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공-마카르 총서 제16권
〈꿈(Le Rêve)〉은 1888년에 발표된 소설로, 『루공-마카르 총서』의 제16권에 해당한다. 졸라는 이 소설을 1888년 1월 5일에 쓰기 시작하여 8월 15일경에 완성하였다. 〈꿈〉은 격주간지인 《라 르뷔 일뤼스트레(La Revue illustrée)》에 1888년 4월 11일부터 10월 15일까지 연재되었고, 10월 15일에 《샤르팡티에(Charpentier)》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이후 1888년 12월 2일부터 1889년 1월 20일까지 《라 비 포퓔레르(La Vie populaire)》에도 연재되었다.
〈꿈〉은 1860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부터 1868년 봄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다. 졸라가 물질적인 것만 그릴 줄 알고, 상스러운 작품만 쓴다는 비난에 직면하여 쓴 소설 〈꿈〉은 현실과 꿈, 삶과 죽음이 묘한 양상으로 뒤엉켜있다. 이 소설에서 졸라는 꿈, 환상, 현실 밖의 것을 그리고 싶어 했다. 졸라는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하지 않는 소설, 모든 사람, 심지어 어린 여자들도 읽을 수 있도록 강렬한 열정은 없고, 순정적인 사랑만 있는 소설을 쓰고자 했다. 또한 사람들이 그에게 심리적인 것을 그리지 못한다고 비난하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이 그를 심리학자라고 말하도록 만들 정도로 작품에 심리적인 것을 쓰고자 했다. 그래서 열정과 의무, 사랑과 욕망의 갈등, 초현실적인 내용, 환상적인 주제들과 서술이 이 소설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꿈의 여주인공인 앙젤리크(Angélique)는 피에르 루공(Pierre Rougon)과 펠리시테(Félicité)의 네 번째 자녀인 시도니 루공(Sidonie Rougon)이 남편이 죽은 뒤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서 얻은 딸이다. 루공-마카르(Rougon-Macquart) 가문의 후손인 앙젤리크는 유전적으로 열정적인 성격을 가졌지만, 입양된 가정의 새로운 환경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사랑을 기적적인 성격의 것으로 만든다. 1893년 〈파스칼 박사(Le Docteur Pascal)〉에서 졸라는 앙젤리크를 유전적인 결함이나 유전에 의한 비극적 숙명에서 제외시킨다. 시도니 루공의 사생아로 사회복지단체에 맡겨진 앙젤리크는 사제복을 제작하는 장인 위베르(Hubert) 부부의 가정에 입양되어 도덕적인 행동과 신앙심으로 가득 찬 환경 때문에 이상주의와 신성함에 대한 숭고한 열정을 후천적으로 갖게 된다. 환경이 유전적 경향을 억압한 것이다. 환경이 앙젤리크를 정화시켰기 때문에 열정적 기질에 이끌려서 친어머니처럼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이야기는 그녀의 유전적 기질에 대한 환경의 승리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로 인해 그녀의 병은 다시 그녀를 점령하고 그녀는 죽어가는 모습으로 발견된다.
크리스마스에 온종일 내린 함박눈과 북서풍으로 보몽(Beaumont) 시는 온통 얼어붙었다. 다음 날, 눈 쌓인 새벽 거리의 성당 문 앞에 누더기를 걸친 아홉 살 소녀가 꿈틀거렸다. 아이는 배고픔과 추위로 기진맥진한 상태로 오들오들 떨며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었다. 아이가 기대어 있는 성당 벽의 기둥은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순교한 성 아그네스(Agnès)의 조각상을 받치고 있었다.
오전 8시가 되어 날이 훤히 밝자 성당 벽면의 2층에서 덧창 하나가 덜컥 열렸다. 그 소리에 아이는 눈을 떠 위를 바라보았다. 마흔 살 가량의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 몸을 기울여 소녀를 바라보다가 덧창을 닫았다. 그 집은 사제복 제조장인 위베르가 사는 집이었다. 위베르의 가계는 루이 11세 때부터 대대손손 자수를 놓으며 그 집에서 살아왔다. 모든 선조들처럼 위베르도 그 집에서 미사 때 사제가 입는 의복에 수놓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스무 살에 경탄할 만한 미모를 지닌 열여섯 살의 위베르틴(Hubertine)을 사랑했다. 그러나 위베르틴의 어머니는 극구 반대했고, 연인은 도망쳐 결혼해버렸다. 어머니는 여덟 달 뒤에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저주를 퍼부었다. 얼마 후 위베르틴은 아이를 낳았지만 곧바로 사망했다. 그 후로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렇게 아기를 잃은 슬픔 속에 24년을 보냈다.
잠시 후 1층 덧창이 열리더니 위베르가 소녀를 굽어보았다. 그리고는 위베르틴이 문을 열고 나와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움츠러들더니 그대로 풀쑥 쓰러져 버렸다. 위베르가 아이를 안고 집으로 들어가자고 권했고, 위베르틴은 새처럼 가벼운 아이를 품속에 안았다. 아이는 어금니를 깨문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집안의 온기에 아이는 눈을 떴다. 위베르틴이 따뜻한 커피 우유와 빵을 내놓자 아이는 정신없이 먹고 마셨다. 아이는 옷 속에 커다란 책 한 권을 숨기고 있었다. 그 책은 센 강 지역의 구호 대상 아동 행정실이 발급한 아동 기록부였다. 아이의 이름은 마리 앙젤리크(Marie Angélique)였고, 1851년 1월 22일 생이었다. 친부모도 모르고 신분증이나 호적 초본도 없었다. “세상에 아는 이 하나 없는” 아이는 일련번호로만 분류되어 있었다. 아이를 맡은 유모는 아이를 폭행하고 학대하다가 유모의 집으로 잠시 요양 왔던 사촌 부부가 아이에게 애정을 느끼자 사촌 부부를 따라 파리로 보냈다. 그러나 부부가 겨우 몇 달 만에 죽어버리는 바람에 아이는 부부의 친척집에서 매를 맞으며 갖은 고난의 나날을 보내다가, 어제 크리스마스에 그들이 과음으로 쓰러진 사이에 자신의 기록부를 훔쳐 내달렸다.
