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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소공 Oct 08. 2024

11. 결혼을 두려워했던 여자와 동거를 원했던 남자

결혼을 결정하기까지의 과정


나는 오랫동안 내 인생에서 남자와 결혼을 배제한 채 살았다. 남들은 자연스럽게, 어쩌면 쉽게 하는 연애도, 결혼도 나는 어려웠다. 왠지 나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 때 받은 어떤 상처로 인해 그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직장에 들어가면서부터 나는 철저히 일하는 사람으로만 살았다. 누가 나를 여자로 보는 것도 싫어했다. 짧은 쇼트커트 머리에 큰 오빠가 당시 기준 20년 전 장가갈 때 입었던 바바리코트를 입고 다녔으니 여성스러움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느 날은 여자 화장실에서 막 밖으로 나오는 나를 보고, 사무직 여직원들이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혹시 자신이 남자화장실을 잘못 들어왔나 보려고, 화장실 표지판을 다시 확인할 정도였다.


행동도 그렇게 했다. 남자 동료들과 술자리를 즐겼고, 술자리에선 호탕하게 껄껄껄 잘 웃었다. 술이 센 편이라 남자 동료들에게 좀처럼 지지 않았고, 덕분에 ‘여장부 같다’는 말도 종종 들었다. 나는 당시에 가면을 쓰고 살았지만, 그 가면이 상당히 잘 어울리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속은 늘 허전했다. 알 수 없는 공허감에 시달릴 때가 많았다. 사는 게 버거워 가끔은 흔적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사라질 때 가족이 있으면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그러니 결혼으로 가족을 만들지 않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살았다.  


그래서 직장 초기부터 혼자 살기 위한 준비를 착실히 했다. 적금도 붓고, 혼자 살기에 적당한 작은 아파트도 마련해 두었다. 혼자서 식당에 가고, 혼자서 영화도 보고, 혼자서 여행을 하는 데 전혀 문제를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끝없는 어둠이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삼십 대 중반이 되면서 혼자라는 게 점점 버거워졌다. 퇴근한 어느 날, 집에 불도 켜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는데, 들리는 소리라곤 벽시계소리뿐이었다. 이 집에 살아있는 생명체가 나 하나뿐이라는 게 너무나 큰 외로움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생명체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쳤다. 


그러면서 점점 나는 뭐 하고 사나 싶었다. 남들 다 하는 그 사랑, 그 좋다는 걸 나도 한번 해 보고 싶었다. 죽음의 유혹에 시달릴 때마다 그 빌어먹을 사랑 한 번 못해보고 죽는다는 게 참 억울했다.


그러면서도 결혼은 망설여졌다. 그 구속감이 싫었다. 어쩌면 내 주변에 결혼한 사람들의 결혼 생활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던 탓도 있지 않았나 싶다. 매번 아내에 대해, 또는 남편에 대해 투덜거리는 주변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런 결혼을 왜 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20대 후반에 읽었던 공지영 씨의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도 그런 내 생각에 힘을 실어줬던 것 같다. 결혼이 마치 인생의 무덤처럼 여겨졌으니,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낫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일본 출장기회가 생겼다. 일본에서 성공한 재일교포 변호사를 인터뷰하는 일이었다. 재일 조선인 가운데 처음으로 일본 사법 시험을 거쳐 변호사가 된 인물이었다. 부인은 이화여대를 나온 한국인이었다.  


인터뷰의 주제가 정확히 뭐였는지 모르겠다. 그의 성공 스토리였는지, 아니면 부부 얘기였는지. 어쨌거나 인터뷰의 말미에 나는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지금까지 해 온 것 중 가장 잘한 게 뭐였냐”는 질문이었다. 그는 재일 조선인 신분으로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법정투쟁까지 벌였던 인물이라, 아마도 그것과 관련된 대답을 나는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내 예상과 달랐다. “아내를 만나, 아내와 결혼한 것이 가장 잘한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는 기분이었다. 나름 성공한 남자가 그런 대답을 할 줄 몰랐다. 얼마나 아내가 좋으면 저런 대답을 할까 싶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저런 아내가 될 수 있다면, 결혼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편이 나에게 ‘당신을 만나 결혼한 것이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결혼이라면?


