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 둥 둥 북소리가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가운데, 창을 받들어 든 관군들과 다소곳이 손을 앞으로 모은 시녀들이 양 갈래로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로 가마를 탄 왕과 왕비가 입장했다. 왕과 왕비의 결혼식. 일반적인 전통 혼례와는 또 다른 느낌의 ‘궁중혼례’였다.
그날 왕과 왕비의 복장으로 궁중혼례를 올린 주인공은 바로 남편과 나였다.
궁중혼례는 당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이 허례허식 타파 및 전통문화 복원을 내걸고 하던 행사였다. 나는 당시 30대 중반의 노처녀, 남편은 재혼을 하는 외국인이었기에 뭔가 특이하면서도 뜻깊은 결혼식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가, 지루한 주례사를 듣다가 30분 만에 끝나는 예식장 결혼식은 우리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당시 손을 잡고 들어가 줄 아버지도 없었고, 내가 존경하면서 우리 두 사람을 잘 알고 또 우리를 축복해 줄 만한 주례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 아예 그 모든 형식을 깬 예식을 하고 싶었다.
결혼식 날짜는 장난처럼 잡았다. 외우기 쉽게 겹치는 날짜로 하자고 했다. 처음엔 10월 10일을 생각했지만, 그날이 평일이었다. 나는 당시에 한 경제 주간지에서 차장급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홍보대행사는 진작에 그만뒀다. 화요일이면 한창 취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였다. 마침 11월 11일이 토요일이라 그날을 잡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길일(吉日)'이었는지 그날 결혼한 커플이 많았다.
결혼 장소로는, 소규모로 할 만한 호텔 결혼식도 알아보긴 했다. 그런데 꽃 값만 1천만 원이 나온다기에 물어만 보고 말았다. 남편도 나도 결혼식 비용 일체를 우리가 번 돈으로 충당해야 했기에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에게 꽃값 얘기를 잠시 비춘 것 같기도 한데, 남편의 표정은 ‘어이없음’ 그 자체였다. 그리곤 아무 말도 없었다. 나도 더 이상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경실련의 이 궁중혼례였다. 물론 가격문제도 고려했다.
결혼식에는 남편의 회사 동료 20여 명과 내 직장 동료 30여 명, 그리고 가족과 친한 친구들이 참석했다. 참석 인원이 120여 명에 불과한 단출하고 소박한 결혼식이었다. 이전 직장이었던 일간지 동료들, 소식이 뜸한 친구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우리는 종이 청첩장은 아예 만들지도 않았다. 당시로서는 생소했지만, 우리는 ‘e-카드’라는 걸 만들어 청첩장 대신 돌렸다. 요즘에 만드는 그런 화려한 전자 청첩장과는 달리, 달랑 두 사람 사진 하나에 장소와 시간을 적어 넣었다. 따로 야외촬영을 하지 않았기에 덧붙일 사진도 별로 없었다.
간단히 두 사람을 소개하고, 초대한다는 문구가 거의 전부이다시피 한 e-카드를 각자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요즘처럼 SNS라는 것도 없었다.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는 가족이나 지인들에겐 전화로 통고만 했다.
그렇게 허술하게 진행된 결혼식이었지만 남편의 외국인 동료들뿐만 아니라, 한국인인 내 직장 동료들도 이런 특이한 결혼식은 처음 봤다면서 다들 재미있어했다.
결혼식 진행 비용도 화장과 옷 등을 포함해 10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장소는 무료였다. 20여 명의 시녀와 관군은 경실련에서 파견한 자원봉사자들이라 따로 비용이 없었다. 별도의 출장 뷔페와 피로연 등 기타 비용을 모두 합하더라도 결혼식 전체 비용으로 400만 원 남짓이 들었으니 상당히 경제적이었다.
결혼식 당일은 상당히 추웠다. 강 주변이라 바람도 꽤 불었기에, 하객들은 벌벌 떨었다. 하지만 우리는 추운 줄 몰랐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전통 혼례라 옷을 겹겹이 껴 입은 탓도 있었겠지만, 마음이 그만큼 따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결혼식이 끝난 후 남편과 내 직장 동료들 20여 명은 상수동에 있는 작은 카페로 옮겨 갔다. 피로연 장소로 내가 예약해 둔 곳이었다. 와인과 안주를 먹으며 노래도 불렀다. 남편은 <You are my sunshine!>을, 나는 <You mean everything to me!>를 불렀다.