그렇지 않아도 자식이 없어 울적했던 위베르 부부는 앙젤리크를 견습생으로 맞아들이자고 즉시 결정했다. 그들은 보몽의 치안 판사를 찾아가 절차를 밟았다. 관할 구역의 부감독관은 부부의 집을 방문해 새 계약서를 작성했다. 열흘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나고 앙젤리크는 위베르 부부의 정식 견습생이 되었다. 앙젤리크는 정원을 향한 다락 옆 꼭대기 방에서 잠을 자며 자수에 관한 수업도 받기 시작했다.
보몽은 교회 구역과 도시 구역으로 나뉘어 완전히 분리된, 독립된 도시로 이루어져 있다. 교회 구역은 고색창연한 12세기 성당과 주교 관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고, 도시 구역은 널찍한 광장과 시청의 신식 건물을 중심으로 1만여 명의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 교회 구역 사람들은 오직 성당만을 위해 살고 있다. 오직 성당과 그 사제들을 먹여 살리고, 입히고, 돌보기 위해 물건을 제조하고 팔았다. 위베르가의 집은 아예 성당의 몸 자체에 붙어 있어 성스러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대미사가 있는 날에는 오르간의 웅장한 저음과 성가대의 목소리가 집안 곳곳을 성스러운 숨결로 채웠다.
앙젤리크는 다섯 해 동안 그곳에서 자랐다. 그곳의 삶은 수도원과 마찬가지였다. 위베르틴은 앙젤리크가 나쁜 아이들과 사귈까 봐 두려워 학교에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냈기에 앙젤리크는 오직 미사가 있는 일요일 아침에만 외출했다. “성당 벽 사이 옥죄인 듯한 그 오래된 집이 아이에게는 세계의 전부였고, 그것은 생기 없는 평온함만을 부여했다.” 위베르틴은 앙젤리크에게 철자법과 산술 방법을 가르쳤고, 여자에게 교육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앙젤리크는 자수 연습에 열중하다가도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게으름을 피우거나 고약한 대답을 내질러 위베르 부부를 당황하게 했다. 부부가 아이 안에서 요동치는 악마가 두려운 나머지 몇 번이고 기관으로 돌려보내려 결심했는데, 그때마다 아이는 회개의 눈물을 쏟아내며 간절하게 빌었기에 부부는 기꺼이 용서해야만 했다.
위베르틴은 앙젤리크에게 단념과 복종, 겸손함을 가르쳤다. 그녀는 앙젤리크에게 열정과 자만심은 질서와 권위에 도전하도록 부추기면서 불복종과 잘못된 행동으로 이끌어 처벌을 받게 만듦으로써 불행을 야기한다고 가르쳤다. 그녀는 반항적이고 야생적이며 열정적인 앙젤리크를 바느질로 교화시켰다. 부부의 절제된 사랑으로 집 전체에 애정이 깊이 스며들어 온화했고, 아이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매우 열정적이고 매우 순수한 모습으로 자랐다.
열두 살이 된 아이는 어느 날 아침, 〈황금빛 전설(La Légende dorée)〉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그 책을 통해 성녀들의 삶을 알게 된 아이는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도덕적으로 그 책 속 성인들의 삶을 모델로 삼게 되었다. 그녀에게 성녀 아그네스는 순결함, 성녀 엘리자베스(Elizabeth)는 겸손함, 카트린(Catherine)은 지혜의 롤 모델이었다. 아이는 오로지 그 책만 읽었다. 앙젤리크는 여전히 가끔씩은 그 어떤 열정에 휩싸여 난폭한 행동이나 광기를 폭발하곤 했지만 그럴 때면 스스로 수치심에 압도되어 며칠씩 병석에 눕고야 말았다.
그렇게 열네 살이 되고 열다섯 살이 되며 아이는 순진무구한 몸과 순결한 영혼의 여자가 되었다. 아이에 대한 위베르 부부의 애정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강렬해졌다. 마침내 부부는 입양을 결심했다. 입양에 앞서 위베르는 혹시 존재할지도 모를 아이의 부모를 찾아보기 위해 파리로 갔다. 사흘 동안 여러 행정 부서를 찾아다니다 어렵사리 앙젤리크의 생모인 시도니 부인에 대해 알게 되었다. 방탕하기 짝이 없었던 시도니 부인은 남편을 땅에 묻은 지 겨우 열다섯 달 만에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른 채 앙젤리크를 낳았고, 지금은 명분뿐인 레이스 가게를 운영하며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팔고 있었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은 생모였다. 그래서 위베르는 아이 엄마는 사망했다고 말했고, 앙젤리크는 그들의 딸이 되었다.
이제 열여섯 살의 앙젤리크는 아주 훌륭한 자수 공예가가 되었다. 그녀의 손아래에서 명주실과 금실은 생기를 얻었고, 그녀는 꽃에 생명을, 상징에 신앙심을 불어넣었다. 그녀가 수를 놓은 것들 중 어떤 것은 보몽 교구 전체를 떠들썩하게 해 어떤 사제가 그녀를 만나러 올 정도로 황홀했다. 그녀는 그림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이를 인정한 위베르 부부는 이제 앙젤리크의 조수가 되어 최고급의 모든 작업은 앙젤리크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준비 작업만 맡아 했다.