나는 그때부터 그런 사랑, 그런 결혼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건 어느새 내 염원이 되고 있었다.


결혼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나서, 한 남자를 만나 사랑이라는 것을 하고 결혼도 꿈꾸었지만, 그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 무렵 회사를 그만뒀다. 감정 소모가 많았기에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환경을 완전히 바꾸고 싶었다.





그러다가 남편을 만났고, 그 남자에게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사랑은 갑자기 찾아오는 감기 같은 거라고 했지만, 나에게 남편은 서서히 스며드는 가랑비 같았다. 그러다가 감기에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은 나와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상황을 털어놨다. 부인과 이혼을 전제로 별거 중이라고 했다. 당시 고 3 나이였던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이혼하기로 합의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어떤 의구심도 갖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결혼을 전제로 만남을 가질 때도 아니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그러니 두 사람 모두 결혼 얘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나는 굳이 결혼을 고집할 마음도 없었다. 당시엔 그저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동거를 제안했다. 그냥 같이 살면 안 되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흔들렸다. 거절하면 떠날 것 같았다. 며칠을 고민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집안에서의 내 위치를 생각했다. 나는 4남 2녀 중 막내였지만, 집안의 유일한 대졸자였다. 고졸, 중졸이었던 오빠들이 십시일반으로 내 대학공부를 도왔다. 그런 내가 결혼도 하지 않고 외국인과 동거한다면, 집안의 수치가 되지 않을까?


웃기는 얘기 같지만, 나는 당시에 그렇게 생각했다. 내 인생이지만,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내가 비록 성공한 직장인으로 우뚝 서진 못했더라도, 내 가벼운 선택으로 가족에게 불명예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꽤나 고루한 편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는 가슴 아팠지만, 우리 인연이 그것밖에 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3개월 이상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연애에 관한 한 포기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럼 그렇지. 내 복에 무슨!”이라는 자조적인 생각도 간혹 했다.




3개월 후쯤에 그가 다시 연락을 했다. 그동안 미국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합의 이혼을 원했지만, 합의가 어려워 이혼 소송이 진행 중이라고 했다.


나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이미 이혼에 합의했다고 했는데, 그게 거짓말이었다는 의심도 들었다. 나는 누군가의 가정을 깨면서까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는 그 이혼이 혹시 나 때문이면, 그러지 말라고 했다. 남편은 나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이미 마음이 떠난 사이인데, 아내가 재산을 더 갖기 위해 계속 트집을 잡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그때 내 마음은 진심이긴 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 이혼에 책임지기 싫다는 무의식적인 반응일 수도 있었다.


남편은 한 달 후, 이혼이 성립됐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남편은 자신이 그때까지 번 모든 것을 전처에게 다 줬다고 했다. 수영장이 딸린 큰 집과 다운타운에 있는 아파트 한 채, 그리고 두 대의 차와 일부 저축까지. 남편은 자신의 집 자랑을 여러 번 했다. 집에 대한 남편의 애착은 어쩌면 이 집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그렇게 빈 털털이가 됐지만, 얼굴은 밝았다. 후련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우리의 결혼을 서둘렀다.


나는 그때 사랑에 취했는지, 행복에 취했는지 그 결혼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다. 남편과 전처의 이혼은 ‘그들의 문제’라고 여겼지 내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만약 남편도 그들도 한국인이고, 같은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결혼이라는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깨달았다.


남편은 바로 내 눈앞에 존재했고, 그들은 너무 멀리 있었다. 그들이 멀리 있었기에 존재감을 느끼지 못했고, 멀리 있어서 어쩌면 좋아했지만, 그 먼 거리가 나중에 엄청나게 큰 문제를 만들 줄을 그때는 몰랐다.


어쨌거나 결혼을 결정한 우리는 아주 특이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이혼 #동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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