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의 결혼 후 내 직장 동료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남편이 아침을 준비해 호텔의 룸서비스처럼 침실로 가져온다는 소문이었다. 그냥 소문이긴 했지만,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남편은 아침마다 모닝커피를 준비해서 아직 잠에서 덜 깬 내 코앞에 커피를 대령하곤 했다. 그러니 침실에서 커피를 마실 수밖에. 언젠가 내가 동료에게 한 이 얘기가 와전된 것으로 보였다. 커피를 좋아하던 남편인지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커피부터 내렸다. 당시엔 나도 직장에 다녔지만, 내가 직장을 그만둔 이후 전업주부가 되고 나서도 남편의 모닝커피 서비스는 계속됐다. 언젠가부터 이게 ‘모닝 리추얼’처럼 되어 버렸다.
남편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자상했지만, 고집과 주관도 보통이 아니었다.
남편의 이상한 고집은 신혼여행 때부터 시작했다. 남편은 필리핀 보라카이로 신혼여행 예약을 하면서 돌아오는 비행기 편을 따로 끊었다. 내가 다니던 직장(경제 주간지)은 신혼여행 휴가가 일주일에 불과했지만, 남편은 2주가 가능하다고 했다. 남편은 5일 동안 나와 신혼여행을 보내고, 나머지 일주일은 자신이 예전에 근무했던 필리핀의 다른 지역에 가서 친구들과 놀다가 오겠다고 했다. 신혼여행이 끝나면 나만 혼자 한국으로 오는 일정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처음엔 이 문제로 좀 싸웠다. 나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라고 했고, 남편은 “어떻게 그럴 수 없냐”라고 했다. “당신도 직장에 다니고, 나도 직장에 다니니 어차피 하루 종일 붙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라고 되물었다.
좀 이상한 논리 같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때 남편은 또 하나의 논리를 내세웠다. 새를 꽉 움켜쥐거나 새장에 가두면 죽어 버리니 부드럽게 손으로 감싸거나 손 위에 올려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인이 좋으면 새는 되돌아온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쭈구리! 그럼 당신이 새고 내가 새 주인이라고? 새가 날아가 버리면 어쩌라고?’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남편이 이전의 결혼 생활에서 오는 어떤 트라우마 때문에 구속감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결혼생활이 주는 구속감을 오랫동안 싫어했기에 어느 정도 이해되는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어렵게 성사된 결혼인데, 결혼식도 하기 전에 신혼여행 문제로 결혼을 깰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이상한 신혼여행 일정을 감수하고, 나는 5일째 되던 날 혼자서 한국으로 날아왔다. 신혼여행지에서 깨진 부부들도 많다는 얘기를 들어서인지 혼자 돌아오는 심정이 상당히 착잡했다.
돌이켜보면 이때 남편은 결혼생활 자체를 상당히 불안해했던 것 같다. 내가 자신을 구속하고 조종할까 봐 미리 예방주사를 세게 한 대 놓은 셈이었다.
언어의 차이,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다툼의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남편의 무슨 말에 ‘ridiculous!’라고 표현했더니, 남편이 버럭 화를 냈다. 나는 그저 ‘이상하다. 웃긴다’ 정도의 느낌으로 표현한 말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싶었다.
그럴 때마다 내 핑곗거리는 “내가 영어를 잘 몰라서!”였다. 실제로 나는 영어권에서 살아 본 적이 없이 학교 및 학원에서만 영어를 배웠기에 어떤 단어들의 실제 쓰임새를 잘 몰랐다. 그러니 남편에게 늘 양해를 구했다. “내가 어떤 단어를 썼을 때, 잘 이해가 안 되거나 무례하다고 느껴지면 무슨 뜻인지 물어봐 달라"고 했다. 나 역시 남편의 말이 잘 이해가 안 될 경우에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곤 했다.
그렇게 물어보는 과정에서 오해가 풀리기도 하고, 나중에 설명하는 과정에서 내 첫 의도와는 달리 미화해서 전달하는 경우도 많았다. 내가 처음 한 말은 무심코 또는 ‘욱’하는 감정에서 나왔지만, 시간이 지나서 뭐가 잘못됐는지 알게 되고 그걸 살짝 고쳐서 표현하는 식이었다. 말의 정제 및 순화과정을 거치는 셈이었다.
내가 국제결혼을 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느냐”라고 물어보곤 했다. 내 경우엔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었고, 문제가 많음을 인지했기에 그 문제를 피해 가는 방법을 찾았다고 보면 되겠다.
이전의 나를 생각해 보면, 나는 말에 대해서 상당히 깐깐한 편이었다. “왜 이런 말도 이해 못 해?” 라거나, “왜 그렇게 밖에 표현 못해?”라는 식으로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곤 했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문제를 야기시켰던 셈이었다.