앙젤리크는 그녀를 미칠 듯이 사랑하고 그녀를 궁전으로 데려가줄 왕자님과의 결혼을 꿈꾸었다. 위베르 부부가 그녀의 꿈을 듣고 다정하게 웃으며 앙젤리크가 아직 인생의 고통을 모른다고 지적하자 앙젤리크는 고통은 바로 〈황금빛 전설〉의 악마라고 생각하며 “우린 자신을 이기기만 하면 돼요. 그러면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라고 순진무구하게 말했다. 외부와 단절된 생활로 인해 비현실적인 꿈을 꾸는 딸에게 위베르틴이 “우리 같은 불쌍한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겸손함과 복종 속에만 있는 거야.”라고 타이르자 앙젤리크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단박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활발하고 명랑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혼자 있기를 즐겼던 앙젤리크는 발코니의 난간에 턱을 괴고 밖을 바라보며 몇 시간씩 보내기도 했다. 4월의 감미롭고 온화한 봄기운으로 그녀의 가슴은 요동쳤다. 어떤 때엔 이유 없이 불안했고, 또 어떤 때엔 이유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행복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것은 여성으로서 꽃피는 환희의 순간이었다.”
앙젤리크가 〈황금빛 전설〉의 초자연적 세계를 통해 얻은 기적에 대한 믿음은 확고했다. 무지한 그녀의 삶은 경이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는 하느님의 은총을 확신했다. 5월의 어느 날 밤부터 그녀는 매일 밤 발코니에서 이유 없이 울었다. “그것은 드넓은 하늘과 대지와 자연 전체가 그녀의 존재 속으로 들어오며 그녀를 서서히 사로잡는 어떤 홀림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그녀의 불안은 행복에 대한 확신 속에서 감미로운 흥분으로 변했다.
스무 살의 어느 날 달빛 아래 한 남자의 그림자를 보았고, 그날 밤 꿈속에서 그녀는 그가 그녀의 침실로 소리 없이 들어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때부터 앙젤리크의 뇌리는 꿈속에서든 깨어 있을 때든 온통 그 남자로 가득했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혼자만의 황홀경으로 들떠 지냈다. 그녀는 매일 밤 그림자를 보았고, 그림자의 존재를 애타게 알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여러 밤이 지난 어느 날,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그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녀는 그를 완벽하게 알아보았다.
세 달에 한 번씩 위베르틴과 앙젤리크는 빨래터에서 빨래를 했다. 어느 날, 빨래터에서 앙젤리크는 하얀 달빛 아래 보았던 그를 보았다. 그는 유리창을 채색하는 노동자였다. 그는 그녀의 시선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녀가 그에게 넋을 놓은 사이, 그녀의 손에서 캐미솔 한 장이 빠져나가 개울의 급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그는 작업대에서 내려와 재빨리 달려가 캐미솔을 건져냈다. 앙제리크가 환히 웃었고,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그는 얼이 빠져 버렸다. “그것은 찬란한 햇빛을 머금은 건강과 기쁨이었다.”
다음 날에 빨래를 널러 다시 빨래터로 간 앙젤리크 앞에 그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을 펠리시앵(Félicien)이라고 소개했다. 앙젤리크는 펠리시앵과 함께 빨래를 널며 자신의 일상생활과 취향을 설명하면서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그는 그녀의 목소리에 취해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유쾌하고 당당한 매력이 그의 가슴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그들은 그 어떤 구체적 희망도 없이 그저 행복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날부터 앙젤리크는 발코니를 열 때마다 펠리시앵을 볼 수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미소를 주고받는 일은 매우 달콤했다. 빨래는 세 달 후에나 다시 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행복했고,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매일 서로 눈으로 만나며 서로의 시선 속에서 서로를 알아갔고 서로 사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펠리시앵은 조금씩 참을성을 잃게 되어 담으로 바짝 다가왔다. 앙젤리크는 사람들의 눈에 띌까 두려워 발코니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자 그는 그녀를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기 위해 성당의 벽을 타고 예배당 위로 나 있는 테라스에 올라가 있거나 용마루 사이에 솟아 있거나 부서진 헛간의 골조 위에 서 있어 그녀를 경악하게 했다. 그러자 그 어떤 불안이 그녀의 마음속에 일기 시작해 그녀는 사흘 동안 발코니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약국이든 설탕 가게든 그녀가 가는 곳마다 나타나기 시작했다. 앙젤리크는 그의 이런 대담함에 자신이 분노했다고 믿었다.
앙젤리크는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 빵을 나눠주거나 스프를 끓여주며 남몰래 도와주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가 그들에게 금화나 은화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빵을 나눠 주러 갔던 앙젤리크에게 한 거지 여자가 울면서 신발을 원했다. 앙젤리크가 당혹감으로 쩔쩔매고 있던 바로 그때, 그가 나타나 신발 가게에 주문해두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당혹감에 서둘러 달아나기 시작한 앙젤리크를 그가 쫓아갔다. 개울가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 그녀에게 그는 사랑을 고백했다. 그녀는 두려움에 휩싸여 차가운 개울 속을 달려 도망쳤다.
