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잔해

1881년 / 글섬 옮김

by 글섬

작품 배경


〈여름의 잔해(Épaves)〉는 1881년 12월 9일자 《르 골루아(Le Gaulois)》 지에 처음 발표된 소설이다.



나는 외지인들이 모두 떠난 12월의 바다를 사랑한다. 지금 나는 여름 휴양지에 나흘째 머물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리 사람들로 가득해 시끌벅적했던 이 해변 마을에는 큼지막한 장화를 신고 한 손에는 술병을, 다른 손에는 선박용 랜턴을 든 어부들만이 무리를 지어 느린 걸음으로 지나다닌다. 북쪽에서 몰려든 구름이 어두운 하늘을 바삐 떠돌고, 바람이 불어온다. 파도에 휩쓸려온 파편들로 뒤덮인 바닷가 모래 위에는 대형 그물이 펼쳐져 있다. 이제 더 이상 여인들의 멋들어진 발목 부츠들이 높은 굽으로 깊숙한 구멍을 내지 않는 해변은 초라해 보인다. 물거품이 일렁이는 차가운 잿빛 바다는 황량하고 을씨년스런 이 무한의 모래사장 위를 오르내린다.


저녁이 내리자, 어부들이 속속 도착한다. 그들은 정박한 배 주위를 오랫동안 돌아다니며 그물이며 빵, 버터 단지 등을 챙기고, 균형추를 바닷물 속으로 던진 다음 돛대 끝에 매달려 있던 작은 등불을 들고 배에서 내려 밤길로 사라진다. 마지막 어부가 떠날 때까지 남아 있던 아내들 무리가 선잠이 든 마을로 되돌아가며 내는 목소리가 음산한 거리의 무거운 침묵을 뒤흔든다.


나 역시 마을로 돌아가려 할 때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칙칙한 외투에 파묻힌 그는 혼자였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서는 모래사장의 광대한 고독을 훑어보더니 뭔가 다른 존재를 찾는 듯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보더니 내게 다가와 인사했다.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그가 내게 뭔가 말하려는 순간, 다른 사람들이 나타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세 딸들이었는데 추위를 덜기 위해 꼭 붙어 걸어왔다. 그들은 낡은 레인코드 속에 몸을 웅크린 채 눈과 코만 남기고 온통 목도리로 휘감고 있었다. 아버지는 머리 위까지 둘둘 휘감아 올린 여행용 담요 속에 파묻혀 있었다.


혼자 걸어왔던 남자가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은 굳건한 악수를 나눈 뒤 문 닫힌 카지노의 테라스 주변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떠난 바닷가에 이 사람들은 무슨 연유로 남아 있는 걸까? 이들은 지난여름의 잔해이다. 해변마다 이런 사람들이 존재한다.


남자는 해수욕객들 사이에 유명 인사이다. 이런 사람들은 한여름에 해수욕장에 도착해 딱히 만날 친구나 먼저 도착한 지인도 없이 그저 해변을 돌아다니며 해변의 모든 얼굴과 이름 들을 익히고 모든 사연과 구설수들을 파악한다.


해수욕객들은 무리를 지어 해변을 돌아다니다, 갑자기 다른 해수욕객들 사이에서 어떤 남자를 발견한다. 그 남자는 상당한 유명 인사처럼 보인다. 긴 머리에 베레모를 쓰고 재킷 칼라에 잉크도 살짝 묻어 있다. 그는 마치 정신적으로 중요한 일에 전념하고 있는 듯, 멍한 눈으로 바삐 걸어간다. 그는 해변이 제 집처럼 익숙하고 편안해 보인다. 말하자면 그는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


그러면 그를 발견한 사람이 같이 걷고 있던 친구의 팔을 붙잡으며 “리부알(Rivoil)이야.”라고 말한다. 친구가 순진하게도 리부알이 누구냐고 물으면, 남자를 알아본 사람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친구를 쳐다보며, 도대체 넌 어디서 온 거냐고, 어떻게 바이올리스트 리부알을 모를 수 있냐고, 그건 너무 심하다고, 저런 일류 예술가를 모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타박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약간 무안해져 입을 다문다.


5분 뒤, 키 작고 못생긴 남자가 나타난다. 안경을 끼고 뚱뚱한 남자는 더럽고 멍청해 보인다. 이 남자가 바로 유럽 전체가 알고 있다는 철학자 프로스페 글로스(Prosper Glosse)이다. 독일 바바리아(Bavière) 사람이거나, 독일어권 스위스인이라고 하는 그는 출신 덕분에 프랑스어 저서를 집필할 정도로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단다. 방금 전 바이올리스트를 몰라본 친구는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이 남자의 생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척한다.


