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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소공 Oct 18. 2024

두 가지 큰 결단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갖기로 했다!

결혼 이후 남편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아이를 갖는 것이었다. 남편은 이전 결혼 생활에 대한 몇 차례의 언급에서 아이를 낳은 이후부터 부부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졌다고 말했다. 남편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상황을 나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사실 나도 아이를 그렇게 좋아하는 성향은 아니었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아이를 보면서 “귀엽다”라고 말하는 일부 동료들의 말도 호들갑으로 여길 뿐, 별로 감흥이 없었다. 남의 아이를 귀엽다고 안아 준 적도 없었다. 그러니 굳이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지냈다.


다만 우리가 결혼하고 1년이 넘도록 아이 가질 생각을 하지 않고 지내자 내 주변에서는 걱정이 많았다.


가장 걱정한 사람은 역시 우리 엄마였다. 엄마는 “그 서양 놈이 아이도 낳지 않고 살다가 그냥 가버리면 어떡하냐”는 걱정을 나를 볼 때마다 잔소리처럼 퍼부어 댔다. 심지어는 그냥 가버리기 위해 아이를 갖지 않는 거라는 다소 악의적인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남편을 믿었기에 엄마의 말에 흔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같이 일하는 선배가 하는 말에는 조금 흔들렸다. 매사에 딱 부러지고 날카로웠던 그 선배가 자신이 지금까지 한 일중 아이를 낳은 것이 가장 잘한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 아이란 존재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결정적으로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은 한 친구가 얘기해 준 자신의 고모 사례였다. 친구의 고모는 늦은 나이에, 자신보다 나이가 10 여살 많은 서양 남자랑 결혼했는데, 첫 10여 년은 아이 없이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너무나 행복하게 잘 지냈다고 했다. 그런데 십 수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 고모는 더 이상 여행이 즐겁지 않았다. 삶이 너무나 무료하고 외로워 우울증에 시달릴 정도였다. 내 친구의 조언으로 아이를 입양하기로 했다.


50을 앞둔 고모는 이미 60이 지난 고모부를 설득해 한국에서 한 여자아이를 입양했다. 이 입양을 내 친구가 도와줬다. 그런데 처음에 입양조차 꺼려했던 이 고모부는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아이에게 푹 빠졌다. 더불어 진작 아이를 입양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는 것이 내 친구의 얘기였다.


친구는 “지금은 괜찮겠지. 하지만 나이가 들면 달라져. 그땐 이미 늦을지도 몰라 “라는 말로 내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아마도 친구의 고모 사례가 내 나이나 상황과 많이 비슷해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그즈음에 또 나는 ‘둘은 가족이라기보다 커플’이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자라나고 있었다. 둘은 자유롭지만, 그만큼 깨지기 쉽고, 가족이라는 한 울타리에 담기기엔 부족한 인원이라는 생각이었다. 이왕 결혼이라는 것을 했으니, 가족이라는 것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이 생각을 남편에게 바로 말할 수는 없었다. 남편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알았기에.



그런데 기회가 찾아왔다. 결혼하고 두 번째로 맞는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때는 여행을 갔던 것 같은데, 그 해는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던 참이었다.


우리는 와인을 앞에 놓고 크리스마스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시골 깡촌 출신인 데다 교회를 다닌 것도 아니어서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기념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의미도 제대로 몰랐다. 하물며 그때까지 나는 크리스마스에 누군가와 함께 지내본 적도,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이 보냈으니, 크리스마스는 그저 쉬는 날에 불과했다. 직장인이 가장 좋아하는 빨간 날!


남편은 독일에서 크리스마스 장식을 어떻게 하고, 자신이 어렸을 때 어떤 선물을 받고 좋아했는지,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추억에 잠겼다. 행복해 보였다. 그러면서 “크리스마스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지”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나를 흘낏 쳐다봤다.


나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이가 없으면 우리 크리스마스는 매년 이렇게 맹숭맹숭하겠다”라는 말을 먼저 했는지, “우리도 아이를 가질까?”라는 말을 먼저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이를 갖자는 뜻의 말을 돌려서 해버렸다.  


남편이 많이 놀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는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말을 했다.


당신과 함께 라면 아이를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이때 약간의 승리감을 맞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드디어 해냈다는 어떤 느낌이었다.



사실 나는 남편과 결혼 이후 남편에게 모든 것을 맞추고 있었다. 뜬금없이 “나를 무시하느냐?”는 말을 들으면서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물론 듣는 당시에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을 때도 많았다.


나는 남편의 그 민감한 반응들이 이전 결혼 생활에서 오는 어떤 트라우마라고 여겼다. 그래서 가끔 술을 마시며, 그게 왜 무시가 아닌지를 차근차근 설명해주곤 했다.


