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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소공 Oct 29. 2024

어두운 기억의 저편

한 소녀가 울고 있었다!


49재를 지내고 난 이후 혼자 연희동 집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어떤 막막한 어둠에 끌려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딱히 구체적으로 죽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내가 죽으면, 남편의 영혼이 나를 반겨줄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딸은 내가 없어도 왠지 잘 살 것 같은데, 남편은 혼자 가는 그 길이 너무 외로울 것 같았다. 게다가 말이 통하지 않는 타국이라 혼자서 저승 가는 길을 찾기도 힘들 것 같다는 다소 황당한 생각도 하고 있었다. 남편이 살아생전에 내가 한국에서 그의 통역자 역할을 했던 것처럼 통역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어두운 생각 속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 어둠이 생소하지 않게 여겨졌다. 그 어둠은 상당히 익숙한 어둠이었다. 오래전에 입구를 틀어막아버린 깊은 우물 속 같은 어둠. 그 어두운 우물을 나는 한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린 소녀가 어둠 속에서 울고 있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긴 했는데, 무슨 일인지는 잘 몰랐다. 다만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알았다. 소녀는 입이 무거웠다. 아무한테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입을 여는 순간 큰 폭풍이 몰아치리란 생각도 했다. 소녀는 아무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소녀는 중학교에 가서야 그 일이 무슨 일인지 알았다. 그때는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순결 교육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소녀는 자신이 순결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때부터였을까. 소녀는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때론, 아니 자주 자신이 더럽다는 생각에 수치스러웠다.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도 받았다. 처음에는 ‘다르다’고 느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인생이 평범하게 흘러가지 않을 것임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장 그르니에, 섬)고 했는데, 어쩌면 소녀에게는 그 순간이 아주 어둡게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소녀는 첫 생리가 나왔을 때, 그걸 축복이 아닌 '저주'라고 여겼다. 자신에게 생긴 일이 자신이 여자라서 생긴 일이라 생각했기에, 여자가 되는 것이 싫었다.


사춘기 여학생들이 한창 하이틴 로맨스 소설에 빠져있을 때도 소녀는 그런 소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소녀는 로맨스를 거부했다. 아니 어쩌면 여자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소녀는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실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공부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시절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에게 ‘목석’이라고 지칭했다. 한 번도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대학 4학년 때 다들 졸업여행을 떠날 때도 소녀는 가지 않았다. 여행일정 중 온천에 간다는 말에 놀랐기 때문이었다. 옷을 벗으면 몸에 어떤 흔적이 남아 있을 것만 같았다. 남의 앞에서 벗은 몸을 보여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사에 들어가서도 소녀, 아니 그녀는 일만 했다. 간혹 남자를 만나기도 했지만, 남자에게 듣는 소리라곤 “수녀 같다”는 말이었다. 그녀의 친한 친구도 그녀에게 “성적 매력은 1도 없어!”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그 말에 상처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좋아했다. '여자로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녀는 호탕하게 잘 웃었고, 술도 잘 마셨기에 남자 동료들과 잘 어울렸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당차고 강했지만, 마음속에는 늘 10살짜리 어린 소녀가 살고 있었다. 자라지 않은 채, 어둠 속을 헤매는 소녀!





마음속에 그 어린 소녀를 감춘 나는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까지 늘 어두운 터널 안을 하염없이 걷는 기분이었다. 빛은 보이지 않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터널 속을 걷고 또 걸었다. “도대체 빛은 어디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직장에 다니던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는 어두운 밤바다에서 조각배를 타고 정처 없이 헤매는 모습이었다. 이제 그만 항구를 찾아 닻을 내리고 싶었지만, 등대가 보이지 않았다.


남편과 결혼하게 됐을 때, 나는 드디어 항구를 찾아 환한 빛 속에서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좀 웃기는 얘기지만, 나는 결혼 생활이 안정을 찾으면서 남편을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여겼다. 그동안 잘 참고, 잘 살아냈으니, 이제 상을 받는구나 싶었다. 지인들이 내 결혼 생활을 일컬어 “전생에 나라를 구했냐”라는 말을 할 때 나는 속으로 “전생이 아니라 현생에서 대가를 치렀지”라는 오만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남편의 죽음 이후 내가 처음 했던 생각도 '신이 선물을 빼앗아 갔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뭐 그리 큰 잘못을 했기에 기껏 줬던 선물을 빼앗아 갔을까를 생각하며 죄책감에 시달렸다. 특히 남편이 죽기 전날 내가 나무 주걱을 집어던지며, "혼자 있게 해 달라"라고 소리친 것이 결정적인 잘못 같기도 했다. 신이 분노에 찬 내 말을 오해하고 남편을 데려갔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런 죄책감과 어린 시절의 그 짙은 어둠이 어우러져 나를 잠식해 나가고 있었다. 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슬퍼하고 수치스러워하던 어린 소녀의 모습이 당시의 내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지나 놓고 보면 참 한심한 모습이었다. 나는 돌봐야 할 딸이 있는 엄마였지만, 그 사실조차 한동안 망각하고 있었다.





