이 지나치게 힘들게 살면, 다른 가족들 마음도 편치 않다. 남편은 그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큰 오빠가 세상을 떠난 뒤라, 둘째 오빠네가 당시에 장남 역할도 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니 ‘크서방’은 단순한 사위 이상이었다. ‘백년손님’이 아니라 '천년손님' 정도 됐을까. 크서방이 남해에 갈 때마다 가족들이 다 모였으니, 어느새 우리는 가족의 중심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남편은 집을 보고 뿌듯해했다. 바다 전망을 가로막고 있던 아랫채를 없애고, 안채에 방 두 칸, 그리고 외부로 연결된 별도의 원룸식 방을 하나 더 만들었다. 그 방은 부엌과 욕실까지 딸린 펜션 같은 방이었다. 바다도 한눈에 들어왔다.

별도의 방에서 보이는 바다풍경


그 방에 우리가 묵었다. 평소에는 넷째 오빠가 쓰는 방이었지만, 그때는 배를 타고 있어 집에 없었다.


저녁에 환영파티가 열렸다. 둘째 오빠, 셋째 오빠와 올케들이 모두 모였다. 셋째 오빠의 물고기 양식장에서 건져온 돔이며 우럭이 회로 만들어져 상에 올랐다.


오빠들은 ‘크서방이 오늘 주인공이니, 술 한잔하라’며 연신 술을 권했다. 오빠들과 남편은 말은 서로 통하지 않았지만, 술로 통하는 사이였다.




남편과 내가 사귀기 시작하고 몇 개월이 됐을 때, 사촌 오빠의 죽음이 있었다.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온 오빠들이 ‘크서방’을 처음 본 것도 그때였다.


그때 남편은 오빠들에게 두 손으로 술병을 잡고 술을 따르는 한국식 주도를 실천했다. 술을 받을 때 또한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공손하게 술을 받았다.


오빠들은 노처녀 여동생이 외국인을 만난다는 말에 마뜩지 않아했지만, 남편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풀어지고 있었다. 오빠들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술친구가 될만한 사람이면 무조건 반기는 성향을 갖고 있었다.


한국식 주도는 내가 남편에게 가르친 것이었다. 언젠가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옛 한국 드라마를 보는데, 술을 그렇게 따르는 장면이 나왔다.


남편은 왜 저렇게 하느냐고 물었고, 나는 한국에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술을 따르거나 받을 때, 그렇게 한다는 말을 해줬다. 남편은 나와 술을 마실 때에도 재미있는 놀이 마냥 곧잘 그런 자세를 취하곤 했다.


짓궂은 오빠들은 결혼 후 우리가 남해에 갈 때마다 크서방에게 이상한 한국말을 가르치고 좋아한 적도 있었다.


우리가 한국으로 이주한 직후 남편이 우리 친정 가족을 고깃집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남해에선 대부분 생선과 회를 먹었기에 고기를 먹을 기회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남편은 “아니 어떻게 아침도 생선, 점심도 생선, 저녁도 생선을 먹냐”면서 고개를 저으며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먹었다. 끼니때마다 생선이 빠진 적이 거의 없었고, 그걸 우리는 당연시했다.


그러던 차에 남해에서 꽤나 유명한 소고기 집이 생겼다기에 그 집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우리는 ‘등심’을 먹었다.   


갑자기 남편이 ‘Enjoy the meal’에 해당하는 한국말이 뭔지 물었다. 나는 “많이 드세요”라고 말했다. 남편이 오빠들에게 “많이 드세요”라고 말하자, 오빠들은 남편에게 “니나 많이 묵어라”로 되돌려줬다.


남편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했지만, 오빠들이 내게 눈짓을 하며 말했기에 나는 “그냥 같은 뜻”이라고 말해줬다. 오빠들 농담에 장단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재미를 붙인 오빠들은 ‘등심’을 ‘등신’으로 바꿔서 “등신, 니나 많이 묵어라”로 가르치기도 했다. 남편이 “등신, 니나 많이 묵어라!”로 말할 때마다 우리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악의가 없었기에 그냥 재미있는 놀이 정도로 생각했다.


나중에 남편은 회사에서 직원들과 등심을 먹을 때, “등신, 니나 많이 묵어라!”라고 말했다가 다들 폭소를 터뜨렸다고 했다.


남편은 그제야 진실을 알게 됐지만, 오빠들의 짓궂은 농담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그 말을 더 즐겨 썼던 것 같다. 주로 오빠들한테.


우리 친정 식구들은 딱히 자상하거나 살가운 편은 아니었다. 무뚝뚝하고 세련되지도 못했지만, 바닷가 사람들 특유의 소탈함과 자유분방함이 있었다.