그날 우리 두 사람이 피로연에서 부른 노래는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가 내 전부이듯, 나 역시 그의 전부가 됐고, 내가 그의 햇살이듯, 남편 역시 내 햇살이 되었으니.
누군가가 내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한 때를 꼽으라고 했을 때, 나는 주저 없이 ‘결혼식 날’이라고 말해 왔다. 인생에서 결혼이란 선택지를 멀리했던 내가 결혼을 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선물이자 축복처럼 여겨졌다.
굳이 또 하나의 행복한 날을 꼽자면, 운전면허증 시험에 통과한 날이었다. 나는 운전 면허증을 첫 시험을 본 지 3년 만에야 겨우 손에 넣었다. 운전면허 실기 시험날 어이없는 실수로 출발조차 못해보고 세 번이나 떨어지고, 바빠서 시험날 갈 수 없어 다음 해로 연기되고… 그러다가 간신히 합격했으니, 그날은 온 세상을 손에 넣은 듯 기쁨에 넘쳤다는 기억이 선명하다.
결혼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어려웠고, 그만큼 쉽지 않은 선택이었기에 그만큼 기쁨이 넘쳤다. 결혼도 운전면허증도 어렵게 얻었으니 더욱더 가치 있게 다가왔다고나 할까.
그러니 나는 결혼식 내내 입이 찢어져라 웃었고, 남편도 비슷했다. 누군가 그렇게 웃는 나를 보고 ‘결혼식날 신부가 웃으면 딸을 낳는다’는 말을 했는데, 진짜로 딸을 낳았으니, 그 속설은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그렇게 웃고 있던 나와는 달리 우리 엄마의 얼굴은 온통 슬픔에 가득 찬 우울한 표정이었다. 나는 결혼식 중에는 엄마의 얼굴을 볼 겨를이 없었지만, 결혼식이 끝나고 사진을 보고서야 엄마가 웃고 있는 사진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았다. 나는 나중에 엄마한테 물어봤다. 엄마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웠는지를. 엄마는 “그 서양 놈이 너 혼자 내버려 두고 갑자기 떠날까 봐 걱정돼서 그랬다”라고 했다. 물론 엄마가 걱정한 것은 다른 의미이긴 했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 엄마 말대로 되긴 했다.
자식에 관한 한 한국 엄마들은 약간의 신기가 있고, 특히 70세가 넘으면 마고할미 수준의 염력을 갖고 있어 직녀성과 거래한다는 속설을 읽었는데, 당시 70세가 넘었던 우리 엄마도 그러지 않았나 싶다.
나는 3차로 진행된 가족들 과의 뒤풀이에서 또 하나의 노래를 불렀다. <사랑해 당신을>이라는 노래. 집에는 노래방 시설이 없었기에 유일하게 가사를 아는 노래라 불렀는데, 그 노래에 그렇게 슬픈 뜻이 있다는 것은 남편이 사망하고 나서야 알았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그때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이 노랫말을 곱씹으며, 이것도 내 운명의 전조였나 라는 생각을 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신혼여행은 보라카이로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스쿠버 다이빙 Advanced 자격증을 땄다. 이미 몇 달 전부터 스쿠버 다이빙을 배워오던 참이었다.
스쿠버 다이빙을 하고 난 이후의 모습
자격증 코스 마지막 날, 스쿠버다이빙 장비를 갖추고 물속에 들어갔을 때 모든 것이 고요했다. 엄마의 양수와도 같은 따뜻한 물속에서 우리는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붉게 수를 놓은 듯한 산호 밭을 거쳐 알록달록한 물고기를 따라가면서 구경하다가 다이빙 강사를 놓쳤다.
어느 순간 사방이 어두운 깊은 물속에 우리 둘만 남겨졌음을 알았을 때,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공포감이었다. 물고기도 보이지 않고, 기계를 통해 들어오고 나가는 숨소리만 들리는 그 적막한 곳에서, 남편과 나는 잡고 있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서로뿐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생명의 근원인 바다, 남편과 나를 이어준 바다는 이 순간, 남편과 나를 하나로 묶어준 사랑의 마법을 부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영혼의 쌍둥이를 잉태하듯이.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기억은 뇌리 속에 각인되어 있다. 아마도 그때 이후로 나는, 비록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도 남편만 있으면 살만 하리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생각을 품게 된 것 같기도 하다.
비록 그렇기는 했지만, 그 생각이 자라서 꽃을 피우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남편과 나의 결혼 생활 역시 여느 커플들처럼 초기에는 티격태격의 연속이었고, 빛과 어둠이 수시로 교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