앙젤리크는 죄를 지은 것만 같았다. 자신이 뭔가 잘못해서 자신의 순수함을 지키지 못한 것 같았고, 부모에게 그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도 죄인 것만 같았다. 온갖 말과 행동이 혼란스러웠다. 사랑한다는 그의 말은 온통 두려움뿐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그를 사랑하는지 어쩐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심장이 터질 듯해 죽을병에 걸린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자수 주문을 핑계로 그녀를 찾아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위베르 부부는 그를 그녀에게 안내해 직접 작업을 설명하게 했다. 그가 보몽 도시 구역 부인들의 주문이라며 주교님을 위한 모자에 수를 놓아달라고 내놓은 그림은 성 아그네스였다. 그가 직접 그린 그림이었다. 그러나 앙젤리크는 죄의식으로 작업을 거절했고, 당황한 그는 무려 2천 프랑을 제시했다. 앙젤리크는 작업을 수락했고, 펠리시앵은 작업 과정을 지켜보고 싶다는 핑계로 그녀를 만나러 왔다. 그는 이제 그녀를 얻지 못하면 곧 죽을 것만 같았다. 자수를 놓는 그녀의 모습은 더 없이 아름다웠지만 그는 그녀의 냉랭함이 서운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승모 작업도 어느 정도 진척되었다. 닷새 뒤면 승모를 완성할 것이었다. 그 사이 앙젤리크는 매일 밤 불안함으로 괴로워하다 어느 밤 돌연 펑펑 울어버렸다. 그녀는 그를 죽도록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면 〈황금빛 전설〉의 성녀들이 화를 낼 것 같았다. 그를 사랑한다는 비밀이 가슴을 짓눌러 아침이 되면 그녀는 다시 냉랭한 자세로 돌아왔다. 그녀는 스스로를 단죄하기 위해 그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그를 사랑하는 징벌을 내렸다. 그녀는 자신이 〈황금빛 전설〉의 여성 순교자들이 된 것 같았다.
마침내 승모가 완성되었다. 승모에 수놓아진 성 아그네스는 앙젤리크를 닮았다. 그가 그렇게 그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녀의 냉랭한 모습에 절망했다. 그는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고통스러운 심정으로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어렵사리 옮겨 그가 떠나고 문이 닫히자 앙젤리크는 자신의 방으로 급히 올라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저녁 앙젤리크는 밤새도록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슬픔이 가득한 채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그녀는 그에게 그토록 냉정하게 굴어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자정 무렵 그녀는 문득 자신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일어나 흰색 원피스를 입었다. 〈황금빛 전설〉의 성녀들이 달빛을 타고 들어와 새하얀 날갯짓으로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얼마 후 펠리시앵이 벽을 타고 발코니에 당도했다. 성녀들이 그녀의 사랑을 금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한 앙젤리크는 기쁨으로 그를 맞았다. 그날 아침에 그토록 냉정했던 그녀였기에 그는 급작스러운 행복에 넋이 빠져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고통을 두서없이 토로했다. 사랑과 뉘우침이 그녀를 휘감았다. 그는 순결한 모습의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절절하게 고백했다. 그녀는 무관심을 가장했었노라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다. 그러자 그는 용서를 구할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고, 사실 자기는 유리 채색공이 아니라고 뭔가를 고백하려 했다. 그러나 앙젤리크가 그의 입술에 손을 얹어 그의 고백을 멈추게 했다. 그는 다시금 사랑을 고백했고, 앙젤리크도 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 전부를 바쳤다. 그녀의 내면에서 불꽃이 다시 불붙었고, 그것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7월 28일, 기적의 행렬이 보몽의 거리를 통과하는 날이었다. 기적의 행렬은 보몽 교회 구역의 오래된 관습으로, 아그네스가 모든 질병을 물리쳐 준다는 경건한 믿음으로 아그네스의 입상을 드러내어 도시의 거리를 장엄하게 순회하는 행사였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거리 전체가 부산해졌다. 행렬은 5시로 예정되어 있었기에 정오부터 도시는 치장을 시작했다. 집집마다 색색의 천들을 휘장으로 내걸어 거리는 온통 생기 넘치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앙젤리크도 아침부터 흥분된 마음으로 부산하게 움직였다. 4시가 되자 북쪽 종탑의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순백의 얇은 비난 드레스로 갈아입은 앙젤리크는 별처럼 아름다웠다. 성당의 문이 열리고 성당 안쪽에 의례를 주관하는 코르니유(Cornille) 신부가 보였다. 십자가와 촛대를 든 시종을 선두로 신도들과 학생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기다리던 주민들은 각자 들고 있던 꽃바구니에서 꽃잎을 한 움큼씩 집어 어린 꼬마들 머리 위로 흩뿌렸다. 신도들에 뒤이어 사제단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그네스 성상을 뒤따라 주교가 나타났다. 예순의 나이에 비해 굉장히 젊은 주교는 눈빛이 형형했다. 앙젤리크는 주교의 얼굴이 누군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주교 뒤로 한 신부가 성모를 경건하게 들고 뒤따랐다. 그건 바로 앙젤리크가 수놓은 승모였다. 그리고 뒤이어진 행렬의 맨 앞줄에서 펠리시앵이 나타났다. 위베르 부부는 펠리시앵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펠리시앵은 주교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앙젤리크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 위에 꽃잎을 흠뻑 뿌렸다. 마침내 그가 왕자님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자마자 숨을 거두었고,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사제가 되어 버렸고 그는 한 늙은 신부 밑에서 자랐다. 게다가 그는 도시를 통째로 살 수 있을 만큼 부자이기까지 했다. 앙젤리크는 자신의 꿈이 실현되는 기쁨에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 위베르틴은 엄청난 슬픔으로 절망했다.
저녁 9시에 위베르의 집 초인종이 울렸다. 코르니유 신부였다. 자수 공예품이 매우 아름답다고 직접 말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러나 앙젤리크는 피로를 핑계로 일찌감치 방으로 올라갔다. 자신의 행복을 홀로 맛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여러 시간을 기다렸다가 자정이 되자 그를 만나러 집을 나섰다. 개울을 건너자 그녀의 예감대로 그가 있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고 가슴 가득 벅찬 기쁨으로 사랑을 말했다. 그때 펠리시앵이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그의 집으로 이끌었다.