그리고 또 다른 두 명의 남자를 발견한다. 한 남자는 무명 일간지 기자이고, 다른 남자는 편집장인 부탱(Boutin) 씨로 철도사업부 장관이란다. 가장 중요한 행정관들 중 한 사람으로, 국가 건설사업 책임자이다.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국가 건설사업 허가를 얻을 수 없다.


이렇듯 요직의 유명 인사들이 12년 전부터 해마다 동일한 기간에 해변에 정기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일부 해수욕객들은 해마다 같은 해변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그들이 찾은 해변을 오가는 온갖 유명 인사들의 명성도 이전 여름에서 다음 여름으로 전해진다.


해수욕객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부류가 딱 하나 있는데, 그들은 바로 한림원 회원들이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이들은 휴양지 곳곳에 포탄처럼 퍼져 있어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 해수욕객들은 항상 유명 인사와 마주칠 것에 대비하고 있는데, 아무도 모르는 한림원 회원의 등장은 혼란을 야기한다. 누가 누군지 알아내느라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누가 누군지 몰라서 관심은 더욱 증폭된다. 이들이야말로 난적이다. 그리고 이내 유명 인사와 고위급 공무원 사이에 알력 다툼이 벌어진다.


해수욕객들이 모두 떠난 해변에 한 남자와 한 가족이 남아 있다. 며칠 동안 이 남자는 이 가족에게 여전히 유명 인사로 존재할 것이다. 남자로선 그거면 충분하다.


이웃 마을에서 온 가난한 이 가족도 언제나 늦도록 해변에 남아 있다. 결혼 적령기의 세 딸들은 해마다 여름이면 이 해변을 찾는다. 보타네(Bautané) 집안의 그녀들도 이 해변에서는 남자만큼이나 유명하다. 그녀들은 마치 청어잡이 계절의 뱃사람들처럼 벌써 10년 동안 여름마다 남편을 낚으러 해변에 나타났는데, 심지어 10년 동안 낚지 못했다. 이제 그녀들은 제법 나이가 들었다. 그녀들의 나이를 아는 사람들은 여태 남편을 구하지 못한 그녀들의 처지를 개탄하며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아주 상냥한 여자들인데 말이지!”


그리고 해마다 가을이 오면 우아한 사교계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 이 가족과 이 남자가 이렇게 또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꿈이 살아 있는 이 해변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한두 달 더 머물며 매일 만난다. 가족은 남자에 대해 마치 빅토르 위고(Victor Hugo)에 대해 말하듯 얘기한다.


남자는 종종 텅 빈 호텔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그는 잘생기지도, 젊지도, 부유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는 이 해변에서만큼은 바이올리스트 리부알 씨이다. 누군가 그에게 그의 명성이 기다리는 파리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물으면 그는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한다. “아! 저는 고독한 자연을 미치도록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변이 텅 비었을 때를 가장 좋아하죠.”


나를 알아본 어부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그는 이제 이 해역에 청어가 희귀해져서 어획량이 시원치 않다고 푸념한 뒤, 해변을 산책하고 있는 보타네 가족과 남자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리부알 씨가 보타네 자매들 중 막내와 결혼할 예정이라는 걸 아시냐고 내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남자가 가족들 뒤로 몇 걸음 뒤처져 막내딸과 단둘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생의 낙오자들에 대해, 길을 잃은 이 슬픈 존재들에 대해,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버린 뒤인 가을의 이 결혼에 대해, 이 가련한 여인이 포용해준 가짜 유명 인사에 대해, 그가 아니었다면 처녀로 늙어갈 뻔한 이 가련한 여인에 대해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졌다.


해마다 여름이 끝나면 버려진 해변에서 이 비슷한 결합들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어느 시인도 ‘젊은 여인들이여, 가라, 가서 파도 곁에서 남편을 구하라’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달이 하늘로 높이 솟아오르며 파도 거품 위로 창백한 달빛을 쏟아 부었다. 단조로운 파도 소리가 사념을 밀어내고, 땅과 바다, 하늘의 무한한 고독으로부터 거대한 슬픔이 밀려든다.


갑자기 젊은 여인들의 목소리가 나를 깨운다. 키가 큰 두 젊은 여자가 바다를 바라보고 서서 큰 소리로 떠들고 있다. 그녀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나는 그녀들이 영국인임을 알아본다. 모두가 떠난 해변에 남겨진 사람들 중에 영국 여자들이야말로 가장 요란스럽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큰 소리로 웃고 떠들어댄다. 나는 다 큰 여자들이 이렇듯 황량한 해변에서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궁금해진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도 그저 달빛 아래 일렁이는 파도와 우수 어린 기나긴 산책로의 기념물들과 그림들을 끝없이 주시하며 감상할 수 있는, 걸작으로 가득한 이 광대한 미술관에서 말이다.



▶ <Épaves> 원문 번역

▶ 참고 사이트 : 불어판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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