예를 들면 남편이 나와 함께 비디오 가게에 갔다. 남편이 몇몇 비디오를 보면서 “이거 재미있겠다”라고 하기에, “어, 재미있겠네”라고 말해줬다. 그리곤 나는 또 내가 보고 싶은 비디오를 골랐다. 그런데 남편이 자신이 ‘재미있겠다’라고 말한 비디오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나는 그사이에 남편 마음이 바뀌었나 싶어서 그냥 내가 고른 비디오만 가지고 집으로 왔는데, 남편의 표정이 점점 이상하게 변해갔다.


결국 저녁 무렵에야 내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질타했다. 처음에 그 말을 듣고선 기가 막혔다. 무슨 이런 찌질한 남자가 다 있나 싶기도 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남편은 자신이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에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않으면 그걸 무시 또는 적대감으로 해석하는 성향이 있었다. 자기가 하는 일에는 무조건 찬성하고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성향도 갖고 있었다. 누구나 어느 정도 이런 성향을 갖고 있겠지만, 남편은 그걸 말로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내 속마음을 표현하는 데 익숙지 않았지만, 남편의 이때 반응은 어떤 피해의식 같아 보였다.


이런 남편에게 나는 “원하는 게 있으면 ‘분명하게’ 말을 해 달라”라고 부탁했다. 나는 남의 마음까지 짚어내는 능력은 없다고도 했다. 혹시나 내가 싫어하더라도 정말로 좋아하는 게 있다면 나를 설득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게 바로 의견조율의 과정이라고.


어쨌거나 그런 남편이었기에 나는 신혼 초에 두통을 달고 살았던 것 같다. 어떤 말을 할 때마다 이 말이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무서워서 말을 바로 뱉지 않고, 머릿속에서 굴리다 보니 어찌 머리가 아프지 않았을까 싶다. 더욱이 어설픈 영어로 말해야 했으니, 머리를 굴리다가 돌가루가 떨어질 지경이었다.


그런 남편이 “당신과 함께 라면 아이를 낳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라고 말한 것은 큰 진전이라고 봤다. 나를 인정해 주는 느낌도 들었다. 그 무렵 남편은 자신의 동료가 나를 가리켜 "천사같다"라고 했다면서 나를 띄워주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일종의 가스라이팅이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런 가스라이팅 덕분이었는지, 나는 아이를 갖겠다는 결심을 하기 전에 큰 양보를 한 가지 더했다. 바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라는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늘 시간이 없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남편은 거의 저녁 7시 전에 퇴근했지만, 우리는 8시가 넘어야 퇴근하는 날이 대다수였다. 마감이 있는 날은 12시를 넘기기도 했다. 한 달에 한두 번은 마지막 인쇄를 보기 위해 야근도 해야 했다.  


무엇보다 남편의 큰 불만은 휴가기간이었다. 나는 1년에 기껏해야 여름 1주일, 겨울 1주일을 합해 연간 2주 정도의 휴가를 받을 수 있었지만, 남편은 외국계 회사라 휴가 기간이 길었다. 게다가 그는 장기근속 고위직이라 1년에 세 달 정도는 휴가를 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휴가를 가고 싶을 때마다 내 일 때문에 갈 수 없다면서 은근슬쩍 그만두기를 바랐다. 내가 일하는 시간에 비해 월급이 적다는 것도 꼬집었다. 치사하게.  


나는 당시 경제 주간지 생활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다. 신문사는 일간이라 매일 마감 스트레스에 시달렸지만, 주간지는 매주 한번 마감이라 마감 스트레스가 훨씬 덜했다. 특정 주제에 대해 깊이 파서 길게 쓰는 기사 스타일도 꽤나 마음에 들었다. 일간지에 비해 훨씬 소규모라 나름 가족적인 분위기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그만둔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 결혼생활을 제대로 이끌어가기 위해선 결단을 내려야 했다.


무엇보다 내가 경제 전문지 기자 생활을 즐기기는 했지만, 남편과의 결혼 생활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자 생활을 해서 앞으로 뭔가를 이루고 싶다는 큰 목표도 없었다.


그렇지만 결혼 생활은 달랐다. 내가 결혼을 결심한 계기 자체가 ‘누군가의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선택이고 싶어서’라는 생각도 떠올랐다.


나는 결혼한 지 1년 만에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주부가 됐다.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행복하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남편이 사망하고 상속재산 관련 재판을 하면서 남편의 가족들이 “당신은 남편이 벌어주는 돈만 쓰고 살았지 않았느냐”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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