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짐승

루공-마카르 총서 제17권

by 글섬

작품 배경


〈인간 짐승(La Bête humaine)〉은 1890년에 발표된 소설로, 『루공-마카르 총서』의 17번째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졸라는 당시의 생물학적 방법과 사상의 영향 하에 인간의 육체를 발견하고, 욕망, 무질서, 광기, 리비도의 풍요로움을 솔직히 그려내면서 죽음과 사랑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인간의 실존에 대한 근원적 문제를 다룬다.

‘인간 짐승’이라는 모순 어법적인 제목에서도 암시되듯, 〈인간 짐승〉은 인간과 사회에 내재된 양면성을 암시하며, 인간성과 동물성이 합성된 신화적 괴물인 스핑크스를 연상시킨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거의 모두 인간과 야수의 양면을 보여준다. 광기와 폭력적 욕망의 인간 짐승들과 시간과 공간에 결정적으로 제한 받는 궤도를 오가는 열차와의 관계는 자연적, 사회적 환경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형상화한다.

〈인간짐승〉은 산업혁명의 총화(總和)라고 할 수 있는 기차와 철도가 핍진성 있게 형상화된 일종의 ‘철도문학’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졸라는 원칙적으로 기계문명이 인류를 짐승스러움에서 해방시켜 구원의 길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다. ‘범죄-인간의 야만성’과 ‘철도-문명의 이기’라는 두 주제의 결합은 현대 문명과 인간 야만성의 대립이라는 오랜 관심사가 이끈 필연적인 결과이다.

졸라는 이 소설을 위해 철도의 환경과 기계공, 운전사들을 비롯해 역장과 부역장 등 직원들에 관한 풍부한 참고자료를 수집했다. 철도 노선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1869년 2월부터 1870년 7월까지 일 년 반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걸친 이야기이다. 이 시기는 제2제정 말기로서 체제 내의 모순이 불안한 정정(政情)과 격심한 사회적 갈등의 모습으로 표출되다가, 급기야 보불전쟁을 맞아 제정 체제의 붕괴를 불러오는 스당 전투의 패배로 귀결되는 기간이다. 졸라는 제2제정 말기에 권력에 복종하는 사법부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묘사함으로써 등장인물들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기관과 공직자들의 부도덕성에 의해 행해지는 인간의 야수성 또한 함께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 자크 랑티에(Jacques Lantier)는 〈목로주점〉의 제르베즈와 오귀스트 랑티에의 차남으로, 자크의 부모는 자크가 여섯 살 때 그를 대모의 손에 맡기고 파리로 떠난다. 파리와 르아브르를 오가는 서부선 열차기관사로 일하는 자크는 16세 이후 살인욕망에 시달리는데, 졸라는 그의 병적인 살해 충동이 마카르 혈통의 비정상적인 유전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한다.



1 - 3


서부철도회사에 근무하는 루보(Roubaud)는 플라상(Plassans) 출신으로, 바랑탱(Barentin) 역에서 책임수송관으로 일하다가 사랑스러운 아내 세브린 오브리(Séverine Aubry)를 만났다. 세브린은 그랑모랭(Grandmorin) 법원장의 딸인 베르트(Berthe)와 기차를 타곤 했다. 그녀는 그랑모랭 집안에서 평생 일하다 죽은 정원사의 딸이었는데, 법원장이 그녀의 대부와 후견인을 자처해 자신의 딸과 친구로 지내게 하며 애지중지했다. 수백만 프랑의 자산가인 법원장은 도의회 의원이기도 했다. 멀리서 세브린에 대한 혼자만의 사랑을 키워왔던 루보는 어느 날 용기를 냈는데, 당시엔 은퇴하고 서부철도회사의 고위 임원이었던 법원장은 만 프랑의 지참금과 함께 세브린을 아내로 주었을 뿐만 아니라 결혼 다음날 당장 르아브르(Le Havre) 역의 부역장 자리로 승진시켜 주었다.


루보는 세브린의 유모였던 빅투아르(Victoire) 아줌마가 잠시 빌려준 방에서 세브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보 부부는 파리에 올 때마다 이 방을 사용했다. 이윽고 백화점 쇼핑을 마치고 돌아온 세브린은 기다리다 지쳐 화가 난 루보에게 새 칼을 선물로 주었다. 부부는 호젓하게 식사를 마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세브린이 어릴 때부터 끼고 있던 반지가 법원장이 선물로 준 거라고 무심코 말했는데, 지금까지 어머니의 유품이었다고 말해왔던 반지였기에 루보는 대번에 세브린과 법원장의 관계를 알아챘다. 그러자 질투로 눈이 뒤집힌 루보는 짐승처럼 흥분해서 세브린을 죽일 듯이 패댔다. 세브린은 어려서부터 그랑모랭 법원장의 욕정에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했고, 더 자라서는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하라는 대로 결혼을 했을 뿐이었다. 루보는 세브린을 깔고 앉아 안면을 강타하며 온갖 세세한 얘기를 하도록 고문했다. 세브린은 모든 것을 불었고, 루보의 분노는 결코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는 이대로는 살 수가 없었다. 루보는 불현듯 자신이 살기 위해 법원장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루보는 세브린에게 법원장 앞으로 오늘밤에 방문하겠다는 전보를 쓰게 했고, 세브린을 끌고 르아브르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가 지나가는 말로네(Malauny) 역과 바랑탱(Barentin) 역 사이의 중간 지점에 건널목이 있었다. 이 철길과 면한 오솔길 모퉁이에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외딴집이 있었는데 건널목지기인 열여덟 살 플로르(Flore)와 그녀의 어머니 파지(Phasie), 그리고 양부 미자르(Misard)가 살고 있었다. 파지는 자크의 아버지와 사촌지간으로 자크의 대모였다. 자크의 부모가 파리로 훌쩍 달아나버렸을 때 겨우 여섯 살이었던 그를 거두어 키워준 사람이 바로 파지 고모였다. 자크는 플라상에서 자라 거기서 직업기술학교 과정을 이수한 뒤 서부철도회사의 일등기관사가 되었다. 그 사이, 파지 고모는 건널목지기였던 미자르와 재혼해 첫 남편 사이에서 난 딸자식 둘을 데리고 크루아드모프라(Croix-de-Maufras)라는 궁벽한 오지에 살고 있었다.


