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난한 자의 장신구

2024년 8월 6일 화요일 / 오만과 편견

by 글섬

허영과 오만은 종종 동의어로 쓰이긴 하지만 그 뜻이 달라. 허영심이 강하지 않더라도 오만할 수 있지. 오만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더 관련이 있고, 허영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과 더 관계되거든.

-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그러니 오만도 허영도 가난한 자의 장신구다.


이탈리아에 사는 친척이 여름 휴가를 보내려 귀국하면서 명품 스카프를 선물한 적이 있다. 명품 로고가 수도 없이 프린팅된 스카프를 받고 반색하는 나를 향해 이런 걸 휘둘러줘야 사람들이 널 무시 못해, 라고 말하며. 놀랍게도 정작 나는 누군가 나를 무시한다는 기분을 잘 느끼지 못한다. 그건 사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무시하기 때문에 느끼는 기분이 아닐까. 이건 오만인지도 모르겠다. 그 친척을 통해 여러 명품 백이 생겼고, 명품을 휘두르거나 들고 나가는 날에는 내가 명품인 듯한 착각으로 허리가 꼿꼿해졌다. 이건 허영이 분명하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은 자기 자신 그 이상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잠시 잠깐 나는 학교 선생이었다. 그래서인지 한참 동안 나는 어려서 유연한 영혼의 바탕색을 바꿀 수 있는 게 교육이라고,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다이아몬드는 똥구덩이에서도 빛을 발한다, 뭐 그런 거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건 애초에 다이아몬드니까 가능한 거 아니에요? 요즘 나는 생각한다. 사람이란 그의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양태가 아닐까. 나쁜 환경과 영향을, 교육의 역할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누군가 그 모든 변수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리그로 들어서는 요소는 그 사람의 내면에 이미 존재한다고.


내가 아는 한, 사람들은 자신의 시야만큼만 본다. 나는 그에게 그 자신의 그릇만큼만 읽힌다. 일테면, 걸그룹 뉴진스 멤버가 지난 6월 그들의 일본 공연에서 부른 1980년대 일본 국민 가요 '푸른 산호초'는, 시대 문화를 읽어내야 하는 신문 기자에겐 일본 노래가 금기시되었던 고릿적 시대에 비춰 격세지감을 넘어 한국의 위상이 읽히고, 자나깨나 다이어트 생각뿐인 누군가에겐 얇디얇은 가수의 허리만 읽히고, 대중음악 당사자들에겐 복고풍 선율이 읽히는 식이다. 저게 뭐, 어쩌라고, 이런 사람도 있고. 나는 과연 내가 보는 대상의 무엇을 보고 있을까. 바로 그게 나 자신의 그릇이다.


학교든 학원이든 다양한 교육 현장에서 만났던 아이들은 분명 본질이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그들의 어머님과 거의 같은 사람이지만, 교육의 질적, 물적 양에 따라 점차 하나의 또 다른 존재를 향해 이동한다. 이 시기에 나를 어디까지 밀어붙여 봤는지에 따라 향후 나만의 '최선'이 형성된다. 백 미터를 17초에 뛰어본 아이는 18초가 자신의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7초 이상 뛸 수 있다는 자기 믿음이 생긴 아이는 17초가 기본값으로 셋팅되니까. 나는 이게 특목고나 명문대를 원하는 근본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최선을 다해 살아가므로 최선 그 자체를 확장하는 것. 긍정적인 면이다.


하지만 이는 오만과 허영, 또는 나만의 리그로 향하는 갈림길이기도 하다. 이 갈림길에서 어떤 푯말을 따라갈지는 나의 가치관에 따른다. 그러니까 평소에 품고 있던 나만의 생각. 마음이 쉽게 가난해지지 않으려면 나만의 생각이 필요하고, 이건 마음의 근력이 필요한 일이고, 근력이란 분명 길러지는 거니까...


말하다 보니 이건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 같긴 한데, 그러니까 이미 존재하는 자신만의 내면이 본질이라면, 그 본질을 기반으로 노력으로 길러지는 게 자신만의 그릇이 된다는 말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석이라는, 뭐 그런 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