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 글섬 옮김
작품 배경
〈여행(En voyage)〉은 1882년 5월 10일자 《질 블라스(Gil Blas)》 지에 모프리뇌즈(Maufrigneuse)라는 가명으로 처음 발표된 소설이다.
모파상은 1883년에도 내용이 다른 동명의 단편 소설을 발표한 바 있다.
사랑하는 당신,
당신은 내게 여행 중에 본 것들이나 만났던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자주자주 편지로 생생하게 써 보내 달라고 요청했었죠. 그래서 나는 당신의 바람대로, 당신이나 나에 대한 이야기는 일체 배제하고, 여행 중에 마주했던 수평선이나 사람들에 대해서만 적어 보낼 생각입니다. 이 편지가 그 시작입니다.
내 생각에 봄은 경치를 마시고 먹어야 하는 계절입니다. 가을이 사색의 계절이듯, 봄은 전율의 계절입니다. 가을 들판은 영혼으로 스며들지만, 봄의 들판은 육신을 동요시키니 말입니다.
올해 나는 오렌지나무 꽃향기를 맡고 싶어서 프랑스 남부로 떠났습니다. 나는 예루살렘(Jérusalem)과 메카(Mecque)의 라이벌이자 순례자들의 도시인 모나코(Monaco)를 가로질러 가느라 오렌지나무와 올리브나무, 레몬나무 들이 천장을 이룬 높은 산을 올랐습니다. 당신은 오렌지나무 꽃들이 만발한 들판에서 잠들어본 적이 없겠지요? 감미로운 대기가 더없는 향기로 가득합니다. 이곳은 계곡의 나라입니다. 산은 굽이굽이 움푹 패고, 굽이치는 골짜기마다 무성한 레몬나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군데군데 돌무더기로 만든 저수지로 인해 협곡이 멈춰 서곤 하는데, 인근 주민들이 돌을 쌓아 만든 빗물 저장고이지요.
나는 나뭇가지에 반짝이는 과일과 잎사귀들을 바라보며 계곡들을 천천히 올랐습니다. 그러다 문득 피로감을 느끼고 앉을 곳을 찾다가 잔디 속에 미끄러지는 몇 방울의 물줄기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근처에 샘터가 있다고 여겨 조금 더 위로 올라갔지요. 그런데 막상 올라가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저수지였습니다.
나는 그 연못가에 앉아 몽상에 잠겼습니다. 저 멀리 나뭇가지들 너머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지중해의 편린들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나의 시선은 그 광대하고 어둑한 연못 위에 머물렀지요. 수면이 너무도 고요해서 그 어떤 생물도 살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꽃을 따러 다니는 노인이더군요. 이 고장은 식물 채집으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고장이거든요. 노인은 연못가에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내게 이 불쌍한 아이들의 부모냐고 묻더군요. 내가 놀라서 그를 바라보며 무슨 아이들을 말씀하시는 거냐고 묻자, 노인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사과했습니다. 내가 물끄러미 연못만 응시하고 있기에 연못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비극을 회상하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노인에게 무슨 비극인지 말씀해 주십사 청했습니다.
그리하여 노인이 내게 들려줬던 이야기는 너무 비통하고 우울한 이야기였는데, 어찌 보면 무척 진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일간지 사회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죠. 나는 그 이야기가 그곳의 빛나는 태양과 꽃들과는 대조적으로, 그 치명적인 칠흑의 못과 함께 나의 감정에 어떤 극적인 방식으로 작용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나는 마음이 비틀렸고, 모든 신경이 동요했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당신의 방에서 이 편지를 읽을 때는 내가 눈앞에 연못을 두고 들었을 때와는 달리 그다지 끔찍하게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해 전 봄이었다. 꼬맹이 두 명이 이 연못가로 물놀이를 하러 자주 오곤 했다. 소년들이 물놀이를 하는 동안, 그들의 가정교사는 나무 그늘 아래에 누워 책을 읽었다. 그러던 어느 무더운 오후, 나무 그늘에서 깜박 잠이든 교사는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잠에서 깼다.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둘 중에 더 어린 11살의 소년이 연못가에서 선 채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연못가를 달리다가 연못에 빠져버린 형이 수면 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교사는 미처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곧장 연못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형이 수면 위로 다시 올라오더니 동생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자 어린 동생은 연못가에서 몸을 최대한 연못을 향해 굽혔고, 형은 헤엄을 쳐 연못가로 다가가려 버둥거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두 소년의 손이 서로 닿았다. 네 개의 어린 손은 서로를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아이들은 생명을 구원받은 기쁨으로 날카로운 전율을 느꼈다.
형은 어떻게든 연못가에 다다르려 버둥거렸지만 도저히 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어리고 연약한 동생이 연못을 향해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두 소년은 공포에 휩싸인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기다렸다.