펠리시앵은 자신의 지난 세월을 털어놓았다. 그를 어머니를 죽인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주교는 그가 신부가 되기를 강요했지만 그는 유리창을 채색하는 노동자를 택했다. 주교는 엄청난 슬픔과 번뇌를 드러냈지만 이내 포기하고 20년 만에 아들을 주교 관저로 불러 들였다. 펠리시앵은 앙젤리크로 인해 삶에 대한 왕성한 열정과 감동으로 전율했다. 그들은 서로를 알게 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서로에게 사랑받게 되었다는 기쁨에 매혹되었다.
이윽고 성당 정원 깊숙이 외진 곳에 위치한 그의 작은 집에 도달했다. 그곳은 유리 채색에 관심이 있는 그의 아틀리에 겸 주거공간이었다. 앙젤리크는 이제 그와의 결혼을 꿈꾸며 행복에 잠겼다. 앙젤리크가 결혼을 말하자 그는 잠시 주저했지만 그녀는 그들의 결혼에 추호의 의심도 들지 않았다. 〈황금빛 전설〉의 기적이 일어났던 것처럼 그들의 결혼도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다. 펠리시앵은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며 결혼을 약속했다.
새벽이 오기 전에 그녀는 돌아갔다. 그녀가 집에 도착했을 때 밤새도록 정원을 서성이며 초조하게 앙젤리크를 기다리고 있던 위베르틴을 발견했다. 희열에 들뜬 앙젤리크가 위베르틴을 보자마자 달려가 안기며 펠리시앵과의 결혼을 말했을 때 위베르틴은 눈물을 흘렸다. 위베르틴은 펠리시앵과는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앙젤리크는 돈도 없고 가문도 없는 한 어린 자수 공예인이었을 뿐이었고, 펠리시앵은 자그마치 5백만 프랑을 가진 유서 깊은 가문의 마지막 후손이었다. 주교는 자신의 이름에 자부심을 갖고 있고, 애정 행각에 대해 매우 냉혹한 사람이었기에 하찮은 자수 공예인에게 가문의 마지막 자손인 아들을 절대로 주지 않을 것이었다. 앙젤리크는 왜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위베르틴은 다시 한 번 “행복을 만드는 것은 오직 의무와 복종뿐”이라고 단언하며 포기하라고 종용했다. 그리고는 그 자신이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가 아기가 죽으면서 불행해진 이야기를 고백하며 겸손하고 복종하지 않으면 훗날 고통을 겪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앙젤리크는 자신의 사랑으로 기꺼이 죽을 수도 있었기에 위베르틴의 말에 상처를 받았다.
위베르틴은 전날 저녁에 위베르 집을 방문했던 코르니유 신부를 통해 알게 된 이야기를 딸에게 전했다. 주교는 아들을 사제로 만드는 일은 고통스럽게 포기했지만 아들이 보몽에 도착하자마자 부앵쿠르(Voincourt) 가문의 클레르(Claire) 아가씨와 정혼시켰다. 앙젤리크는 그제야 결혼에 대해 말했을 때 그가 주저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녀는 충격이 너무 커 창백해졌다. 그녀는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처음 겪는 좌절 앞에 핏기 잃은 앙젤리크는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꿈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자만심이 쓰러졌을 뿐이다. 그녀는 다시 은총을 기다리는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되돌아갔다.” 그녀는 성녀들이 도와줄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순순히 위베르틴에게 주교님의 의지에 반하는 것은 어떤 것도 하지 않겠다고, 그를 다시 만나려 하거나 그와 결혼하려 애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딸의 순종에 깊이 감사하며 위베르틴이 딸을 품에 껴안았을 때 앙젤리크는 정원의 찔레꽃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말씀이 옳아요. 찔레꽃은 장미꽃을 피울 수가 없어요.”
그리고 다시 여러 날이 흘렀다. 앙젤리크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며 외출을 삼가고 펠리시앵을 다시 만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밤이면 발코니로 나가는 일도 금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꿈은 실현될 거라고 확신했다. 단순히 기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2주가 지나도록 펠리시앵 역시 그녀를 보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위베르틴은 앙젤리크에게 자신이 주교를 만났는데, 주교는 20년 동안 외면했던 아들을 재회했을 때 그의 어머니를 빼닮은 아들의 모습에 며칠 동안 옛사랑에 대한 그리움에 새로이 고통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자신이 겪은 아픔을 아들만은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확고부동한 의지가 생겼기 때문에 펠리시앵이 아버지의 무릎에 쓰러져 앙젤리크에 대한 사랑을 허락해달라고, 끝내 반대하신다면 모든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고 그녀와 함께 멀리 떠나겠다고, 오직 사랑하게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주교는 절대로 부앵쿠르 가와의 약속을 철회하지 않을 작정이라고 단언했다. 이 얘기를 듣고 앙젤리크는 밤새도록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직접 주교님을 만나면 주교님을 통해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다음 날, 앙젤리크는 주교를 만나러 예배당으로 가서 기다렸다. 자만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마음의 그녀 앞에 이윽고 주교가 나타났다. 앙젤리크는 열정적이고도 순결한 모습으로 그가 없다면 그녀도 없고 그들은 서로의 가슴을 지녔기에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것이니 부디 그들의 결합을 막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주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참을 위엄 서린 침묵을 지키던 주교가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오직 한마디뿐이었다. “절대로 안 돼!” 앙젤리크는 바닥에 쓰러져 오랫동안 목 놓아 울었다.
