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소공 Dec 20. 2024

운명 바꾸기 프로젝트!

적선지가 필유여경

<운명을 바꾸는 법>이란 책은 명나라 관리였던 요범사훈이 아들에게 전해주는 글이다. 자신의 운명대로 살던 요범이 운곡선사를 만나 뒤늦게 자신의 운명을 바꾼 얘기가 주요 내용이다.


요범의 운명은 ‘과거에 합격도 못 하고, 자식도 없이 살다가 50대에 죽는 운명이었다’고 한다. 그런 제 운명을 이미 20대에 알게 된 요범은 그 운명에 순응하며 살았다. 아무 욕심 없이,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고. 어떻게 남이 말해 준 운명을 그렇게 철석같이 믿었나 싶지만, 그 운명을 말해 준 사람이 ‘공 선생’이라는 당대의 유명한 역학자였다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개인의 성향이기도 했겠지만.


그런데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명상센터에서 만난 운곡선사는 공 선생이 말한 요범의 운명에 이의를 제기했다. 공 선생이 말한 운명은 ‘정수(상수)’에 해당하지만, ‘변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수들 안에 변수가 있는데, 공 선생은 이 변수들을 몰랐거나 이를 계산할 줄 몰라 단지 정수들만 예측한 것이다. 이 변수들은 조정할 수 있으므로 운명을 개조할 수 있다.”


운곡선사는 그 변수가 운명을 바꾸는 열쇠가 된다고 했다. 스스로 행운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변수’ 얘기를 듣다 보니 드라마 ‘도깨비’의 한 대목이 생각났다. 도깨비 공유와 저승사자가 명부를 관리하는 곳에서 얘기를 하고 있는데, 볼일이 급한 인간이 들어와 화장실을 찾는 대목이다. 도깨비와 저승사자가 있는 곳의 문은 원래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문이었다. 이때 도깨비 공유가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인간의 간절함은 못 뚫는 벽이 없구나!


도깨비 공유는 그 변수를 자신의 운명에도 적용해보고 싶어 했다. 나 역시 운명을 바꾸고 싶다는 간절함이 강해서였는지, 이 대목이 아주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그러던 차에 <운명을 바꾸는 법>이란 책에서 ‘변수’라는 말이 나왔으니 반가웠다. 딱 나를 위한 책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희망이 생기는 느낌도 들었다.


드라마에선 ‘간절함’이란 말 외에 찾지 못한 그 변수를 어떻게 만들어낼지 궁금했다.





운곡선사가 알려준 운명 개조의 방법은 첫째, 자신의 과오를 낱낱이 인정하고, 두 번째 자신의 허물을 철저히 고치면서, 세 번째로 공덕을 쌓는 것(선행)이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과거를 곱씹지 않는 것’이었다. 이미 일어난 과거는 그대로 흘려보내고, 새로 태어나라는 말이었다.


운명을 바꾸는 첫 단계가 자신의 과오를 고치는 것이다. 그동안 쌓인 모든 나쁜 습관들을 털어내고, 모든 문제들의 뿌리를 하나씩 뽑아내야 한다. 어디에서나 항상 자신의 모든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끊임없이 감시해야 한다. 갓 태어난 어린애를 보호하듯이 자신의 선한 마음을 지켜 나가야 한다.


요범사훈은 운곡 선사의 이런 가르침에 따라 매일 자신의 잘못을 ‘치심 편’이란 책을 만들어 기록하면서 선행을 실천했다. 1차 삼천 선행을 10년 만에 달성하고, 2차 삼천 선행은 4년 만에 달성했다.


