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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소공 Sep 27. 2024

8. 변호사 선임

밝혀진 사인과 전조 증상


1주일쯤 후에 시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편의 전처가 내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해서 거절했다는 전화였다. 시누이는 대신 전처의 연락처를 나에게 알려 주었다.


무엇보다 직접 연락하지 말고, 빨리 변호사를 선임하라고 했다. 시누이는 다시 한번, 남편의 전처는 무서운 사람이니 빨리 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나는 더 이상 망설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떤 변호사를 찾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집안에는 변호사와 연결해 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무턱대고 모르는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간다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신문사에 다니고 있던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기자라는 현직에서 벗어난 지 오래돼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현직 기자였던 선배는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봤다.


마침 그 선배는 1년 전, 조카가 이혼을 앞두고 있을 때 변호사를 소개해 준 적도 있었다.


선배가 소개해 준 변호사와 미팅을 했다. 남산 근처에 있는 법무법인이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변호사가 나와서 내 상황 설명을 듣고 나서 첫마디가 “쉽지 않겠네요!”였다.


그리고는 최악의 경우, 소송까지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기가 막혔다. 무슨 변호사가 첫 미팅 때 이렇게 겁을 주나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대안이 없어 이 변호사와 계약을 해야 하나 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미국에 사는 지인이 연락을 해왔다. 그 지인에게도 내 상황과 막막한 심정을 얘기했던 참이었다.




그 지인은 미국 변호사를 한 명 소개했다. 한국인 부인과 결혼해 한국에서 일하는 ‘정직한’ 국제법 전문 미국 변호사라고 했다.


언젠가 지인의 친구가 미국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위자료 한 푼 못 받게 되었을 때, 이 변호사가 해결해 준 적이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무엇보다 커피 한 잔도 공짜로 얻어먹지 않을 만큼 정직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는 그 당시 어수룩한 나를 누군가 속이거나 바가지 씌울 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기에, 그 말에 믿음이 갔다.


이메일을 보냈더니 답장이 왔다. 유창하진 않지만 한국말도 조금은 했다. 그는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그가 보내준 주소로 찾아갔다. 강남에 있는 법무 법인이었다. 알고 보니 이 법무 법인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꽤 크고 유명한 법무 법인이었는데, 그 당시엔 그런 것도 몰랐다.  


첫 미팅 자리에 4명의 변호사가 나왔다. 내가 소개받았던 그 외국인 변호사와 한국인 변호사 3명. 그중에는 독일어를 잘하는 여자 변호사도 있었다. 아예 한 팀이 나온 셈이었다. 뭔가 든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내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남편이 독일인이고, 미국에도 재산이 있다는 점, 그 규모는 정확하게 모른다는 점, 남편에게 전처 자녀들이 있다는 점 등을 설명했다. 유언장이 없다는 것도 전했다.  


한 젊은 변호사가 내 일을 맡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내심 왜 외국인 변호사가 맡지 않나 싶었지만, 고위직이라 그런가 보다 싶었다.


어쨌거나 그 젊은 변호사도 꽤 경력이 있어 보였다. 게다가 인상이 좋고 시원시원했다. 날카롭고 차가워 보였던 이전 미팅의 변호사와는 느낌부터 달랐다.


그는 일차적으로 국세청에 남편의 재산을 신고하고 상속세를 내는 것까지 아무 문제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처럼 말했다.


나는 이 미팅에서 한 가지를 강조했다. 상속 재산이 어떤 식으로 분할되든 남편의 집은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속세며 상속재산 분할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던 나는, 그게 최선이라고 여겼다. 상속재산 분할 과정에서 혹시나 집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생길까 봐 나는 겁을 내고 있었다.


다행히(?) 변호사들은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고, 나는 그 말을 믿었다. 변호사 비용도 ‘타임차지’가 아니라 상속재산 정리까지 통틀어 3천만 원 정도로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변호사 선임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변호사를 선임한 후 나는 한시름 놓았다. 이제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시누이가 준 전처의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변호사에게 전달했지만, 전처는 전화도 받지 않고, 이메일 답장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치 사람이 사라진 것처럼. 그러니 일이 진척될 리가 없었다.


또한 집에 대한 내 집착도 나중에 큰 문제를 야기했지만, 그때까지는 몰랐다.

 




그즈음에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나를 마치 남편의 살인 용의자처럼 취급했던 그 경찰이었다. 남편의 사망 원인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경찰은 죽상 경화증에 의한 급성 심근경색이 그의 사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물론 사망진단서에는 첨부되지 않는 비공식적인 설명이었다.


“부검의가 그러더군요. 이렇게 갑자기 사망했다면, 가족들도 궁금해할 테니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안해하면서 덧붙였다.


