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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섬 Jan 13. 2023

영어의 굴레


     세상일은 생각만큼 간단치가 않다. 아이들을 태우거나 내려주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안전도우미라며.. 도대체 직업의 명칭만큼만 일하는 직업이란 게 있기는 한지.


     일단 셔틀 버스는 좁다. 좁은 버스 안에 열 명이 넘는, 그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한 공간에 20분 이상 밀집되어 있다는 건 말 그대로 상상초월의 영역이었다. 겨우 20분이라고? 어린아이들은 불과 몇 초도 가만히 있지 않는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세상은, 그리고 타인은 온통 그야말로 호기심 천국이니까.


     일단 어린아이들은 혼자서 안전벨트를 매지 못한다. 벨트 장력도 너무 세고, 버클의 잠금장치는 작고 여린 어린아이들의 손에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결국 일일이 벨트를 매줘야 한다. 가방도 스스로 챙기기 요원하다. 비오는 날이면 아이들의 우산을 펴고 접는 것도 대부분 내 몫이다. 하지만 이렇게 몸을 쓰는 일은 얼마든지 괜찮다. 어차피 머리 대신 몸을 쓰기로 작정한 일이니까.


     문제는 어머니들이었다. 어린아이들은 버스 안에서 벌어지는 아주 작은 일까지도 제 어머니에게는 자기중심적으로 말을 옮긴다. 어린아이들이 순수하다고 누가 그랬던가.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뿐, 전혀 순수하지 않다. 다분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다. 이제 겨우 사회화의 시작단계이기에 더욱 그렇다. 우리 엄마가 너랑 앉지 말랬어, 라는 말로 옆좌석 친구를 울리기도 하고, 단지 본인이 원한다는 이유로 친구의 가방 속에 든 책을 감쪽같이 자기 가방에 옮겨 담은 뒤 자기 책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이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서 더욱 당혹스럽다. 거짓말은 과도한 사회화의 일종이다. 아이는 진정 원한다는 사실만이 세상의 중심축이다. 자기가 원하니까 자기 것이라는 식인 게다.


     그래서 배움은 소중하다. 예절도 규범도, 심지어는 각자의 성향까지도 배워야 하는 존재가 바로 아이들이다. 그런데 배울 만큼 이미 충분히 배웠을 어머니들은 왜들 그러시는 걸까. 하느님이 인간 각자에게 일일이 존재할 수 없어 부여해주신 존재가 어머니라고 했던가. 과연 그러하다. 자기 아이밖에 모른다. 자기 아이의 말만 듣는다. 어머니가 아이의 하느님이 아니라 아이가 어머니의 하느님이다. 아이가 그토록 귀한 존재라면 더욱, 열린 귀가 필요하다.


     어쨌든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버스 안은 난리법석 대환장파티였다. 아이들이 너무 귀여웠던 나머지 너무 관대하게만 대했던 내 탓이었다. 나는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가방을 두고 내리거나 옆좌석 친구와 말다툼을 하는 선을 넘어서 주먹까지 오가는 상황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시작은 장난이지만 마무리는 장난이 아니었다. 학원과 어머니들에게서 주기적으로 전화가 이어졌다. 나로선 학원과 어머니들의 압박보다 아이들이 심리적, 물리적으로 다치는 게 정말 싫었다. 하얗고 여린 아이들의 손등이나 팔뚝에 긁힌 상처나 멍든 자국을 보는 날이면 잠도 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용단을 내렸다. 내가 속한 학원은 영어 학원이었기에 버스 안에서 영어만 사용하는 규칙을 정했다. 사실 원래도 영어만 사용하는 게 이 학원의 원칙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하지만 어른이 영어를 쓰지 않으니 유야무야되었을 뿐. 우리말로 자유롭게 말하고 다투기까지 했던 아이들에게 English Only를 강제하자면 당연히 어른의 솔선수범이 먼저다. 내가 영어를 구사하지 않는 한 아이들도 영어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대화를 영어로 구사한다니. 아놔... 이 가없는 영어의 굴레여... 이십 년 넘게 번역을 해온 것과 영어로 말한다는 건 엄연히 전혀 다른 문제다. 원래도 회화 울렁증이 있는데다, 내 머릿속 외국어들은 죄다 문어체, 그것도 18, 19세기 문어체이니 말이다.


     그렇게 영어와의 사투가 시작되었다. 영어만으로 대화를 한다는 건 뭔가. 어휘력의 한정을 뜻한다. 예상대로 아이들은 대화가 줄었다. 대화가 줄자 싸움은 사라졌다.


     그런데 아이들을 상대로 어떤 규칙을 세운다는 건 결국 지구력 싸움이다. 아이들은 끝없이 리뉴얼되는 존재다. 오늘 멀쩡히 영어로 대화하던 아이도 다음날이면 우리말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아무리 영어를 잘하는 아이라도 영어보다는 우리말이 편하니까. 이 지구력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는 유일한 방법은 누구보다 내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아놔... 


     그리하여 나는 때아닌 영어회화 공부에 돌입했다. 세상 열심히 했다.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다름 아닌 나 자신의 변화. 그때까지는 그저 아이들이 귀여울 뿐, 아무런 의미도 없다못해 겨우 이제 뭔자, 싶었던 일에 재미가 생겼다. 아이들과 한 마디라도 더 유창하게 영어로 대화하기 위해, 무엇보다 잘못된 영어표현을 피하기 위해 매일같이 공부하고 쉐도잉하는 과정이 다소 무료했던 일상에 새로운 활력을 부여했다.


     자꾸만 이게 뭔가, 싶었던 일에서 내 스스로가 나를 구원해낸 셈이다. 음, 확대 해석 맞는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원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로 인해 생기를 느끼는, 어쩔 수 없는 구름 인간, 그게 나인 걸 어쩌겠는가. 음, 뭐, 괜찮다. 어차피 나는 나로서만 존재 가능하니까. 그래서 마르셀 프루스트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이렇게 말했지 않은가. 인간에게서 가장 피하기 힘든 표절은 바로 자기 표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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