자크는 틈이 날 때마다 파지 고모를 방문해 안부를 묻곤 했다. 고모는 남편인 미자르가 자신을 독살하려 하고 있다고 속삭였다. 미자르는 키가 작고 병색이 완연한 볼품없는 외모를 지니고 있으며, 말수가 적고 나서는 일은 없으나 상사들 앞에서는 비굴할 정도로 굽실거리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초소에서 기차가 지나갈 것임을 알리는 경보음이 울리면 미자르는 경보음을 끄고 밖으로 나와서 두 번 경적을 울려 기차가 지나갈 것임을 알렸고, 때맞춰 플로르가 달려와 차단기를 내리곤 했다.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미자르는 선로를 차단한 다음 붉은 신호등을 끄고 다음 선로를 열 준비를 하는 식이었다. 그는 초소에서 먹고 지내면서 이 일을 매일 똑같이 반복했다. 파지 고모가 작년에 아버지로부터 천 프랑의 유산을 상속받았는데 그녀가 이 돈을 내놓지 않자 그때부터 미자르가 그녀의 유산에 욕심이 생겨 그녀를 독살하려 한다는 것이 파지 고모의 주장이었다.


파지 고모의 두 딸 중에 막내딸 루이제트(Louisette)는 그랑모랭 법원장의 누이인 본농(Bonnehon) 부인의 저택에 하녀로 들어갔는데, 어느 날 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상처투성이 몸으로 도망쳐 나와 남자 친구였던 카뷔슈(Cabuche)의 집에 숨었다가 닷새 만에 열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랑모랭 법원장이 루이제트를 겁탈하려 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돌았지만, 감히 그 누구도 그런 말을 소리 높여 옮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큰딸 플로르는 남자보다 더 강인한 여자였다. 플로르의 주요 일과는 파리-르아브르 간 기차 노선의 한 지점으로 인적이 드문 크루아드모프라의 건널목의 차단기를 담당하는 건널목지기의 일이었다. 숱이 무성한 금발에 키가 크고 힘이 센 열여덟 살의 숫처녀로서 사내처럼 강한 그녀는 건널목에서 수레를 들어내 충돌을 막거나 객차 한 대를 몸으로 막아내는 등, 그녀의 괴력을 증명하는 갖가지 무용담으로 그 고장의 하나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자크는 파지 고모가 온갖 푸념을 늘어놓다가 힘없이 잠이 들자 바깥 공기를 쐬러 나갔다. 철길 반대편에는 그랑모랭 법원장의 소유인 외딴집이 한 채 있었다. 호기심으로 그 집을 기웃대던 자크는 플로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플로르는 법원장이 루이제트를 덮치려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고 알려주었고, 두 사람은 어둠 속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플로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자크를 짝사랑해왔다. 자크는 문득 욕정을 느껴 플로르를 격렬하게 껴안았다. 그러자 플로르는 숫처녀의 본능으로 저항했다. 그러다 문득 플로르가 포기하고 그의 처분에 몸을 맡겼는데, 자크는 “갑자기 그 어떤 분노에 사로잡혀 살인 충동을 느꼈다.” 그러자 그는 플로르를 그대로 버려두고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플로르는 자기가 저항했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여겨 몹시 후회했다. 한참을 내달린 후에야 진정이 된 자크는 절망과 자책감으로 오열했다. 열여섯 살 때부터 그는 내내 여자만 보면 살인 충동을 느껴왔다. 그래서 그는 여자를 멀리하며 오로지 기차에만 열의를 다하며 골방에만 틀어박혀 살아왔다. “자기 안의 다른 자신, 자기 안에 느껴지는 미친 짐승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그토록 싸움을 벌여야 했건만, 늘 제자리였다.


자크가 낭패감과 고독감에 빠진 채 멍하니 철길 옆에 서 있을 때 6시 30분에 파리에서 출발한 르아브르행 급행열차가 그 지점을 통과했다. 무심코 기차 안 승객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자크의 눈에 놀라운 장면이 포착되었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좌석에 넘어뜨려 그의 목을 칼로 찌르는 광경이었다. 뭔가 어두컴컴한 물체가 발버둥치는 피해자의 두 다리를 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기차는 순식간에 눈앞을 지나 사라졌고, 그러자 자크는 자신이 목격한 장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저 심신이 미약해져 환영을 본 거라고 치부해버리고 고모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자크는 파지 고모의 주장대로 고모의 유산을 찾아 집을 뒤지고 있던 미자르를 발견했다. 그러나 미자르는 심드렁한 얼굴로 자크에게 선로 위에 시체가 발견되어 랜턴을 가지러 왔다고 둘러댔다. 시체라는 말에 흥분한 자크는 미자르를 따라 다급히 현장을 찾았고, 얼굴을 땅에 박은 채 죽은 시체를 목격했다. 시신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로 셔츠 깃이 온통 얼룩져 있었다. 환영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신을 목격하자 자크는 살인 욕망이 증폭되었다. 그토록 간절했던 살인 욕망을 결코 실현하지 못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과,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밀고 간 살인범에 대한 찬탄이 밀려들었다. 자크는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바로 그때 플로르가 다가왔다. 그녀는 자크가 감히 손도 대지 못하는 시체의 머리를 잡고 돌려 얼굴을 확인했다. 그랑모랭 법원장이었다.