남편과는 언어 자체가 달랐고, 그 언어를 내가 제대로 모른다는 점에서 애초에 그런 다툼이 생길 여지가 없었다. 나는 ‘말’ (language)이 잘 안 통하는 사람을 만나, 오히려 ‘말’(communications)이 더 잘 통했던 케이스에 속했다.
남편이 서양인이고 내가 동양인이라는 데서 오는 문화차이도 컸다.
남편은 길거리에서도,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도 수시로 뽀뽀를 해댔다. 나는 처음에 창피해서 일부러 떨어져서 걸을 정도로 그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다. 남편은 뭐가 문제냐고 했고, 나는 한국에서는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고 되받았다. 남편은 그럼 어느 정도까지 허용되냐고 물었다. 나는 손을 잡고 다니는 것까지는 괜찮다고 했던 것 같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매일 손을 잡고 다녔다.
남편은 “I love you!”란 표현도 입에 달고 살았다. 나는 어색해서 “Me too”라고 표현했다가 남편의 도끼눈을 보고서야 “I love you, too”라고 바꿔서 말하기도 했다. 나는 도대체 왜 매일, 매 순간 “사랑해!”라고 표현해야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구닥다리였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Thank you!”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남편에게 뭔가를 해 달라고 하거나 물건을 건네 달라고 했을 때, 나는 그 행위를 당연하다고 여기는 편이었다. 내가 어물쩍 넘어가면 남편은 “You are welcome!”이라고 선수를 쳤다. 그러면 내가 뒤늦게 어색하게 웃으며 “Thank you!”라고 표현하는 식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남편 덕분에 “I love you”와 “Thank you”를 입에 달고 살아야 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자꾸 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길들여 갔다. 나는 불문학도였지만, 딱히 문학에 심취했던 게 아니어서 프랑스 작가들의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다. 다만 생텍쥐페리의 책 <어린 왕자>는 몇 번을 읽었다. 특히 이 책에 나오는 ‘길들이다’라는 표현을 좋아했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해 준 이 말을 나는 사랑과 결혼의 기본자세로 기억하고 있었다.
남편은 나를 길들였고, 나도 남편을 길들였다. 내가 남편을 길들인 방식 중에는 좀 저급한 면도 있었다.
예를 들면 어느 날, 나는 남편에게 방귀 얘기를 해주었다. 라디오에서 들은 사연이 중심이었다.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자란 어떤 여성이 어릴 때 자신이 방귀만 뀌면 아버지, 할아버지로부터 야단을 맞았다고 했다. 하지만, 남동생이나 오빠의 방귀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이게 몹시도 억울했던 이 여성은 결혼하고 첫날밤에 남편 앞에서 방귀를 뀌고 남편의 반응을 살폈다. 남편은 아무 반응이 없다가 잠시 후에 방귀로 화답했다는 사연이었다.
그 사연을 들은 나는 웃기기도 하고, 한편으론 참 자유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편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남편은 처음에는 “독일에는 방귀라는 말 자체가 없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남편은 결국 내 수작에 넘어왔다. 우리 가족은, 나중에 딸아이까지 가세해 언제 어디서나 부끄러움 없이 방귀를 뿡뿡 뀌는 ‘방구쟁이’들이 됐다. 남편은 나중에 “당신 때문에 방구쟁이가 됐다”면서 나를 살짝 원망하기도 했지만, 나는 턱없이 고고했던 남편의 인간화(?)에 기여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내 또 다른 기여는 남편을 웃게 만든 점이었다. 내가 남편을 만나 처음으로 사진을 찍을 때, 남편은 웃을 줄을 몰랐다. 얼굴이 마치 독일 병정처럼 심각하고 딱딱했다. 좀 웃으라고 하면, 그 어색한 웃음이라니! 정말 보고 있기가 측은할 정도였다.
그런 남편에게 나는 입꼬리를 어떻게 올려서 웃는지를 설명하고, 활짝 웃는 모습을 수시로 보여주면서 웃음을 유발했다. 남편은 나중에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잘 웃는 사람이 됐다.
나도, 남편도 결혼 이후에 겉으로 드러난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인상이 바뀌었다는 말이었다. 우리는 둘 다 잘 웃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고, 서로 닮았다는 얘기도 곧잘 들었다. 어쩌면 신혼여행 때 맞았던 초강력 예방주사와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길들이는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닮은 모습으로 변해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남편의 트라우마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2개의 우주가 만나 하나가 되어 가는 그 힘든 과정에서 우리는 좀 더 큰 결단을 내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