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이가 6개월이 됐을 무렵 타이완으로 이주했다.
그 이주는 갑작스럽게 결정됐다. 결혼 직후에는 연희동 빌라에서 살았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남편은 ‘집’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미국식 ‘싱글 하우스’를 뜻하는 말이었다. 정원이 딸린 2층 집을 평창동에서 찾았다. 물론 임대료는 회사가 부담했다.
임신 6개월 무렵에 그 집으로 이사했다. 이사할 때만 하더라도 남편은 우리가 한국에 오래오래 살 것처럼 말했다. 그러니 결혼 초에 임대했던 가구를 전부 돌려주고 평창동 집에 맞춰 모든 가구를 새로 장만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고 채 3개월이 되지 않았을 때, 남편은 중국이나 대만으로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중국이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타이완으로의 이주가 결정됐다.
2003년 5월 25일 타이완에 도착했다. 당시 타이완에서는 ‘사스(SARS)’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현지에 있던 한국 주재원을 비롯해 모든 외국인들이 타이완을 벗어나던 시점이었다. 타이완 미국학교도 이미 5월 중순에 방학을 한 뒤라 외국인이라곤 거의 없었다. 타이완에 먼저 도착한 한국인 직원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타이완을 이미 떠난 뒤였다.
한국을 떠나던 날, 엄마가 서울에 왔다. 짐을 다 보낸 뒤라 우리는 며칠 동안 호텔에서 묵었다. 엄마는 마치 우리가 죽으러 가는 것처럼, 이번에 가면 영영 못 볼 것처럼 눈물을 찍어냈다. 그리곤 남편을 원망했다. “그놈이 혼자 가면 되지, 왜 우리 딸이랑 아이까지 데리고 가냐”라고 넋두리를 했다. 엄마는 나중에 사스가 끝나면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남편도 나도 가족은 붙어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나는 남편과 함께 있는 데 뭐가 문제랴 싶었다. 하지만 문제가 적지 않았다. 아는 사람도 없고, 아무 데도 다닐 수 없고,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고립감은 생각보다 큰 문제를 가져왔다.
타이완 이주를 도와주던 회사 관계자는 밖에 나다니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다. 그러니 아이와 나는 하루 종일 집안에서만 머물렀다.
아이는 갑자기 바뀐 환경 때문인지 밤낮없이 울었다. 아이를 돌보느라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이가 잠들면 먹을 것보다 잠이 고팠다.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남편은 밤 잠이 깊은 사람이라 아이가 밤에 자다가 깨서 울 때도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이 부분은 딱히 서운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다.
낮에 가끔 집 가까운 곳에 있는 편의점에 가서 삼각 김밥을 사 와서 끼니를 때웠다. 그때는 김치도 흔치 않아 종갓집 김치 한 봉지를 사 오면 식은 밥에 김치만 갖고 며칠 동안 밥을 먹기도 했다. 미역은 사 왔지만, 국물을 끓일 새가 없었다.
나는 모유수유를 했다. 서울에선 모유가 너무 많아 계속 착즙기로 짜서 냉동까지 할 정도였다. 1년 정도는 모유수유를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타이완에 도착한 이후 아이가 젖을 먹고서도 계속 울었다. 모유가 부족해서였다. 잘 먹지 못하고, 잘 자지 못하니 저절로 모유가 줄어들어 있었다. 8개월 무렵부터 분유를 병행했다.
급기야 손가락도 말을 듣지 않았다. 걸핏하면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다가 떨어뜨리곤 했다.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못할 정도로 손가락에 힘이 없었다. 걷는 것도 불편해서 어기적거리며 걸었다.
서울에선 일주일에 두세 번 베이비시터를 불러서 아이를 맡기고 운동도 하고, 외출도 했지만, 여기선 그 모든 게 불가능했다. 사람 구경이 힘들었으니, 대화를 나눌 사람조차 없었다. 마치 낯선 곳에 버려진 느낌도 들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우울해졌다. 아마도 이 무렵에 남편한테 점점 짜증을 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남편이 우려했던 그 일, 아이를 낳고부터 부부사이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남편의 트라우마를 점점 자극했다. 이 역시 나중에 알았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회사에서 오자마자 바로 자신의 서재방으로 직행했다. 아이를 안아주지도 않았다. 나는 하루 종일 아이에게 시달리다가 남편이 와서 아이를 좀 봐주기만을 바랐는데, 남편은 마치 남처럼 행동했다. 이게 서운해 남편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부터 아이 갖기를 꺼려했던 남편이었던 지라, 점차 나는 그쪽으로 생각을 몰아갔다.
알고 보니 나는 그 당시 상당히 중증의 산후우울증을 뒤늦게 겪고 있었다. 완전한 고립감 속에서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갔다. 아파트 14층에서 아이와 단 둘이서만 있다 보면, 아주 가끔씩 뛰어내려 버릴까 라는 못된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말로만 듣던 산후우울증이 그렇게 심각한 병이 될 수도 있음을 그때의 경험으로 알았다.