이 기간에 요범사훈은 과거에 급제하고, 아들을 얻었다. 어느 고을 현감으로 재직하는 동안 1만여 명 현민의 세금을 감면해 줌으로써 1만 선행을 이루기도 했다. 그는 큰 재상이 되거나 엄청난 부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팔자에 없는 것으로 나왔던 자식을 얻었고, 어쩌면 인간의 복 가운데 최고로 칠만한 장수의 복도 누렸다. 그는 76세까지 살았다. 당시로선 꽤나 장수한 셈이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그 과정을 낱낱이 적어 자식인 천계에게 전하면서 겸손할 것을 당부한다. 쉽게 표현하자면, 작은 재주를 믿고 까불지 말고, 있을 때 나대지 말고 겸손하게 베풀며 살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얼마나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믿고 싶었다. 이 말을 전해준 사람이 정목스님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소개로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정목 스님이 해설을 덧붙여 읽어주는 책으로 들었다. 그래서 더 믿음이 갔던 것 같다.


대부분의 운명학자들은 타고난 운명은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은 바꿀 수 없다기보다, 바꾸기 어렵다는 말이 맞겠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운칠기삼(運七技三)’은 운이 70%, 자신의 노력이 30%라는 뜻이다.


<조용헌의 사주 명리학 이야기>를 쓴 조용헌 씨는 팔자론을 주장한다. 자신의 운명대로 사는 사람이 90, 나머지 10%만이 자신의 운명을 바꿔서 산다는 얘기다. 어쨌거나 운명대로 사는 사람이 100%는 아니니, 30%든, 10%든 운명을 바꿔서 사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그 예외적인 경우에 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조용헌 씨가 운명을 바꾸는 10%에 속하는 대표적인 방법으로 든 것도 적선(積善)이다. 선을 쌓는다는 얘기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갖도록 투자하는 이치와 같다는 설명도 있었다. 사주 명리의 토대가 된 주역 문언전에 이런 말도 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는 말이다. 선행을 쌓으면 그 복이 자신뿐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미친다는 교훈을 갖고 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내가 덕을 쌓아 잘하면 현세에서, 아니면 내 딸이라도 그 혜택을 받도록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이 지긋지긋한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매일 108배를 하면서 참회를 하고, 선행이라는 것을 해보기로 했다. 그때 마침 ‘줍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걸으면서 쓰레기를 줍는 행위. 개랑 산책할 때마다 봉지 하나를 들고나가 길거리에 있는 쓰레기를 주웠다. 가끔씩은 너무 무거워서 가지고 오기가 힘들 정도인 날도 있었다.


밖에 나가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없는지 눈에 불을 켜고 살폈다. 백화점 같은 곳에서 유모차를 끌고 오는 사람이 있으면 문을 열고 기다려 주고, 먼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웃기는 말이지만, 잘못 걸려온 전화나 광고성 전화조차 ‘친절하게’ 받았다. 그동안 광고성 전화는 받자마자 퉁명스럽게 끊기가 일쑤였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것조차 운명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면 못할 일이 뭔가 싶었다.


이런 사소한 친절 외에 ‘보시’를 본격화했다.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재물을 베풀면 부자가 될 수 있다(재시)’란 말에 마음이 동했다. 유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이 문제가 당시엔 가장 절실했기에 오히려 보시를 더 많이 하려고 애썼다.


이미 10년 넘게 기부를 해 오고 있던 유니세프와 당시 몸담고 있던 정토회 외에 굿네이버스, 월드비전, 밀알복지재단, 그린피스, 국경 없는 의사회 등의 단체에 매달 소액기부를 하기 시작했다. 단체별로는 소액이었지만, 합산을 해 보면 한 달에 꽤 많은 금액이 기부금으로 나갔다. 가끔 벅차다는 생각도 했지만, 먹고사는 데 필요한 돈 외에 나 자신을 위해서는 일체 돈을 쓰지 않는 것으로 충당한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런 내 행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믿었다. 목적을 가진, 즉 ‘의도가 있는 선행’이 어떻게 선행인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본성이 선해서 선한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선한 행동을 함으로써 선해진다는 어떤 유명 대학의 연구결과도 있음에 비추어 그런 내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앞서 소개한 요범 사훈도,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한 ‘의도’로, 3천 선행, 1만 선행을 했으니 말이다.


내가 요범 사훈처럼 철저하게 선행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잘한 선행을 하면서 내가 차츰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됐다. 그 변화의 중심에 희망이 있었고, 희망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쥐어지는 모습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