다음날, 루보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했다. 평소엔 정오까지 늦잠을 자곤 했던 사브린도 이날 아침엔 일찍부터 일어나 있었다. 오전 9시 20분, 역장이 루앙(Rouen)의 수사관과 예심판사로부터 특별실 살인에 대한 전보를 받고 공안과 함께 특별실 객차를 확인하러 왔다. 루보는 역장과 공안을 데리고 특별실 객차를 확인하러 갔다. 객차 안에는 피웅덩이가 응고되어 역겨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역장은 어젯밤 이 열차에 루보 부부가 탑승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공안이 루보에게 특기할 만한 것이 있었냐고 묻자 루보는 아내를 불러 함께 기억을 맞춰보겠다고 제안했다.


화부인 페쾨(Pecqueux)가 세브린을 불러 왔다. 세브린은 피로 물든 객실을 보고 오열했다. 루보는 일일이 세브린에게 확인해가며 지난밤에 법원장을 만났던 일을 진술했다. 루보의 말에 따르면, 그들 부부는 법원장을 만나고 급행열차를 타고 돌아왔는데, 루앙 역에서 휴게 시간에 객차에서 내렸다가 특별실 승강구에서 법원장을 만나 깜짝 놀랐다. 법원장은 급히 두앵빌로 오라는 전보를 받고 갑자기 열차를 타게 됐다고 말씀하셨고, 특별실에는 법원장 말고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바랑탱 역에서 정차했을 때 플랫폼에서 역장과 인사도 나눴으니 그들 부부가 특별실에 법원장과 함께 타고 있지 않았다는 건 그가 확인시켜줄 것이다. 그러나 진술 끝에 루보는 르아브르 축제 때문에 승강장에 인파가 엄청났기 때문에 누군가 혼잡함을 틈타서 마지막 순간에 특별실에 올라탔을 수도 있겠다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는 사이에 열차가 플랫폼에 도착했고, 기관사 자크가 내리더니 군중이 몰려 있는 특별실 객차로 다가왔다. 군중 속에서 세브린을 발견한 자크는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젯밤 살해 장면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좌중이 술렁이고, 공안이 살인범의 인상착의를 물었지만 자크는 찰나의 순간에 목격했기에 확실한 진술은 어렵다고 일축했다. 공안은 루보 부부와 자크의 이름을 소환장에 기록했다.


4 - 6


3월 둘째 주, 예심판사 드니제(Denizet)가 루앙 법원의 자기 사무실로 주요 증인들을 재차 소환했다. 삼 주 전부터 그랑모랭 사건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켜 파리까지 들끓게 했다.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제2제정 정부를 상대로 격렬한 선전전을 벌이고 있던 야당지들은 일제히 그 사건을 무기로 활용했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성실했지만 재산도 없고 이렇다 할 인맥도 없던 드니제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는 훈장을 받고 파리에 진출하고픈 욕망으로 애가 타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 사건에 자신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을 예감하고 사건의 진상 규명에 열의를 올리고 있었다. 그는 검찰 임면권을 쥐고 있는 사무처장 카미라모트(Camy-Lamotte)로부터 사건을 매끄럽게 처리해달라고 당부를 받았던 터였다. 카미라모트는 그랑모랭의 동창으로, 정치적 입지와 구설에 민감한 인물이었다.


크루아드모프라에 위치한 집의 상속인으로 세브린을 지정한 법원장의 유서가 공개되자 드니제는 유산을 노린 루보 부부의 살인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바랑탱 역의 역장이 분명 루보 부부가 특별실이 아닌 객실에 타고 있었다고 진술했으며, 희생자의 호주머니에서 회중시계와 지갑이 사라졌는데 법원장의 누이인 본농 부인은 그날 법원장이 수중에 천 프랑짜리 지폐 열 장을 지니고 있었다고 진술했기에 금품을 노린 범행으로 추정해볼 수도 있었다.


루보 부부는 소환 시각보다 일찍 도착해 대기했다. 부부는 자크가 도착하자 유난히 친절하게 굴었다. 드니제는 먼저 본농 부인을 신문했다. 드니제는 본농 부인에게 루보 부부에 대해 물었다. 매우 공정하고 솔직한 성품의 본농 부인은 세브린도 루보도 더할 나위 없이 착한 사람들이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루이제트에 대한 질문에는 가문의 명예를 생각해 루이제트와 그녀의 남자친구 카뷔슈라는 녀석이 모두 지어낸 얘기라고 일축했다.


다음으로 자크의 신문이 이어졌다. 자크는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진술했고, 드니제는 자크가 있는 자리에서 루보 부부를 불러 들였다. 두려움에 휩싸인 루보는 특별실에 한 남자가 올라타는 걸 봤다고 진술했다. 루보는 그 남자의 인상착의에 대해 자신의 모습과 정반대되는 진술을 했다. 곁에서 루보를 찬찬히 훑어보던 자크는 불현듯 그날 밤에 목격했던 살인범이 루보였다는 확신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자크는 세브린의 간절한 애원의 눈길에 마음이 흔들려 다시금 확실하게 증언할 게 없다고 진술했다.


그 다음으로 불려 들어온 사람은 놀랍게도 카뷔슈였다. 루이제트가 그렇게 허망하게 숨진 뒤 카뷔슈는 자기 손으로 법원장을 결단내고야 말 거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었다. 카뷔슈는 루보가 특별실에 올라타는 걸 보았다고 진술한 그 남자의 인상착의와 정확히 들어맞는 모습이었다. 카뷔슈는 법원장을 자기 손으로 죽이지 못한 게 한이라며 범행을 극구 부인했다. 대질신문에서 자크는 카뷔슈와 범인이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도 같다고 진술했다.


