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양평에 지은 집은 빛이 가득한 집이었다. 남향으로 큰 통창을 냈기에 한 겨울에도 해만 뜨면 기온이 금방 올라갔다. 집안에 있으면 따뜻하고 안온한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
우리는 집 지을 땅을 찾기 위해 2011년 당시 양평 일대 수십 곳의 땅을 보러 다녔다. 이미 지어진 집도 보고 땅도 봤다. 이미 지어진 집은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평지와 계곡 주변의 땅도 봤지만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평지는 너무 휑한 느낌이었고, 계곡은 너무 꽉 막힌 느낌을 받았다.
이 땅을 봤을 때, 우리가 처음 느낀 감정이 바로 ‘안온함’이었다. 집 뒤로는 작은 야산이 활처럼 둘러쳐져, 마치 거인이 팔을 벌려 감싸고 있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동네를 살짝 내려다보는 위치라, 앞쪽 시야는 트여 있었다. 우리는 별장이 아니라, 노후에 살 집터를 찾고 있었기에 동네에서 너무 동떨어진 곳은 피했다. 이 땅은 다행히 동네 안에 있었기에 둘 다 마음에 들어 했다.
집을 지을 때는 남편의 취향을 십분 고려했다. 개방감이 들면서도 환한 집이 포인트였다. 통창과 함께 1~2층의 일부를 탁 트는 구조를 택했다. 2층에 있는 3개의 방은 전부 꽤 넓은 발코니를 만들었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집이라서 그랬던지 남편은 이 집을 단순히 좋아한 정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리고 이 집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집을 짓고 나서 우리의 바람대로 많은 친구들을 불러들였다. 내 대학 친구들 10여 명, 고향친구들 30여 명이 와서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가족들과 남편의 직장 동료들도 불렀다. 가까운 친구들도 수시로 불러 들였다. 거의 매달 한번씩은 집이 북적거렸다. 다들 일반 가정집이라기보다는 “갤러리 같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남편에겐 어느새 이 집이 자랑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남편의 영혼이 이 집을 떠나지 못했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나중에 어느 웹소설을 읽으면서 ‘지박령’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죽기 직전에 가장 뜻깊었던 장소를 떠나지 못하는 영혼이라는 것이었다.미신이었지만, 나는 그 말을 왠지 믿고 싶었다. 나는 당시 남편과 집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딸아이와 나는 1주일 남짓 이 집에 머물다가 연희동 집으로 갔다. 딸아이가 다니던 외국인학교의 겨울 방학은 3주 정도에 불과했다. 개학할 시기가 됐던 것이다.
하지만 늘 양평 집이 그리웠다. 주말에 양평 집에 오면 따뜻하고 좋았다. 남편의 영혼이 집안 곳곳에 스며 있는 것 같았다. 간혹 사랑하는 사람이 사망하고 난 후면 그 장소를 떠나거나 그 사람이 썼던 물건을 없애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나는 그 반대였다.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이 집이 좋았다. 무섭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의 손때가 묻은 물건도 몇 년 동안 버릴 수가 없었다.
연희동 집은 북향이라 양평 집과는 딴판이었다. 늘 어둡고 축축했다. 집안에 앉아 있다 보면 여지없이 우울감이 밀려왔다. 마치 깊은 어둠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내가 집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집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은 지하수가 얼어붙어 터지고, 어느 날은 전기가 나갔다. 멀쩡했던 나무가 누렇게 말라죽기도 했다. 연희동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겨울 동안 보일러가 서너 번이나 작동을 멈추었다.
알 수 없는 어떤 나쁜 운명의 힘이 나를 조여온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시험받는 느낌이었다.
자잘한 문제가 끊임없이 생겼지만, 가장 큰 문제는 딸아이였다. 딸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양평 집이 싫다고 했다. 오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빠와 함께 행복했던 추억이 겹겹이 쌓인 곳이라 더 힘들다고 했다.