남편은 나중에 이때를 회상하며 “그때는 당신 얼굴을 보는 게 겁이 나서 집에 들어오기가 싫었다”라고 말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불평불만이었다고도 했다. 간혹 이혼을 떠올리기도 했다니, 생각해 보면 이때 참 아슬아슬했다.
그 아슬아슬했던 위기는 사스가 종료되고, 생활이 정상화되면서 점차 나아졌다.
한국인 커뮤니티, 특히 국제 결혼한 커플들을 알게 되면서 우리의 문제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됐다. 국제결혼 커플 중에는 한미 커플이 세 쌍, 한불 커플이 두 쌍이 있었다. 그 커플들과 한국 가족 등 30여 명을 초대해 아이 돌잔치도 치렀다.
그들과 함께 남편에 대해, 아이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어떤 미국 남편은 아내가 김치 먹는 것을 참지 못한다고 했다. 김치 냄새를 싫어해서였다. 그래서 결혼 이후 한 번도 남편이 있는 자리에서 김치를 먹지 못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남편은 그런 문제에 관대했다. 김치와 밥을 잘 먹지는 않았지만, 내가 먹는 것에 대해 싫은 소리는 한 적은 없었다. 삼겹살을 먹을 때는 김치를 즐기기도 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경제권의 문제였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국제결혼 커플은 남편이 경제권을 틀어 쥐고 있었다. 자신이 번 돈은 따로 관리하고, 아내에겐 일정액의 생활비와 용돈을 주는 식이었다. 딱히 아내를 못 믿어서라기보다, 생활 방식의 문제인 것 같았다.
그런데 남편은 결혼 초기부터 자신의 계좌 관리를 나에게 맡겼다. 물론 결혼 초기에는 나 역시 직장이 있었기에 필요한 돈을 서로의 통장에서 빼서 썼지만, 타이완 이주 후에 나는 따로 통장이 없었다. 남편의 통장에서 ‘자유롭게’ 생활비와 용돈을 찾아서 썼다. 그렇다고 내가 나를 위해 비싼 물건을 턱턱 사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일단 신뢰받는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타이완 이주 초기에 큰 위기를 겪고 난 뒤 우리는 아무리 좋았던 관계도 외부 상황 때문에 쉽게 깨질 수도 있음을 절감했다. 서로의 불만, 서로 원하는 것을 털어놓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일주일에 두세 차례 씩 아이와 집안일을 돌봐 줄 필리핀 도우미를 구했다. 덕분에 금요일 저녁마다 부부 데이트를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 역시 국제 결혼한 커플의 조언이었다.
우리는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무슨 일이 생기든 마음속에 담아 두지 말고 말로 풀어내자는 것, 그리고 아이 앞에서는 절대로 싸우지 말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대체로 이 원칙을 잘 지켜냈다.
타이완에서 생활했던 12년은 우리가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서로의 장점을 잘 찾아냈던 시기였던 것 같다.
남편에게는 여러 가지 좋은 습관이 많았다.
남편은 우선 밥을 먹고 나선, 한 번도 그냥 일어난 적이 없었다. 자신이 먹은 그릇은 일단 개수대에 가져가서 물로 헹궈 놓는 습관이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는 나에게 “잘 먹었어, 여보. 식사 준비하느라 수고했어”라고 꼭 감사인사를 했다. 나는 가끔, 아내가 가족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데, 뭘 그렇게 고마워하나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이런 습관은 딸에게도 그대로 전해져 딸아이도 밥 먹은 뒤 꼭 감사인사를 하는 게 우리 집 불문율이 됐다.
출장을 가지 않는 한 집에 늦게 들어오는 법도 없었고, 따로 외출을 하는 법도 없이 항상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자유를 갈망하던 그 새는 어디로 갔나 싶기도 했다.
양말을 거꾸로 벗어 놓고, 치약을 중간지점부터 짜서 쓰긴 했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 역시 집안일을 해주는 도우미가 있었기에 그걸 문제 삼기에는 솔직히 너무 편했다. 게다가 한국 엄마들이 흔히 겪는다는 ‘시’ 자 관련 스트레스까지 없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는 말이 딱 맞았다.
우리는 1년에 서너 차례 사람들을 초대해 함께 어울렸고, 나는 대여섯 명의 한국 엄마들이랑 우리 집을 아지트로 삼아 매주 한 번씩 바느질도 하고 음식도 나누면서 지냈다. 그 당시에 만난 한국 엄마들은 나를 볼 때마다 농담 삼아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가 보다”라고 할 정도로 남편과의 타이완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내 인생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
한국 엄마들과 함께 만든 바느질 제품으로 '오픈 하우스'란 이름의 판매 행사도 우리 집에서 가끔 했다.
어쩌면 한국에서 우리가 꿈꾸던 생활도 그런 생활이었던 것 같다. 집으로 친구들 불러다가 함께 어울리는 생활! 남편과 나는 둘 다 밖으로 싸돌아 다니는 외출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집으로 친구를 부르는 것은 좋아했다. 집이 주는 안온함이 우리에겐 무엇보다 중요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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