자크가 하는 진술의 무게를 인지한 루보는 아내로 하여금 자크와 친밀해지도록 했다. 세브린과 자크가 친분을 쌓으면 자크가 그들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수 없으리라는 계산이었다. 그즈음 세브린에게 강한 욕정을 느꼈던 자크는 몹시 두려웠다.


루보는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해 세브린에게 카미라모트의 자택을 직접 찾아가라고 지시했다. 예전 법원장처럼 그들 부부를 보호해줄 유력 인사를 확보하는 일이 시급했던 것이다. 카미라모트의 손 안에는 세브린이 법원장에게 보냈던 전보가 확보되어 있었다. 세브린은 법원장에게 부리던 특유의 교태로 카미라모트에게 법원장과의 친분을 생각해서라도 그들 부부를 보살펴달라고 애원했다. 카미라모트는 세브린에게 남편의 이름과 직책을 써놓고 가면 부부의 안위에 힘써보겠다며 전보와의 필적 대조를 유도했다. 세브린은 순간 등골이 오싹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글씨를 썼다. 필적은 물론 일치했다. 카미라모트는 세브린을 돌려보낸 뒤, 옆방에서 대기 중이던 드니제를 불러 들였다. 드니제는 카뷔슈가 범인이라고 단정했다. 카미라모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만일 이 사건의 진상이 알려지면 법원장의 사생활도 까발려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한 시국에 단순히 한 철도원의 문제가 아니라 부르주아계급 전체의 문제로 번질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전보에 대해서는 함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드니제에게 이번 사건만 무탈하게 마무리되면 파리로 근무지를 변경해주고 훈장도 내려질 거라고 귀띔하며 불기소처분을 제안했다.


예심판사 드니제가 증거 불충분으로 카뷔슈를 내보내고, 차츰 그랑모랭 사건이 세간의 관심 밖으로 사라져가자, 루보 부부에겐 평화가 찾아왔다. 부부는 그랑모랭 법원장의 유산인 크루아드모프라의 집을 가구들과 함께 통째로 팔아버리기로 하고, 집 앞에 매물을 알리는 광고문을 붙이고 미자르 부부에게 열쇠를 맡겼다. 루보는 법원장을 살해할 때 금품을 노린 살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시신에서 탈취했던 지폐 만 프랑과 회중시계를 집안 바닥 마루의 쪽매널을 들어내 숨겼다. 부부는 그 부분이 마치 납골당이라도 되는 냥 그 부분만 피해 다녔다. 루보는 그 돈을 한 푼이라도 쓰거나 그 시계를 파느니 차라리 굶어죽겠노라고 되뇌었다. 루보는 처음엔 자크가 그들 부부에게 불리한 증언이라도 할까 봐 자크와 친분을 유지하려 애썼는데, 나중엔 법원장 살해 후부터 아내와 부쩍 어색해진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자크를 정기적으로 불러 식사를 함께 했다. 살해 후부터 루보는 집에 가지 않고 혼자서 역 주변을 배회하곤 했다. 살인으로 인해 루보는 “마치 그의 심장의 피가 그자가 흘림 모든 피를 받아 뻑뻑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무력감에” 휩싸였다.


처음엔 별다른 감정이 없었던 세브린은 자크가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점차 자크에게 애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두 사람은 밖에서 따로 만났고,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되고 점차 깊은 연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자크는 본인 자신도 의아하게 여겨질 만큼 여인에 대한 살해 욕망이 사라진 것을 느끼게 되었다. 자크는 세브린이 자신을 치유해주었다고 여겼고, 세브린은 난생처음으로 열렬히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서 느끼는 욕망에 짜릿함과 해방감을 느꼈다. 10월이 되자 세브린은 무릎 통증을 치료하러 간다는 핑계로 매주 금요일마다 자크가 운행하는 아침 6시 40분 파리행 급행열차를 타고 파리로 가서 하루 종일 자크와 함께 지내다가 오후 6시 30분 급행열차로 돌아왔다.


자크와 세브린의 밀회가 4개월째 접어드는 동안 루보는 도박에 탐닉했다. 그는 퇴근하자마자 곧장 도박장으로 달려가 새벽이 되어야 귀가했다. 그렇게 도박이 이어지며 빚이 늘어갔다. 루보는 세브린과 자크의 관계를 짐작하고 있었지만 괘념치 않았다. 그에게도 열정을 다할 도박이 있었던 것이다. 루보의 도박 빚으로 인해 살림살이가 옹색해지자 서로 무관심했던 부부는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12월 초순, 어느 날 밤에 루보는 새벽에 귀가해 만 프랑을 숨겨둔 마루의 쪽매널을 들어내고 돈을 꺼냈다.