“부검의 말이, 남편 분은 겉으로 건강해 보였을지 몰라도 폐도 시커멓고 혈관도 다 막혀 있었답니다.”


나는 경찰도, 부검의도 고마웠다. 감사하는 마음이 솟구쳤다. 도대체 남편이 왜 죽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남편의 생일에 봤던 시커멓게 변해버린 감자가 생각났다. 속병이 나서 거뭇거뭇해진 감자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는 남편의 폐가 오버랩됐다.


때론 자연 현상이 미래의 재앙을 예고해 주기도 한다던데, 나는 얼마나 징조를 무시하고 있었던 걸까. 남편의 죽음은 과연 전조 증상이 없었을까.


미리 알고 병원에 갔더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왜 아무것도 몰랐을까. 더욱이 나는 그 당시에 갱년기 증상이었는지, 게으른 성품이었는지, 음식 만들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혈관에 좋지 않은 음식들만 남편에게 해 먹이거나 사 먹이고 있었다.


기름기 많은 삼겹살과 치즈 범벅인 음식들, 그리고 걸핏하면 사다 먹던 피자까지. 물론 남편은 그런 음식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진즉에 알았더라면 음식에 진심인 내 성향으로 봐서 온갖 건강음식을 해다 바쳤을 텐데, 왜 몰랐을까. 후회로 가슴을 쥐어뜯는 나날들이 계속됐다. 사인이 밝혀지고 나서 오히려 남편의 죽음이 내 책임으로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전조 증상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내가 놓치거나 무시했던 그 증상들이…





남편은 사망하던 해 추석 무렵에 심하게 체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남편은 평일에도 양평 집에 혼자 와 있었던 적이 많았다. 연희동 집에서는 딱히 할 일이 없고 답답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남편은 목요일 아침 일찍 양평집으로 갔다. 저녁 늦게 전화가 왔다.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해서 억지로 토했다고 했다. 목소리에 힘이 없고, 많이 아픈 사람 같았다.


나는 지금이라도 가겠다고 했더니, 그럼 딸아이는 어쩌냐며, 내일(금요일) 저녁에 오라고 했다. 좀 괜찮아진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금요일 저녁에 딸아이와 함께 도착했을 때 남편의 얼굴은 파리했다. 겨우 걸을 정도로 힘도 없었다. 병원에 가자고 했더니,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힘이 없을 뿐이라고 손을 내저었다.


급히 먹을 것을 준비해 먹었다. 남편은 조금 괜찮아진 듯했지만, 토요일 아침에도 컨디션이 그렇게 좋아 보이진 않았다.


토요일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되고 있었다. 언니가 전화를 했다. 추석에 내려오냐고 묻는 전화였다.


나는 남편의 몸 상태를 설명했다. 언니는 놀란 목소리로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라”라고 채근했다. 시골에 올 필요 없다고도 말했다.  


남편에게 병원에 가자고 했다. 남편은 펄쩍 뛰듯이 놀라며 “이제 괜찮다. 병원에 갈 필요 없다. 빨리 남해에나 가자”면서 진짜로 팔짝팔짝 뛰었다. 만면에 웃음도 머금고 있었기에 긴가민가 했지만,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다.


왜 그렇게 병원 가기를 싫어했는지, 병원 얘기만 나오면 왜 그렇게 질색팔색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본인의 의사가 워낙 확고했기에 나 역시 어쩔 수는 없었다.


돌이켜 보면 이때의 체한 듯한 증상은 심장에 혈액 공급이 잘 안 돼서 생기는 심근 경색이나 부정맥의 일종으로 보였다.


남편의 유사 치매 증상도 결국 혈관이 막혀서 생긴 일종의 '혈관성 치매'로 이해됐다. 혈관성 치매가 있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됐다.


그렇게 우리는 남해에 내려갔다. 바다를 사랑했던 남편은 남해와 우리 가족을 바다만큼이나 좋아했다.


하지만 남편이 남해에 가고 싶어 한 것은 단순히 바다나 가족을 보는 이상의 이유가 있었다.


남편은 자신의 돈으로 지은 남해 친정집을 보고 싶어 했다.


<8화 끝>


#변호사선임 #전조증상 #친정집


<작가의 말>


갑자기 조회수가 폭증해서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오늘은 조회수 3만 회가 넘었더군요. '이기 므슨 일이고?' 싶습니다. 마음으로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저는 아침마다 108배와 명상을 하는데, 어제 아침부터는 명상을 할 때마다 아주 진득한 눈물이 한 줄기씩 흘러나오더군요. 분명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모진 운명의 굴레를 벗어난 듯한 안도와 감사의 눈물로 보였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9화는 10월 1일 화요일 저녁 8시에 올려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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