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백선희 옮김

by 글섬


작품 배경


〈두려움(La Peur)〉은 1882년 10월 23일자 정치문예 일간지 《르 골루아(Le Gaulois)》 지에 처음 발표된 소설로, 이듬해에 출판된 단편집 〈멧도요새 이야기(Contes de la bécasse)〉에 수록되었다. 이후 1892년까지 열 개의 잡지에 게재되었다. 1884년 7월 25일자 《르 피가로(Le Figaro)》 지에는 동일한 제목의 내용이 다른 소설이 발표되기도 했다.


두 가지 이야기로 구성된 액자 소설 형식의 이 소설은 J. K.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에게 헌정되었다.



커다란 배는 지중해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묵직한 선박이 빠르게 지나면서 일으킨 새하얀 물거품이 저녁식사를 마친 뒤 갑판 위에 다시 오른 승객들 뒤로 달빛을 휘저어 마치 달빛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배는 아프리카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 승객들 사이에 서서 시가를 피우던 선장이 불쑥 저녁식사 때 나눴던 화제를 다시 꺼냈다.


언젠가, 그의 배가 바다의 공격을 받고 암초를 들이받은 채 여섯 시간이나 버티는 동안 그는 겁이 났다고 고백했다. 저녁 무렵에야 영국 석탄 운반선이 그의 배를 발견해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러자 그을린 얼굴에 근엄한 표정의 키 큰 사내, 끊임없는 위험을 무릅쓰고 낯선 나라들을 숱하게 횡단해 보았을 그런 사내, 강인한 용기로 단련되어 있으리라 짐작되는 침착한 눈의 사내가 선장에게, 호방한 사람은 임박한 위험 앞에서 결코 겁내지 않는 법이라고 말했다. 흥분하고 들뜨고 불안할 뿐, 두려움은 다른 거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선장이 웃으며, 자기는 분명히 겁이 났었다고 거듭 말하자 구릿빛 얼굴의 남자는, 두려움이란 그 어떤 무시무시한 것, 영혼이 붕괴되는 것 같고, 생각과 마음이 흉측하게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은 끔찍한 감정이라고 말했다. 진짜 두려움이란 오래된 초자연적인 공포에 대한 무의지적 기억 같은 것이며, 그 어떤 공격이나 죽음, 우리가 알고 있는 온갖 형태의 위험 앞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막연한 위험을 마주하고 어떤 불가사의한 영향력 아래 놓인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할 때 일어나는 감정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그 사내는 바로 그런 두려움을 10여 년 전 대낮에 직면했던 적이 있었고, 지난겨울 12월의 어느 밤에 다시금 그런 두려움을 느꼈었다며 그의 체험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온갖 위험과 숱한 죽음의 모험을 겪어 봤다. 강도들이 그를 죽은 걸로 간주하고 버린 적도 있었다. 아메리카에서는 폭도로 교수형을 언도 받기도 했고, 중국 해안에서는 선박 갑판에서 바다로 내던져지기도 했다. 그런 막다른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그는 연민도 후회도 없이 즉각 각오를 다질 뿐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이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는 진정한 두려움을 아프리카에서 느꼈다.


그가 친구와 함께 아프리카 남쪽의 큰 모래언덕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였다. 황사가 되어 꼼짝 않는 파도의 고요한 폭풍을 헤치며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의 대양을, 가차 없이 내리꽂히는 타는 듯한 태양의 불길을 받으며 기어올랐다가 다시 내려오고 다시 오르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말들은 숨을 헐떡이며 무릎까지 푹푹 빠져 가며 오르내렸다.


그와 친구 뒤로 원주민 기병 여덟 명과 낙타몰이꾼을 태운 낙타 네 마리가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더위와 피로에 기진맥진했고, 타는 듯한 사막과 갈증에 메말라서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일꾼들 중 한 명이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모두가 멈춰 섰다.


방향은 알 수 없지만 가까운 어딘가에서 모래언덕의 신비로운 북소리가 울렸다. 북소리는 커졌다 잦아들기를 반복하며 불가사의한 울림을 또렷하게 이어갔다.


아랍인들은 겁에 질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아랍어로, “죽음이 우리 위에 와 있어.”라고 말했다. 그때 갑자기 그의 친구가 말에서 떨어지며 머리를 땅에 박았다. 일사병이었다.


그리고 두 시간 동안 그가 형제나 다름없는 그 친구를 살리려고 헛되이 애쓰는 사이에도 불가사의한 그 북소리는 끊어질 듯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태양이 이글이글 내리쬐는 그 구덩이 속에서 사랑하는 시신을 마주하고 뼛속 깊이 진정한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걸 느꼈다.


그날 그는 비로소 두렵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선장이 그의 말을 자르며 그 북소리가 대체 뭐였냐고 물었다. 그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소리였다고 답했다. 그 기이한 소리는 대개 모래알이 바람에 실려와 우박처럼 마른 덤불을 때려서 나는 소리가 모래언덕의 기복을 만나 극도로 부풀려지고 증폭되는 메아리 현상 때문이라고 여긴다고들 했다. 왜냐하면 그 현상은 주로 햇볕에 타서 양피지처럼 딱딱하게 변해버린 식물들 근처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북소리는 소리의 신기루인 셈이다.


그 사내는 그가 두 번째로 경험한 진짜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겨울, 프랑스 북동부의 어느 숲에서 겪었던 일이었다. 그날따라 하늘이 무척 어두웠다. 그는 농부를 안내인 삼아 전나무로 뒤덮인 아주 작은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공포를 피해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나무 꼭대기 틈새로 구름이 달아나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이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두툼한 옷을 입고 빠르게 걷고 있었는데도 한기가 엄습해 왔다.