앙젤리크는 주교를 만났던 일에 대해 위베르 부부에게 고백했다. 위베르틴은 딸에게 다시금 단념하라고 종용했다. 다음 날부터 앙젤리크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펠리시앵은 그녀에게 편지를 썼지만 위베르 부부가 그 편지를 가로챘다. 그러자 펠리시앵이 그녀를 찾아왔지만 위베르는 펠리시앵을 돌려보내고 그가 다녀갔다는 얘기를 딸에게 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앙젤리크는 기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 이상 행동하지 않고 순종하면 하느님의 은총이 내릴 거라고 믿고 있었다. 일상이 반복되었다.
빨래를 해야 할 시기가 왔고, 앙젤리크는 오랜만에 빨래터로 나갔다가 동네 아주머니에게서 주교님이 아드님을 결혼시킨다는 얘기를 들었다. 앙젤리크는 충격으로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그녀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깨고 그에게 달려가 안기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그녀 안에는 그 자신의 의지만 있는 게 아니라, “아마도 사람들이 그 안에 심어 놓은 다른 어떤 것이 있었”기에 그것이 그를 향해 달려가지 못하게 막았다.
어느 날 앙젤리크는 그녀가 돌보던 가난한 이웃들을 찾아갔다가 부앵쿠르 부인과 딸 클레르가 펠리시앵과 함께 그 이웃의 집에 있는 것을 보았다. 이틀 후에는 또 다른 거지의 집에서도 그들을 보았기에 앙젤리크는 자신이 돌보던 가난한 이웃들을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그가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클레르는 기품 있고 아름다웠다. 누가 봐도 펠리시앵과 서로 정말 잘 어울렸다.
한 번 믿음이 흔들리자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그녀는 비참한 절망의 상태로 내팽개쳐졌다. 이제 고통스러운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희망 없는 사랑 속에서 외로이 싸웠다. 가끔은 환경과 교육의 힘으로 체념의 겸손함 속에서 차분하고 냉정해지기도 했지만, 이내 그녀의 근본의 격렬한 본성으로 되돌아가 주교 관저 정원의 창살문을 부수고 도주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만약 죄악에 굴복해 버린다면 그녀는 영원한 회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격렬한 폭풍우 속에서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저녁, 펠리시앵을 다시 만나야겠다는 일념으로 집을 떠나려던 순간에 어린 시절 학대 받았던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자 “그녀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으로 오열하며 다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황금빛 전설〉에 매달렸다. 더 이상 대항할 힘이 없어졌다. 펠리시앵에게서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한다고 믿게 된 후부터 앙젤리크는 무기력 상태 속에서 신음하지 않고 은밀하게 죽어갔다. 급기야 그녀는 몇 모금의 우유 외에는 더 이상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의 존재 전체가 천천히 소멸되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위베르 부부가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앙젤리크가 실신해 있었다. 위베르는 그제야 앙젤리크가 펠리시앵을 여전히 사랑하고, 그로 인한 고통으로 죽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던 위베르는 아내에게 거짓말로 두 사람을 갈라놓았던 게 잘못이었다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위베르틴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불복종의 대가로 아기가 죽었고, 그로 인해 긴 세월 불행했다며 남편을 탓했다. 그녀는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행복하지 않다고 말했다. 위베르는 아내의 비난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울면서 외쳤다. 위베르틴이 그 자신의 불행으로 딸과 펠리시앵을 떨어뜨려 놓으면 딸아이는 죽게 될 거라고. 그러자 위베르틴은 “혹독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함께 흐느끼며 절망했다. 그리고 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날부터 앙젤리크는 방안에만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녀는 고개를 가누기도 힘들었다. 그녀로서는 펠리시앵의 사랑이 없다면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어느 날 밤, 앙젤리크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가슴이 답답해 창가로 몸을 끌고 가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황금빛 전설〉의 성녀들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는 발코니에 놓인 소파에 쓰러져 곧바로 잠이 들었다. 얼마 후 발코니 위로 펠리시앵이 그녀만큼이나 야윈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앙상하게 야윈 그녀의 모습에서 고통과 체념을 보았다. 펠리시앵의 엷은 숨결을 느낀 앙젤리크가 문득 눈을 떴다. 펠리시앵은 언제나 그녀를 사랑한다고 소리쳤다. 그는 단지 아버지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연인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순결하게 서로 껴안았다. 그를 통해 부모님의 거짓말을 알게 된 앙젤리크는 부모님에 대한 분노로 얼굴이 굳어졌다. 이제 자신의 꿈이 찬란하게 살아났으니 그들은 그들의 사랑을 누릴 자격이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에게 지금 당장 함께 떠나자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오로지 두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그녀의 온몸은 격정의 기쁨으로 소진되어 갔다.
그러나 어떤 미련이 그녀를 휘감았고, 그녀는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여 발을 떼지 못했다. 펠리시앵은 이를 눈치 채고 그녀를 재촉했다. 그러나 그녀는 급작스럽게 본능적으로 반항했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멀리 떠나 함께 찬란한 삶을 누리고 싶었는데, 간절히 그러고 싶었는데, 이젠 그 일이 그녀에게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이미 너무 늦었다. 오랜 시간 고통을 감내해오면서 이젠 열정과 자만심이 아니라 복종하는 것이 그녀의 기쁨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성녀들을 떠올리며 “남편의 첫 입맞춤에 새하얀 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며 처녀로 죽으리라”고 외쳤다. 펠리시앵이 그건 꿈이고 환영이라고 환기시켰지만 앙젤리크는 여전히 복종을 원했다. 그녀는 그에게 주교님의 동의를 얻으면 그를 따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펠리시앵은 아버지는 요지부동이라며, 아버지한테 복종해 클레르와 결혼하기를 바라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그렇게 하라고 답했다.
