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이 키건 지음 /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어떤 책은 너무 좋아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할 수가 없다. 클레이 키건의 소설은 대부분 그에 속한다. 단편도 중편도 아닌 겨우 120페이지에 담긴 글 중에 단 한 줄도 불필요한 건 없다. 아주 깊은 곳에서 먼 길을 돌아돌아 결국 도달하는 클레이 키건 특유의 서사 방식으로 인해 읽는 동안은 무슨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마저 시절과 인물의 촘촘한 묘사 덕분에 늪을 헤쳐가듯 진득하게 나아가게 된다.
클레이 키건의 소설에는 슬픔이 묻어난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정작 하고픈 말은 행간으로 물리고 문장에는 최소한의 서사만 남겨둔 탓인지도 모르겠다. 행간에 물린 '사소한 것들'이 차곡차곡 차올라 마침내 심지가 되어 불을 밝히는 슬픔.
"절대로 대모 대열 근처에도 가지 말고 끝나면 바로 집으로 와야 해!"
대학 시절, 현관문을 나설 때마다 들었던 어머니의 말이다. 착한 장녀답게 나는 교재가 든 파일을 두 손으로 꼬옥 끌어안은 채 북을 치며 반복되는 격한 구호들을 흘러내리는 긴 머리칼로 차단하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무너지듯 몸을 싣곤 했다. 광주 항쟁이 발생한 지 겨우 몇 년 뒤였기에 구호가 뭐였든 그들이 옳았으리라. 펄롱이 수녀원의 석탄 광 문의 빗장을 당겨 소녀를 데리고 나오는 순간, 내 머릿속은 수십 년의 시간을 뒤로 돌려 동급생들이 뙤약볕에 앉아 북을 치며 외치던 그 날들로 이동했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날들의 죄책감을 덜어본 적이 없다. 방관자에게 부과된 벌이다.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 - 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 - 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갓난 딸들을 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때조차도." (119페이지)
펄롱이 소녀를 데리고 걸으며 느꼈던 당당함과 기쁨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살고 싶었다. 아무도 몰라도 된다. 펄롱이 느꼈던 자부심은 오롯이 그만의 것이고 이처럼 빛나는 얼마되지 않는 순간들이 탑처럼 쌓여 곧추세워진 사람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진정 강한 자가 된다.
매일 읽고 매일 운동하려 애쓴다. 좋은 습관이 올바른 나를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용기도 습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번이라도 두려운 선택을 감행해 당당함을 누려본 사람이라면 그 다음 선택 앞에서 스스로를 믿게 된다. 그야말로 다 가진 자다. 펄롱의 '이처럼 사소한' 선택은 마침내 그 자신을 구원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