안내인은 숲 관리인의 집으로 그를 안내하는 중이었는데, 그 집 아버지가 2년 전에 밀렵꾼 한 명을 죽였고, 그때부턴 어떤 망상에 사로잡힌 듯이 침울해 보인다고 설명했다. 결혼한 두 아들이 그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어둠은 깊었다. 주변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뭇가지들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어둠을 채우고 있었다. 이윽고 그 집의 불빛이 보였다. 안내인이 문을 두드렸고,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잊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백발의 노인이 넋 나간 눈빛으로 장전한 총을 손에 든 채 부엌 한가운데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키 크고 건장한 사내 둘이 도끼를 들고 문을 지키고 있었다. 저만치 어두운 구석에는 두 여자가 벽에 대고 얼굴을 가린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가 사냥을 하러 왔다고 설명하자 노인은 무기를 벽에 기대어 내려놓고 여자들에게 그의 방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더니 그에게 불쑥, 자기가 2년 전 오늘밤에 사람을 한 명 죽였는데 작년에도 그 사람이 돌아와서 자신을 불렀기 때문에 오늘 저녁에도 그자를 기다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밖에는 맹렬한 폭풍우가 그 집을 때렸고, 작은 창문 너머로는 바람에 흔들려 헝클어진 나무들이 실내 불빛에 비쳐 보였다.


그는 미신적인 공포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주어 모두를 조금은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깊은 공포를 밀어내지는 못했다. 그들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잔뜩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어리석은 두려움에 피로감이 몰려와, 먼저 잠자리에 들겠다고 말하려 했다. 바로 그때, 노인이 갑자기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 총을 쥐더니 넋 나간 목소리로, “그자가 왔어!”라고 말했다. 두 여자는 다시 구석에 얼굴을 가리고 무릎을 꿇었다. 아들들도 도끼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가 다시 그들을 진정시키려던 찰나, 난로 옆에서 웅크리고 잠들어 있던 늙은 개가 갑자기 깨어나더니 고개를 들어 불쪽을 바라보며 음산한 울음을 뱉어냈다. 모두의 시선이 개에게 쏠렸는데, 개는 환영이라도 보이는 양 꼼짝하지 않고 무언가를 향해 다시 짖어대기 시작했다. 아마도 낯설고 무시무시한 무언가를 보고 있는지, 털이 온통 곤두 서 있었다. 하얗게 질린 노인이, 그자를 죽였을 때 저 개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 개는 그자를 느끼는 거라고 외쳤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기가 오싹하게 느껴졌다. 그 장소, 그 시간에, 넋 나간 사람들 틈에서 짐승이 보여준 광경은 무시무시했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개는 불안에 시달리듯이 꼼짝 않고 울부짖었다. 그러자 끔찍한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다.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그건 알 수 없었다. 그건 그저 두려움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다 같이 귀를 쫑긋 세운 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후 개가 방 주변을 돌기 시작했고, 벽으로 가서 냄새를 맡으며 여전히 끙끙거렸다. 그 짐승 때문에 그들은 미치기 직전이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안내인 농부가 겁에 질려 발작하듯 개에게 달려들더니 작은 정원으로 난 문을 열고 그 짐승을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개는 즉시 조용해졌지만 그들은 더 무시무시한 침묵에 빠졌다. 갑자기 모두가 소스라치듯이 놀랐다. 어떤 존재가 숲 쪽 바깥담에 기대고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던 것이다. 그 존재는 문 쪽으로 와서 마치 머뭇거리는 손으로 문을 더듬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2분가량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겨우 그 2분 동안에 그들은 미칠 것만 같았다. 잠시 후 그 존재가 다시 돌아와 여전히 담벼락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러곤 어린아이가 손톱으로 문을 긁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이내 머리 하나가 불쑥 창문에 나타났다. 눈이 맹수의 눈처럼 번득이는 새하얀 머리였다. 그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탄식하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때 부엌에서 굉음이 터졌다. 노인이 총을 쏜 것이다. 그리고 이내 아들들이 달려와 큰 식탁을 세워 창문을 막았고, 식탁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찬장으로 고정했다.


그는 이 예기치 못한 총소리에 마음과 몸과 영혼이 무너져 쓰러질 것만 같았고, 죽도록 두려웠다.


그들은 그렇게 새벽까지 옴짝달싹 못하고 말 한 마디 못한 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에 마비되어 있었다. 차양 틈새로 가늘게 새어 들어오는 빛줄기를 보고서야 그들은 막아둔 출입구를 열어볼 용기를 냈다.


담장 아래에는 총에 맞아 주둥이가 깨진 늙은 개가 문에 기대어 쓰러져 있었다. 개는 울타리 아래로 구멍을 파서 정원에서 빠져나갔던 것이다.


구릿빛 사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덧붙여 말했다. “그날 밤 나는 아무런 위험도 무릅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창문 구멍에 나타난 그 허연 얼굴에 총이 발사되던 그 1분을 다시 겪느니 차라리 내가 살면서 맞닥뜨렸던 가장 무시무시한 위험의 시간들을 다시 겪는 편을 택할 겁니다.”



▶ 참고 문헌 : 〈멧도요새 이야기〉, 모파상 저, 백선희 역, 새움

▶ 참고 사이트 : 불어판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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