딸아이가 네 살 때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다. 당시 우리는 타이완에 살고 있었고, 남편은 출장 중이라 나는 딸아이를 데리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장례식장과 고향집이 멀어서 우리는 장례식장 인근 모텔에 방을 잡았다. 나는 장례식장에 머물고, 딸아이는 조카와 함께 잠을 잤다.


밤중에 조카에게서 연락이 왔다. 딸아이가 어둠 속에서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었다고 했다. 그것도 코피를 흘리면서. 놀란 조카가 딸에게 엄마한테 가자고 해도 딸아이는 눈물만 흘리기에 나한테 연락했다는 것이었다. 딸아이는 남의 슬픔에 공감을 잘하고, 속이 깊은 아이였음을 나는 잊고 있었다.


사실 딸아이와 나는 남편이 죽기 전까지 자주 티격태격했다. 딸아이는 사춘기, 나는 갱년기였다. 우리 두 사람이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이면 남편이 중재역할을 했다. 남편은 주로 내 편이었지만, 가끔 딸 방에서 딸아이랑 오랫동안 얘기를 하는 걸로 봐서 딸을 다독여 주는 것 같기도 했다.


딸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며칠 후 자신의 SNS에 “내 영웅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로 아빠의 죽음을 전했다. ‘영웅’으로 묘사할 만큼 좋아하고 존경하던 아빠였으니 그 상실감이 어땠을지 불을 보듯 뻔한데도, 나는 그걸 인지하지 못할 만큼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내 슬픔에 빠져 아이가 얼마나 슬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하지 못했다기보다, 당연히 슬퍼해야 하는데, 너무 정상적으로 보이는 게 이상해서 거리감을 느꼈다. 그 거리감에는 남편의 죽음에 대한 내 죄책감도 한몫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전날, 내가 주걱을 집어던지는 모습을 딸도 봤기에 딸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알고 보니, 우리 딸은 말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딸아이가 집에서 울지 않았던 이유는 엄마의 슬픔에 자신의 슬픔까지 보태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나중에 말했다. 방에서 혼자 울었다고 했다.





그랬던 딸이 어느 날 나에게 화를 냈다. 내가 인터넷으로 처리해야 할 학교 행사를 까먹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딸아이는 무심코 “아빠가 살아 있었다면 잘했을 텐데”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불같이 화를 냈던 것 같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며 씩씩거렸다.


그런 나에게 딸이 한마디를 했다. “엄마는 아빠 대신 내가 죽었으면 좋겠냐”는 말이었다. 너무나 못났던 나는 그때 "너는 아빠 대신 내가 죽었으면 좋겠냐"라고 되받았다. 아니라는 딸의 말에 내심 위안이 되기도 했다. 참 부끄럽지만 그땐 그랬다. 영웅을 잃은 딸과 빛을 잃은 나는 기댈 곳을 찾지 못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물론 내가 더 한심했다.


어쨌거나 그 뜬금없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뭔가를 엄청나게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는 딸까지 잃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편을 잃고 딸까지 잃는 인생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좀 억지스럽지만, 그 당시 공교롭게도 딸아이가 자신의 친구 오빠 얘기를 했다. 타이완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오빠가 자살했다는 소식이었다. 공부를 잘해서 미국 존스홉킨스 의대까지 갔지만,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딸아이는 이 오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상상하기도 싫었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죽어서도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빛을 찾아야 했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야 했다. 우선은 딸이 그 이유였다. 설사 딸이 자랑스러워하진 못하더라도 못난 엄마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 무렵에 나는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듣곤 했다. 어느 날, 법륜스님이 어느 절에 속한 스님인지 알고 싶었다. 검색을 하는 과정에서 법륜스님이 정토회라는 불교 조직을 이끌고 있고, 그 정토회에서 불교대학을 운영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그 불교대학의 신입생 모집 공고가 눈길을 끌었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법을 등불로 삼아 스스로 등불이 돼라’는 뜻이라고 했다. 스스로 등불이 되는 삶이라니! 내가 찾고 있는 게 바로 그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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