그렇게 그가 떠나고, 주체할 수 없는 오열이 그녀의 몸을 뒤흔들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침대로 쓰러졌다. 다음 날 위베르 부부가 그녀의 방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죽어 가고 있었다.
겨울의 어느 청명한 날에 코르니유 신부가 그녀에게 임종의 성체 배령을 시켜주었다. 아침에 다녀간 의사는 그녀가 그날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밤이 깊어지고, 주교가 코르니유 신부와 함께 앙젤리크의 종부 성사를 위해 도착했다.
앙젤리크를 만나고 돌아간 다음 날에 펠리시앵은 아버지와 혹독하게 충돌했다. 오직 아버지의 허락 하에서만 그와 결합하기를 원하는 그녀의 복종과 체념으로 죽어가고 있다며 간절하게 승낙을 간청하고 또 간청했다. 그러나 주교는 오직 한마디 말뿐이었다. 절대 안 돼! 그러자 흥분한 펠리시앵은 아버지를 향해 배신자와 살인자라는 심한 말을 내뱉고 달아났다.
이틀이 지난 뒤 펠리시앵은 앙젤리크가 종부성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통에 휩싸인 그가 아버지를 찾아갔고 주교는 순순히 아들의 뒤를 따라 앙젤리크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차마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계단참에서 무릎을 꿇었다. 앙젤리크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주교는 종부성사를 진행했다. 방 밖에서는 펠리시앵이 계속 흐느끼고 있었다. 주교가 하느님께 그녀의 죄를 사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그녀에겐 죄가 없었다. “그녀는 오직 열정에 대항하는 복종의 투쟁 속에서만 눈물을 흘렸을 뿐이다.”
의식이 끝났지만 앙젤리크는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주교가 침대로 다다가 앙젤리크의 손을 열어 타오르는 양초를 끼우려 하는 순간, 미동도 하지 않던 그녀의 손이 가슴께로 움직였다. 그 순간, 주교는 엄청난 전율에 사로잡혀 무너져 버렸다. 그는 앙젤리크가 그의 무릎 아래 쓰러져 흐느꼈던 그날부터 이 아이의 순결함과 당당함에 이 아이를 사랑했던 것이다. 주교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로 그 순간, 앙젤리크가 눈을 떴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 일어나 앉았다. 기적을 목도한 주교는 기도문을 반복했다. 앙젤리크는 촛불을 받았다. 마치 기적처럼 침대가 강렬한 빛으로 감싸이더니 방 전체가 눈처럼 새하얀 빛을 띠었다. 그 한가운데 앙젤리크가 한 송이 백합처럼 밝고 밝은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펠리시앵이 벌떡 일어나 하늘이 내린 은총에 감읍하며 침대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앙젤리크의 손을 잡았다. 주교는 팔을 크게 움직여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로 축복을 내렸고 위베르 부부와 코르니유 신부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결혼식은 3월 초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앙젤리크는 환희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그녀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결혼식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펠리시앵은 매일 오후 그녀를 보러 왔다. 앙젤리크는 명랑하고 쾌활한 모습을 보였기에 회복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밤이면 몽상으로 이끌려갔다. “그녀는 오직 그녀의 꿈이 실현되기 위해 기적이 지속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미 죽었지 않은가?” 이제 그녀는 자신의 육체를 느낄 수조차 없게 되어 순수 열락의 세계로 날아다녔다.
어느 날 그녀는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고 간청했다. 그날 저녁 주교가 그녀를 방문했다. 주교는 그녀의 눈을 보고 모든 것을 이해했고 결혼식 날짜를 4월 중순으로 결정했다. 두 주일 동안 결혼 준비로 도시 전체가 들떴다. 최고로 값진 보석과 다이아몬드가 준비되었고 웨딩드레스에만 세 사람이 동원되었다. 무엇보다, 앙젤리크의 요청으로 엄청난 자선이 준비되었다. 펠리시앵은 주교 관저 뒤 오래된 저택을 사서 화려하게 꾸몄다.
마침내 결혼식 날 아침, 앙젤리크는 가장 먼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온 몸의 피를 짜내어 활기를 가장하며 걷기 시작했다. 10시가 되자 오르간이 웅장하게 울렸고, 밀집한 군중 사이로 앙젤리크와 펠리시앵이 주 제단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온통 하얀 레이스로 뒤덮인 앙젤리크는 너무도 사랑스럽고 성스러워 군중의 감동과 경탄을 자아냈다.
장엄한 예식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앙젤리크의 꿈이 실현되려는 것이다. 이 최후의 시간에 그녀는 완벽했다. “출생의 죄악이 완전히 씻긴 그녀는 극히 겸손하고 순종적인 종복으로서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자신의 포기가 너무도 기뻤다.” 성부와 성자의 이름으로 두 사람의 결합이 선포되고, 새신부의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졌다. 두 시간여 동안 찬송 미사가 이어졌고, 신랑 신부의 손에 촛불이 하나씩 쥐어진 뒤 봉헌식을 끝으로 예식이 끝이 났다.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앙젤리크와 펠리시앵은 성당 문을 향해 느리게 행진했다. 그녀는 숨이 차서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힘을 다해 펠리시앵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갠 채 숨을 거두었다.
주교가 다가가 죽은 영혼이 해방되도록 축복을 내렸다. 앙젤리크의 죽음은 슬프지 않았다. 위베르 부부는 용서받았고, “한 꿈이 완성되고 있다는 사실에 황홀한 감동을 느꼈다.” 그녀의 죽음은 승리의 비상이었다. 펠리시앵의 품에 남은 것이라곤 너무도 감미로운 온기가 남은 한 줌의 가벼운 신부 드레스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온 환영은 다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돌아갔다. 모든 것은 꿈일 뿐이다.”