동생이 온힘을 다해 형의 손을 움켜쥔 채, “못하겠어, 내가 형을 구할 수가 없어”라고 반복해서 말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갑자기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린 동생의 가냘픈 목소리는 그들 머리 위로 여울진 잎사귀들에만 겨우 가닿을 뿐이었다.
형제는 그렇게 오랫동안 버텼다. 여러 시간이 지나도록 두 소년은 똑같은 생각, 똑같은 고통을 품은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 중 하나가 기진맥진해서 손을 놓아버릴까 봐 끔찍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들은 헛되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마침내 물속 냉기에 떨던 형이 동생에게, “더는 못하겠어. 이제 갈래. 안녕”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동생은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형”이라고 울부짖었다. 밤이 내렸다. 연못 위로 반사된 별들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고요한 밤이었다.
기력이 쇠진한 형이 동생에게 자기가 차고 있던 시계를 주고 싶으니 손을 놓아달라고 말했다. 며칠 전에 선물로 받았던 시계로, 형이 가장 아끼던 시계였다. 형은 가까스로 손목에서 시계를 풀어 동생에게 건넸고, 동생은 오열하면서 시계를 받아서 바로 옆 잔디 위에 놓았다.
밤이 깊어갔다. 비참한 두 소년은 힘이 다 빠져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결국 형이 정신을 잃어가는 걸 느끼며 동생에게, “안녕, 동생아. 엄마, 아빠한테도 키스를 전해줘”라고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얼어붙은 그의 손가락이 열렸다. 형은 물속으로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혼자 남겨진 동생은 미친 듯이 형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형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어린 동생은 형을 잃은 커다란 고통에 압도되어 산속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 죽어가는 얼굴로, 부모님이 기다리는 거실로 뛰어 들어갔다. 소년은 부모님을 데리고 다시 어두운 저수지로 가던 길에 길을 잃어버렸다. 한참을 헤매던 소년은 마침내 연못을 찾아냈다.
그러나 연못의 물을 전부 빼내야 했고, 레몬나무에다 물을 대야 하는 저수지 소유주로서는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결국 다음날에야 물 위로 두 구의 시체가 떠올랐다.
사랑하는 당신, 내 말대로 흔한 사회면 기사에 지나지 않지요. 하지만 만일 당신이 직접 그 연못을 봤더라면 당신도 나처럼 형의 손을 붙잡고 있던 동생 생각에 가슴이 찢어졌을 겁니다. 그저 늘 장난치며 웃기만 했을 개구쟁이 아이들의 길고 길었던 투쟁과 형이 남기고 간 시계를 생각하면 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운명이 그보다 더 치명적인 기억을 남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친숙한 물건에 얽힌 기억보다 더 강렬한 건 없으니 말입니다. 동생이 형의 시계를 만질 때마다 끝도 없이 반복해서 떠오를 끔찍한 그 순간, 연못, 고요한 수면, 그리고 이미 죽은 사람처럼 정신이 나가고 일그러진 형의 마지막 얼굴을 생각해 보아요. 동생이 살아있는 내내, 매 순간마다, 형의 시계에 손가락 끝이 스치기만 해도 곧바로 그 순간이 떠오를 겁니다.
그래서 나는 밤이 되도록 슬픔을 느꼈습니다. 나는 연못을 떠나 다시 산을 올랐습니다. 오렌지나무가 무성한 곳을 지나 올리브나무가 무성한 곳으로, 올리브나무가 무성한 곳에서 소나무가 울창한 곳으로 계속해서 올라갔습니다. 그러다가 돌로 덮인 계곡 속에서 고성의 폐허를 만나기도 했지요. 10세기에 어느 현명한 사라센 수장이 어떤 젊은 처자에 대한 사랑으로 세례를 받았던 곳이라더군요.
주변이 온통 산들로 이어지다 눈앞에 갑자기 바다가 펼쳐졌는데, 코르시카(Corse)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광대한 하늘과 바다 위로 산꼭대기들과 수평선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일몰을 바라보면서도 가련한 두 소년밖에는 보이지 않더군요. 검은 물로 가득한 연못가에 엎드린 동생과 목까지 물에 잠긴 형이 서로의 손을 움켜쥔 채 공포에 휩싸인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오열하는 모습만이 눈에 어른거렸습니다. 그리고 기력이 다 빠져버린 형의 가냘픈 목소리가 끝없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어요. “안녕, 동생아, 내 시계를 주고 갈게.”
사랑하는 당신, 이번 편지는 너무 침울했군요. 다음 편지에는 좀 더 즐거운 얘기를 들려주도록 할게요.
5월 6일, 생트 아그네스(Sainte-Agnès)에서
▶ 〈En voyage〉 원문 번역
▶ 참고 사이트 : 불어판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