7 - 10


어느 날 금요일, 아침 6시 40분 파리행 급행열차가 출발 대기 중인 철로 앞에는 밤새 내린 엄청난 양의 함박눈이 쌓여 있었다. 자크가 라리종(la Lison)이라는 여자 이름을 붙여 애지중지 관리해온 기관차가 김을 내뿜으며 출발을 알리는 호각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세브린이 객차로 올라탔다. 앞쪽에 제설장치가 달린 라리종호는 쌓인 눈을 거뜬하게 헤치며 순조롭게 달려갔다. 그러나 고원지대를 지나며 라리종호는 점차 지쳐갔다. 라리종호와 계속 함께 일해 왔던 기관사 자크와 화부 페쾨는 라리종호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뻣뻣하게 굳어가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참호 지대가 나타났을 때 라리종호는 마침내 눈 속에 파묻혀 멈춰 서고야 말았다. 눈을 치워야만 운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자크가 여객전무를 통해 구조 요청을 보내고 페쾨와 함께 눈을 치워보려 쩔쩔매고 있을 때 철길 옆 둔덕을 따라 플로르와 미자르가 두 남자를 대동하고 다가왔다. 그들은 구조를 요청하는 기적 소리를 듣고 달려오는 길이었다. 추위가 매서웠기에 자크는 플로르에게 선로의 제설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세브린을 비롯해 몇몇 승객들을 미자르의 집으로 피신하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플로르는 다른 승객들은 부엌으로 안내해 자리를 마련했고, 세브린만 파지가 누워 있는 방에다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사실 플로르는 자크가 운전하는 기차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정탐해왔기에 매주 금요일마다 자크와 세브린이 그들의 밀회를 위해 파리를 왕복할 때 급행열차를 타고 가는 세브린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결국 그날, 승객들 사이에서 세브린을 발견하고 지금까지 자신이 느꼈던 불안감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확인했다. 그리고 잠시 후 미자르의 집에 잠시 들른 자크가 파지의 방에 따로 대기하던 세브린과 짧지만 뜨거운 키스를 나누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한없는 회한 속에서 그녀는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과 더불어 세브린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


기차는 밤 10시 40분이 되어서야 겨우 파리의 역에 들어섰다. 페쾨는 그의 아내 빅투아르가 발목이 다쳐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바람에 부부의 방이 비어 있으니 세브린에게 자신의 숙소를 사용하라며 열쇠를 넘겨주었다. 그 방은 바로 루보에게 법원장과의 관계를 들키고 흠씬 두들겨 맞았던 그곳이었다. 그 방에 들어서자 세브린은 예전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자크에게 모든 사실을 남김없이 털어놓고 싶은 욕구가 불같이 치밀어 올랐다. 결국 그녀는 이 방에서 루보가 구타한 상황과 그랑모랭의 살해 과정을 사실적인 묘사로 고백했다. 루보가 법원장과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을 벌일 때 세브린이 법원장의 두 다리 위로 몸을 던져 살인을 방조했고, 살해 후 달리는 기차의 옆구리 난간을 붙잡고 객차의 발판을 통해 간신히 객차를 이동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 고백을 듣고 다시 살인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에 사로잡힌 자크는 세브린에게 살인의 느낌을 상세하게 말해달라고 강요했다. 자크는 다시 살인의 환영에 빠지고 결국 살해의 욕망이 어느 때보다도 맹렬히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열렬히 사랑하는 세브린의 하얀 목을 보는 순간 느닷없이 치명적인 매혹에 온몸이 사로잡혀, 그녀의 살에 칼을 깊숙이 쑤셔 박고 싶은, 거역할 수 없는 욕구가 그의 내부에서 점차로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 어느 때보다 광포하게 자크를 잠식한 살해 욕망으로 자크는 결국 세브린이 잠든 틈을 타 칼을 들고 밖으로 나가, 아무 여자나 하나 죽여 버리겠다고, 누구건 처음 마주치는 여자를 죽여 버리겠다고” 혈안이 되어 살해 대상을 찾았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는 제어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살해 욕망으로 혼미해진 채 길에서 마주치는 여자들을 쫓아다니다 빈사 상태가 되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센 강가였다. 자크는 센 강물 속으로 “또 다른 자아와 함께” 칼을 던져버렸다. 이때부터 자크는 세브린을 의식적으로 멀리 하며 커져만 가는 살해 욕망에 날이 갈수록 침울해졌다.


세브린은 이제 자크와 함께 더 큰 행복을 누리기 위해 루보가 죽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녀는 자크가 루보를 살해하기를 바랐고, 루보에 대한 살해가 늦어질수록 조급함을 느꼈다. 그녀는 루보가 죽으면 자크와 함께 자신들의 재산을 정리하여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자크는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여인에 대한 병적인 살해 욕망의 경우와 달리 루보의 살해를 망설였다. 그는 살해 계획을 세우지만 그것은 흉악한 것이고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본능의 충동에 사로잡혀 살인을 할 수는 있으나 어떤 욕구에 눈이 멀어 타산적으로, 이득을 노리고, 의도를 갖고 살인을 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되는 일이라고 살해 행위를 강하게 부인했다. 결국 자크는 세브린과 함께 노렸던 결정적인 살해 기회를 놓치고야 말았다. 이후 두 사람의 사이는 거북해졌다.


파지 고모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그녀가 먹는 소금이나 물에 독을 타왔던 미자르는 그녀가 숨을 거두자 정신없이 집안과 집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유산은 발견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시신을 지키고 있던 플로르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세브린과 자크의 키스를 목격한 후부터 그녀는 격렬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갔다. 결국 그녀는 그들이 더 이상 함께 파리로 가지 못하도록 그들을 죽여 버리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금요일 파리행 급행열차를 탈선시키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카뷔슈가 커다란 돌덩이 두 개를 실은 마차를 끌고 건널목 앞에 나타나 차단기를 열어달라고 청했다. 플로르가 카뷔슈에게 파지의 죽음을 알리자 카뷔슈는 조문을 위해 미자르의 집에 잠시 들렀다. 카뷔슈가 집안으로 들어간 사이, 플로르는 다섯 마리의 말이 이끄는 석재 운반 마차를 끌고 건널목에 다다랐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한 말들이 강하게 저항했지만 플로르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고삐를 움켜잡고 버텼다.


잠시 후 열차가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미자르도, 말들의 울음소리에 놀라 집밖으로 뛰어나온 카뷔슈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기차를 멈추게 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플로르는 두 눈을 부릅뜨고서 달려오는 기차를 지켜보았고, 찰나의 순간에 그녀는 자크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무시무시한 충돌이 일었다. 라리종호는 석재 운반차를 타고 왼쪽으로 엎어져 만신창이가 되어 밑바닥을 드러냈다. 혼비백산한 승객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고,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와 신음소리가 뒤섞여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세브린은 간신히 객차를 빠져 나와 자크를 찾아 고함쳤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플로르는 세브린이 멀쩡히 살아나 눈앞에 나타나자 자신이 사랑하는 자크를 죽였다는 극심한 고통과 자각이 밀려오면서 자신의 범행에 대해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플로르는 그제야 미친 듯이 달려가 자크를 구조해냈다.