남편도 딱히 격식을 따지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오빠들의 그런 면을 친근감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오빠들이 권하는 술이기에 남편은 몇 잔을 받기는 했지만, 평소와는 달리 그렇게 즐기는 모습은 아니었다.



남편은 추석 이틀째 무렵, 내가 고향친구들 몇 명을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했다. 우리는 바닷가 선착장에서 전어회를 안주로 소주를 몇 잔 마시고, 친정 집으로 올라갔다.


친정집은 꽤 높은 언덕에 있어서 15분 정도 걸어야 했다. 그런데 남편이 꽤나 헉헉거리면서 간신히 올라왔다. 이번에도 내가 몇 발자국씩 앞서 걷다가 막판에는 친정집으로 먼저 뛰어가 버렸다. 화장실이 급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뒤늦게 도착해 “아니, 당신은 내가 어떻게 돼도 상관없는 거냐”면서 많이 서운해했다.


나는 무슨 그런 뜬금없는 소리를 하나 싶었다. 언덕길이라 좀 힘들긴 하지만, 뭘 그 정도로 저런 말을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엄살 같아 보였다. 나는 살짝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당신이 쓰러지면 당연히 119를 부르지. 걱정하지 마”라고 말하며 농담처럼 웃고 넘겼다.


지나 놓고 보니, 이때도 남편은 심장에 무리를 느꼈던 것 같다. 나는 그걸 엄살처럼 여겼고 농담으로 대처했다. 어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남편은 결혼 이후 한 번도 아파본 적이 없었다. 가벼운 감기 증세는 있었지만, 하루 정도 푹 쉬고 나면 거뜬했다. 건강검진을 할 필요가 없다는 남편의 말도 곧이곧대로 믿었다.


시어머니가 102세까지 사셨고, 시아버지는 2차 대전에 참전해 총알을 맞은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85세까지 사셨다고 했으니, 장수 유전자를 타고났다는 믿음을 은연중에 갖고 있었다.


결혼할 무렵 친정 엄마는 남편과의 나이차이가 13살이나 나는 것을 주요 결격 사유로 꼽았다. 딸이 과부라도 될까 봐 하는 걱정에서였다.


그때 나는 엄마한테 “걱정하지 마, 엄마. 그 집안은 장수 집안이야. 아마 나보다 오래 살걸!”이라는 말로 안심시켰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에야 장수 핏줄, 장수 집안은 믿을 게 못된다는 걸 알았다.


2006년에 세상을 뜬 우리 엄마는 하늘에서 혼자가 된 막내딸을 내려다보며,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나는 남편 사망 후 몇 년이 지나 엄마의 무덤 앞에 가서 엄마가 한 말을 떠올리며 펑펑 울었다.


그래도 엄마한테 내 선택이 잘 못됐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엄마는 왠지 화를 내기보다는 그 코쟁이 사위, 크서방 덕분에 우리 딸이 그만큼 행복했으니 됐다고 했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사위가 엄마의 집까지 말끔히 고쳐줬으니 말이다.






친정 집에서는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남편과 나를 연결해 준 바다, 꿈이 없었던 나에게 꿈을 꾸도록 가르쳐 준 바다였다. 남편은 그 바다와 내 고향집, 그리고 내 가족을 나를 아끼듯 사랑했던 것 같다.


독일 시누이가 남편 장례식에 와서 한 말이 생각난다. 장례식 때 나는 남편이 타국, 특히 아내의 모국에서 사망한 데 대해 시누이에게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그때 시누이는 “크***에게는 소공이 네가 있는 곳이 고향이나 마찬가지야”라는 말로 위로를 해 주었다. 무엇보다 “네 가족도 크***에게는 가족이었지”라는 시누이의 말에 큰 위안을 받았다.


어쩌면 시누이 말대로 남편은 남해의 가족들을 언젠가부터 이미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남편에게 남해 친정집은 단순히 아내의 고향집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 집은 이후 상속재산분할 소송에서 항상 문젯거리가 됐다.


우리는 이 집을 ‘가족에 대한 증여’라고 했지만, 남편의 전처 자녀들은 “그럴 리가 없다”라고 했다. 어떻게 몇 번 보지도 않은 아내의 가족에게 그런 고액(2억여 원)의 증여가 가능하냐고 되물었다.


하기야 나 역시 남편이 처음 집을 지어주겠다는 말을 했을 때, "당신이 왜?"라고 물었으니, 그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의 연결 고리가 '나'라는 점에서 나는 결국 그것까지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지만, 남편은 오래전에 그들이 알고 이해하는 남편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걸 그들에게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나는 몰랐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작가의 말>


성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은 10월 4일 금요일 8시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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