남편이 사망한 직후 내가 가장 걱정한 것도 딸아이였다. 이제 겨우 중 3이 된 딸아이가 학교 생활을 잘해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릴 때 아빠를 잃는 아이가 우리 딸 하나만은 아니겠지만, 딸아이는 바로 눈앞에서 아빠가 숨이 넘어가는 모습을 봤다. 그것도 심폐소생술과 응급실 대기, 경찰서 동행 등 그 모든 과정을 함께 했기에 그 충격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학교 카운슬러에게 이메일을 보내 상황을 설명했다.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잘 좀 보살펴 달라고 했다. 학교에서는 뜻밖에도 애도의 카드와 함께 꽃을 보내왔다. 카운슬러는 이메일로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잘 지켜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덕분인지, 조마조마했던 내 우려와는 달리 딸아이는 학교 생활을 잘해 나갔다. 2월에는 학교 국제행사로 상하이에도 다녀오고, 성적도 상위권을 유지했다. 집에서 우는 일도 거의 없었다. 아이는 너무 멀쩡했다. 아니 멀쩡해 보였다.
이런 딸아이와는 반대로 나는 하루하루 무너져갔다. 딸이 양평 집에 가기 싫다고 한 이후로 나는 이상하게도 딸아이와 점점 더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비단 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세상 모든 것에서 점점 격리되면서 혼자만의 세계에 갇히고 있었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내 편이 아니고, 친구도 가족도 전부 내 편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아무도 내 슬픔을 모른다고 생각했고, 딱히 슬픔을 나누려고 하지도 않았다. 내 슬픔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도 들었다. 누가 위로를 해주는 것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느 날, 친구가 전화를 했다. 대기업 임원으로 일하고 있었던 그 친구는 나에게 “바꿀 수 없으면 즐기라”라고 말했다. 나름 조언이라고 해 준 이 말에 나는 상처를 입었다. “즐기라고? 도대체 뭘 즐겨? 남편의 죽음을 즐기라고?” 미혼인 이 친구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하루는 먹거리가 떨어져 차를 타고 마트에 나가는 길에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에서 남궁옥분의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나의 사랑 그대 곁으로>란 노래였다. 무심코 노래를 들었다.
“흘러가는 하얀 구름 벗을 삼아서, 한없는 그리움을 지우오리다. (…)
내 님 떠난 외로운 길 서러운 길에 이내 몸 불 밝히리다. “
마지막 부분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차를 길가에 세우고 한참을 울었다. 그런 일이 잦아지다 보니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어디든 라디오나 음악 소리가 들렸고, 어떤 음악에도 남편의 모습이 겹쳐져 다가왔다.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몇 시간이고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간혹 남편의 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해바라기의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는 곡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꿈을 꾸듯 잠시 행복해하다가 후다닥 현실을 깨닫고 전화를 끊곤 했다. 남편과 나는 서로의 전화벨 소리를 이 노래로 세팅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그 사람은 도대체 어디 있을까?
그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딸아이를 연희동에 두고 혼자서 양평 집으로 향하곤 했다. 남편의 영혼이 머무는 그 집으로. 그 집은 마치 '퀘렌시아', 즉 내 '영혼의 안식처'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세상을 뜨기 전까지 나는 사실 영혼이라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타이완에 살 때 천주교 성당에 1년 남짓 다니면서 세례도 받았지만, 그건 믿음보다는 사교활동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영혼이나 사후세계 같은 것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알 필요가 없는 것’쯤으로 여겼다.
그런데 남편이 죽고 나서 내 이런 태도는 바뀌고 있었다. 남편의 영혼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떻게든 그의 영혼이 여전히 존재하고, 내 곁에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의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을 때, 그의 영혼이 머무를 수 있는 곳은 우리 집이 가장 적당해 보였다.
그렇게 양평 집에서 잠시 힐링하고 다시 연희동 집에 가서 1주일을 견디던 생활이 반복되다가 49일을 앞둔 시점이 됐다.
언니가 49재를 지내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딱히 불교도가 아니라서 49재에 대해선 생각도 안 했지만, “갑자기 세상을 뜬 네 남편의 영혼이 편하게 해 주자”는 언니의 의견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그렇게 언니와 올케, 딸아이와 내가 참석한 가운데 49재가 진행됐다. 그런데 스님이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49재는 지금까지 이승에 있던 영혼을 저 세상으로 인도하는 의식이라고 했다. 남편의 영혼이 나를 떠난다는 말에 나는 49재를 지내는 내내 울었다. 49재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다.
49재가 끝나고 나서부터 진짜 허탈감이 찾아왔다. 어쩌면 그동안 흘린 눈물이 남편을 위한 눈물이었다면, 그때부터는 진짜로 혼자임을 절감하면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