한순간 정신을 잃고 있던 자크가 마침내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있던 플로르를 보더니 증오심과 공포감에 흠칫 물러나면서 세브린에게만 매달렸다. 자크는 플로르의 범죄를 똑똑히 목격했던 것이다. 세브린은 절대적인 안정을 요구하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법원장이 그녀에게 유증한 크루아드모프라의 집으로 자크를 들것에 실어 운반해 갔다.


두려움과 증오가 서린 자크의 시선을 접한 플로르는 깊이 절망했다. 세브린도 자크도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외딴집에 단둘이서 더 밀착되는 계기를 마련한 꼴이 돼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을 무의미하게 죽였다는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증오와 공포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죽고 싶었다. 검찰청 검사가 나와 현장을 조사하느라 미자르와 카뷔슈를 신문하는 사이, 플로르는 자살을 결심하고 현장에서 벗어나 달리고 또 달려 터널에 도착했다. 플로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여전사답게 터널을 향해 달려오는 기관차를 향해 몸을 곧추세운 채 정면으로 기관차와 부딪혔다.


플로르의 시신은 그녀의 어머니 시신 옆에 나란히 놓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방향 통행이 완전히 복구된 기차들이 서로 교행하며 지나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기차들은 그 온갖 참사와 온갖 범죄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 무심하게, 자신들의 기계적인 전능함을 과시하며 냉혹하게 지나갈 뿐이었다.” 누군가 선로 바닥에 떨어져 기차 바퀴에 으스러졌다 해도 “사람들은 즉시 시체들을 치우고 피를 깨끗이 닦아낸 다음 저 먼 목적지를 향해, 미래를 향해 다시 출발하는 것이다.”


11 - 12


자크는 크루아드모프라의 커다란 침실에 눕혀졌다. 그 침실은 열여섯의 세브린이 법원장에게 성폭행 당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세브린은 자크를 그 침실로 올려 보내고, 부상을 입은 여객전무는 일층의 작은 침실에 머무르도록 조치했다. 세브린은 의사의 지시에 따라 환자들을 세심하게 간호했다. 사고에 대해 죄책감을 지닌 카뷔슈가 세브린을 도와 힘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며 충직한 개처럼 그녀를 섬겼다.


침실에 누워 몸을 추스르는 동안 자크는 미자르의 살인에 대해 골몰했다. 그 허약하고 유순해 보이는 미자르가 기어이 건장한 아내를 독살해 허물어뜨린 것이다. 미자르는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동요 없이 의뭉스럽게 덤덤히 일상으로 돌아갔다. 자크는 건강이 회복해감에 따라 살인 욕망도 다시 서서히 되살아남이 느껴져 두려웠다.


세브린은 일층과 이층을 오가며 부상자를 돌봤다. 마침내 부상을 완전히 회복한 여객전무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내일이면 자크도 돌아가야 했다. 크루아드모프라의 집에 세브린과 자크가 단둘이 남겨지자 세브린은 자크가 루보를 죽이지 않아서 두 사람이 새로 시작할 수 없다고 푸념하면서 자크의 품을 파고들었다. 자크는 살인 욕망을 억제하느라 세브린을 더욱 더 세게 안았다. 급기야 자크는 세브린을 죽이기 않기 위해서는 루보를 죽어야만 한다고 결심했다. 세브린은 루보를 이곳으로 유인할 테니 자살을 가장해 살해하자고 제안했다. 연인은 격렬한 사랑을 나누고 깊이 잠들었다.


다음 날 세브린은 미자르에게 자신의 남편에게 몸이 아프니 크루아드모프라로 와달라는 전보를 쳐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자크는 일부러 카뷔슈가 보는 앞에서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루앙 역에서 내려 아무도 모르게 다시 크루아드모프라로 걸어서 되돌아갔다. 밤 9시 15분에 자크는 외딴집 앞에 도착했다. 이층에는 세브린이 혼자 루보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루보를 살해하라고 세브린이 준비해둔 칼이 등불 아래서 번득였다. 그 순간, 파리행 직행열차가 집 앞을 관통하는 굉음이 들렸다. 이제 루보가 바랑탱 역에서 내렸으리라. 자크가 극도의 긴장감 속에 초조하게 서성이는 동안 세브린은 병자를 가장하느라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등불 아래 훤히 드러난 그녀의 육체로 인해 자크는 온몸에 끔찍한 경련이 일면서 정신이 아뜩해졌다. 급기야 그의 영혼에 “다른 존재가, 짐승이 저돌적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그의 두 손은 여인의 육체에 흠뻑 취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크는 칼을 집어 들었다. 그는 광분한 눈으로 세브린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공포는 섹스의 그 시커먼 구렁으로 통하는 문이고, 사랑은 그 끝에 죽음이 기다리며, 더 완벽하게 소유하기 위해서는 절멸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크는 손이 시키는 대로 세브린의 목구멍에 칼을 꽂아 돌렸다. 법원장을 찔렀을 때와 똑같은 부위였고, 똑같은 격분이 동반되었다. 자크는 많은 피를 쏟으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세브린을 내려다보았다. 자크는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짐승의 소리를 들었다. “드디어! 드디어 사람을 죽인 것이다!” 그는 “끝없이 시달렸던 욕망이 완전히 충족된 기분과 함께 미친 듯한 기쁨”“자부심을 느꼈고, 수컷으로서의 자신의 지배력이 향상된 것을 경험했다.” 자크는 자신의 성취감과 함께 다른 피살자, 그랑모랭 법원장의 주검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그 주검을 목격했던 날 밤 참혹하게 죽은 남자를 보고 마치 욕정처럼 근질거리는 살해의 욕망이 격화되어 자신도 언젠가는 살인을 감행하겠다고 다짐하던 것을 기억했다. 자크의 살인은 그 욕망의 다짐이 그 내면에서 암암리에 싹을 틔우고 자라 바로 세브린의 죽음을 통해 완결된 것이었다.