졸라는 이 소설에서 현실과 꿈, 현실과 환상적인 것,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실제로 〈꿈〉은 분류하기가 어려운 소설이다. 졸라는 말하자면 한 장르의 규칙을 따르지 않았고, 그의 작품은 모순적인 미학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꿈〉은 인접하면서도 모순적인 두 담론의 기이한 혼합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저 너머 미지의 세계 혹은 꿈에 대한 질문과, 신앙과 기도로 점철된 고요하고 정적인 삶을 향한 이끌림, 우리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힘의 효과라 할 초자연적인 믿음,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한 합리적이고 유물론적인 설명이 한데 어울려 구성된 작품이다. 이러한 이중 언어의 틀을 짜는 방법으로 작가는 풍부한 자료 수집을 통해 중세적 건축과 성인들의 생애 이야기와 종교 의식을 묘사함으로써 앙젤리크의 꿈을 정당화하는 어떤 환경을 조성했고, 그녀의 운명을 설득력 있게 전개하기 위해 수백 년간 삶이 정지해버린 한 지방 소도시를 배경으로 삼았다. 그리고 앙젤리크의 직업으로, 의미가 퇴색되어버린, 성직자의 제례 의복을 수놓는 자수 공예를 선택했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은 교육과 환경과 유전 사이의 메커니즘으로 한 인간의 삶을 설명하려는 자연주의 입장에 충실한 구성을 갖추게 되었고, 신앙심이 투철한 영혼들에게서 신비를 벗겨 버림으로써 신앙이, 성인들의 삶 이야기의 진정성에 대한 믿음이, 그리고 종료 의식에 대한 얼빠진 존경이 생물학적 성향과 환경에 의해 배태된 망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환경의 승리는 죽음의 요소처럼 나타나는 이상한 승리이다. 환경의 영향은 앙젤리크를 열정에 대한 거부, 굴종과 복종의 이상 속에 가두어 버린다. 그 결과, 욕망과 삶에 이르는 길이 차단되고 만다. 환경이 그녀를 옥죄는 방식, 그녀를 포기 속에 가두고 실제로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점은 소설의 비극적인 차원을 이루고 있다. 종교적인 환경이 소설의 초반에는 앙젤리크의 유전적 기질의 개선과 승화의 요소로 보인다. 그러나 소설의 결말의 최정점에서 종교적인 환경은 앙젤리크를 포기 속에 가두는 방식을 통해서 볼 때, 삶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죽음의 영역이 된다.
여기서 작가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하고 있다. 앙젤리크의 죽음은 그녀의 꿈의 실현의 실패가 아니라, 꿈의 실현의 정점으로, 따라서 행복의 최고점인 것처럼 제시된다. 그래서 꿈은 동화적이기까지 할 정도로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양상을 띠면서 결말을 맺게 된다. 앙젤리크의 최종적인 승리, 다시 말해 행복한 죽음을 통해 예수와 영원히 결합하고자 한 그녀의 꿈의 승리는 이 소설을 무미건조한 부르주아 소설의 진부함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결국 자연주의 결정론과 실험 소설의 야망과 신비주의의 합리화를 겨냥한 의도는 졸라가 창조해낸 앙젤리크의 꿈의 황홀경 속에 완전히 용해되어 버렸다. 이것이야말로 졸라가 협소한 자연주의의 논리에 얽매이는 대신 작품의 논리에 전적으로 충실했으며, 그 시대 예술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면서도 자신의 명제에 충실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소설이 당대에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닌 듯하다.
이 소설은 선악 대립의 전통적 구도를 벗어나 있다. 주인공에게 시련을 주는 것은 악이 아니라 유전으로 물려받은 기질을 억제하고 교정하는 덕성이며, 시련을 겪는 측은 물려받은 피의 뜨거운 욕망이다. 그런데 여기서 욕망은 악마적 형태로 표현되기보다는 앙젤리크의 순진무구함과 원시적 신앙심 아래 변장되어 나타난다. 그녀의 상상 세계 속에서 욕망은 훨씬 더 불안하고 도착적인 성격을 띠기도 한다. 앙젤리크는 성스러운 처녀들의 박해와 잔혹한 고문을 꿈꾸는 것이 황홀하고 감미롭기만 하다. 이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백색의 성스러운 순진무구함과의 대비 속에서 사도마조히스트적인 도착성은 그 욕망의 격렬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꿈〉은 당대의 첨단 과학이었던 생리학에 기대어 유전과 환경, 교육의 상관관계를 연구하고자 했던 자유주의 실험 소설의 야망이 현실적 삶의 허망함에 대한 철학적 전망 속에서 신비주의와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소설이다. 〈꿈〉이 탄생하던 때는 과학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동시에 신비주의가 회귀하던 시대였다. 또한, 샤르코(Jean Martin Charcot)라는 정신의학자가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작용하는 정신적 힘이 있다는 사실을 예감함으로써 프로이트의 등장을 예고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모든 진리는 자연과학을 모델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합리주의와 과학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그 시절에 사람들은 인간 정신의 리얼리티가 무엇인지를 새삼 되물었던 것이다. 이 소설은 결국 꿈이란 무엇이며, 리얼리티란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만든다. 그러나 그 결론은 쉽지 않다. 몽상과 현실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는 모두 실제적 의미를 지니며, 결국 리얼리티란 우리의 내면에서 발견하게 되는 정신적 혹은 상상적 현실의 진정성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 참고 문헌 : 〈꿈〉, 에밀 졸라 저, 최애영 역, 을유문화사
▶ 발췌 논문(분석) : 〈졸라의 『꿈 Le Rêve』에 나타난 삶과 죽음, 현실과 꿈〉, 손경애(덕성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