그때 무엇인가 와장창 무너지는 소리에 자크는 주검을 앞에 두고 멍하니 잠겨 있던 상념에서 깨어났다. 기관차가 지나가는 소리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자크는 냅다 내달리기 시작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달아났다. 바로 이때 어느새 세브린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 카뷔슈가 세브린의 방 창문 밑을 어슬렁거리고 있다가 어둠 속에 미친 말처럼 달아나는 남자의 모습을 목격했다. 카뷔슈는 집안으로 들어갔고, 참혹하게 살해당한 세브린을 발견했다. 그는 가슴이 미어져 그녀를 부여안았고, 온몸이 피로 범벅이 되었다. 바로 이때 미자르와 루보가 도착했다.


석 달 뒤, 6월의 어느 밤에 자크는 파리에서 출발한 르아브르행 급행열차를 운행하고 있었다. 새 기관차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한시도 손을 떼지 못하고 기관차를 면밀히 주시해야만 했다. 페쾨는 그날따라 평소와 달리 매우 침울해 보였다. 지난주에 자크는 오래전부터 그를 유혹했던 페쾨의 애인 필로멘(Philomène)과 몸을 섞고 말았던지라 자꾸만 페쾨의 심기를 살피게 되었다. 딱히 필로멘을 원해서가 아니라 다만 시험하고 싶었다. 자신의 끔찍한 살인 욕구를 충족시켰으니 이제 병이 완전히 치유되었는지를. 아무런 불안감도 경련도 없었다. 자크는 이제야 평범한 남자가 되었다는 행복감에 젖었다. 화부 페쾨와는 비좁은 기관차 바닥에서 항상 함께 일해야 하는 관계였기에 서로 형제처럼 지내려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날 페쾨는 일부러 싸움거리를 만드느라 이런저런 어깃장을 놓았다.


루보 부부 사건에 대한 재판이 루앙에서 열렸다. 시간대별로 움직인 동선이 정확한 자크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다. 세브린의 피로 범벅이 되었던 카뷔슈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루보 역시 살인을 사주한 혐의로 다음날 체포되었다. 카뷔슈의 움막에서 그랑모랭 법원장의 회중시계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세브린이 열차 사고 부상자들을 간호하는 동안 그녀를 연모하게 된 카뷔슈가 세브린의 머리핀이나 속옷 같은 소지품들을 몰래몰래 가져가곤 했는데 그 와중에 멋모르고 회중시계마저 챙겼던 것이다. 게다가 루보 부부가 크루아드모프라를 취득한 뒤 공증인 앞에서 부부 중 마지막으로 생존한 자가 전 재산을 갖기로 한다는 공증서를 작성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법원장 살인 때 쓰였던 것과 똑같은 칼로 세브린이 살해되었다는 사실도 루보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때문에 예심판사 드니제는 법원장 살인 사건과 이번 살인 사건을 연결시켰고, 루보가 카뷔슈를 사주해 법원장과 아내를 살해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재판부는 두 피고인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어느 날 밤, 자크는 필로멘이 하도 보채어 인근 벌판까지 산책을 나갔다. 한여름 무더운 밤기운을 가르며 짙은 어둠 속을 필로멘과 함께 걷자니 세브린을 살해한 이후 한 번도 찾아온 적 없었던 발작이 재발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다 갑자기 필로멘이 그를 끌어당겨 풀밭에 누웠는데, 그 순간 무시무시한 충동이 일며 광분에 휩싸인 자크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내달렸다. “고통으로 미쳐버릴 것만 같은 자기 자신을 피해 달아나는” 자크의 등 뒤로 페쾨의 욕설 소리가 들리며 한바탕 격투가 벌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며칠 뒤 프로이센과 전쟁이 선포되었다. 철도원들은 군대 수송 때문에 파김치가 되었다. 어느 날 저녁, 자크는 병사들을 태운 기관차를 운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페쾨와 함께 기관차에 올라탔다. 차량마다 우겨넣은 병사들로 초만원이었다. 어느 순간 모습이 보이지 않던 페쾨가 술에 취한 채 나타나 화구에 석탄을 과도하게 투입했다. 참다못한 자크가 그를 저지하자 페쾨는 자크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자크를 덮쳤다. 두 사람은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연료가 과도하게 투입된 기차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고 또 달렸다. 어느 순간, 페쾨가 자크를 집어던졌다. 자크는 허공에 붕 뜨며 정신이 아득해지자 순간적으로 페쾨의 목에 매달렸고, 그 바람에 페쾨도 순식간에 그에게 딸려가고 말았다. 두 사람의 비명소리가 서로 뒤섞이며 아스라이 사라졌다.


이제 완전히 고삐가 풀린 기관차는 달리고 또 달렸다. 여객전무는 피곤으로 곯아떨어졌고, 밀집된 상태에서 독한 증류주로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병사들은 기관차의 광란의 질주에 흥이 나 더욱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루앙 역에서 정차해야 할 기관차가 아찔한 속도로 역을 그냥 통과해버리자 역무원들은 극도의 공포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사태의 위급함을 알리는 전보가 타전되었고, 선로에 있던 화물열차들이 차고로 대피되었다. 운전자도 없이 그렇게 여러 역을 지나도록 속도가 조금도 줄지 않은 “괴물은 캄캄한 밤을 뚫고 어딘지도 모르는 저 먼 곳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려갔다.”




분석


이 소설의 진가는 언제나 다시 돌아오고야 마는 악의 힘, 인간의 야성, 통제할 수 없는 힘, 태고적인 어떤 것, 이름 붙일 수 없는 낯선 어떤 것에 대한 질문을 바로 진보의 신념을 구가하며 기술과 자본의 눈부신 발달로 야성적 근원을 벗어났다고 자신하던 시대에 던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 소설은 인물들의 존재 이전부터 있어 온, 머나먼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살해 욕망, 인물들의 무의식 저 밑바닥에서 기회만 되면 뛰쳐나오는 자기 안의 낯선 타자인 살해 욕망의 기원, 즉 악의 기원에 대한 인식론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

〈인간 짐승〉에서 ‘인간 짐승’은 무척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탐욕과 시기와 증오에서 비롯된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의 폭력에서부터 제도적 차원의 폭력, 다시 말해 기득권의 수호와 조직의 보위를 목적으로 사용되는 국가기구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인간 자체가, 인간이 짐승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것이, 인간 문명 자체가 곧 짐승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의 야수성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은 바로 ‘죽음-죽임’의 모습이다. 글자 그대로 죽음이 난무하는 소설에서 졸라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심리적이거나 사회적인 외적 동기가 아니라 그러한 동기 이전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죽임의 본능, 다시 말해 이성이나 도덕관념으로 통제할 수도 없고 영문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대물림된 폭력”, “피와 신경의 충동”, “옛날 옛적 서로 투쟁했던 기억이 잔존”,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과 강해졌다는 기쁨” 때문에 저지르는 살해 행위, 곧 “살인의 숙명성”이다.

자크가 루보를 끝내 죽일 수 없었던 것은 도덕적인 가책이나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그를 살해해야 할 이유가 너무도 뚜렷했기 때문이다. 합리적 추론을 통해 살인에 이르는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와는 정반대로 자크에게 살인은 합리화되는 순간 배격된다. 반면 자크를 세브린의 살해로 이끈 것은 “유전적 결함”, 그러니까 “그의 존재에 생긴 뜻하지 않은 균형 상실, 균열이나 구멍 같은 것”을 통해 밀고 들어오는 그가 아닌, 미쳐 날뛰는 어떤 짐승 같은 존재, “그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며 준동해왔던 그 존재, 아주 먼 조상으로부터 대를 물려 그에게 유전된, 살인에 대한 갈망으로 불타는 그 존재”, “옛날에도 사람을 죽였고, 지금도 사람을 죽이고 싶어 안달”인 그 존재다. 자크는 열여섯 살에 그 짐승 같은 존재를 처음 알고 난 뒤부터 “자기 안의 다른 자신, 자기 안에 느껴지는 미친 짐승으로부터 도망하기 위하여” 무진 애를 쓰지만 그것은 그 존재를 달고 달리는 꼴이 되어버린 셈이어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한다. 자크의 대물림된 살인 충동은 이처럼 숙명으로 그려지면서 과학적인 차원을 벗어나 상징적이고 신화적인 차원으로 옮겨간다.

그런데, 합리적 정신의 정화라는 사법 체계는 ‘인간 짐승’을 제대로 단죄하고 근절하지 못한다. 사법 체계는 자크의 살인 충동으로 표출되는 시대의 집단의식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을뿐더러 살인 사건의 진상에 대해서도 무관심을 넘어 왜곡에 일조한다. 사법 체계는 세상이 이미 짐승으로 규정하고 “페스트 환자처럼 완전히 격리”해놓은 존재에게 체제를 위협하는 행위의 책임을 전가한 다음 그 짐승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체제의 유지에 복무한다. 세상 사람들은 루앙 법원의 배심원과 방청객이 보여주듯 짐승 같은 외양의 카뷔슈에게 죄를 묻고 미청년인 자크에게는 동정의 눈물을 바침으로써 사법 체계가 설정해놓은 구도에 동참한다. 〈인간 짐승〉은 범인의 추적이 아니라 체제의 보위를 위해 범죄를 재구성하는 사법 체계의 비루함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둔다. 〈인간 짐승〉에서 사법 체계라는, 인간이 만든 ‘제도-기계’는 ‘인간 짐승’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인간 짐승〉에서 기계는 증기기관차 라리종호로 대표된다. 라리종호는 소설 내내 때로는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한 한 마리 암말로, 때로는 신화적인 괴물의 형상(“외눈박이 거인족 키클롭스”)으로, 때로는 자크의 동반자 여성으로 그려진다. 〈인간 짐승〉에서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의 법칙’을 숙명으로 떠안은 기계-기관차는 자크의 숙명적인 살해 충동으로 대변되는 ‘인간 짐승’의 그 통제되지 않는 충동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또 하나의 ‘인간 짐승’이다.



▶ 참고 문헌 : 〈인간 짐승〉, 에밀 졸라 저, 이철의 역, 문학동네

▶ 참고 논문 :

1. 〈『인간야수 La Bête humaine』의 주인공 자끄 랑띠에Jacques Lantier 인물분석〉, 손경애(덕성여대)

2. 〈에밀 졸라의 『인간야수 La Bête humaine』에 나타난 악에 대한 담론〉, 조성애(연세대)

3. 〈소설 『인간 짐승』에 나타난 야수성의 양상〉, 이정옥(호서대)

4. 〈에밀 졸라의 『인간 짐승』에 나타난 상징적 이미지 연구〉, 이정옥(호서대)

5. 〈에밀 졸라의 『인간 짐승』에 나타난 사운드스케이프 연구〉, 이찬규(숭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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