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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섬 Feb 22. 2023

책을 읽는다는 것

     "늘 책을 읽으시더라고요. 그건 다른 거거든요."


     원장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뭐가 다른 건가요, 라고 묻는 대신에 나는 멋쩍게 웃으며, 그저 취미생활인 걸요, 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내내 궁금했다. 뭐가 다르다는 뜻이었을꼬.


     차마 원장에게 묻지 못하고 때를 놓친 질문은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대기업 5년차인 딸아이는 대번에 이렇게 답했다.


     "책을 읽는다는 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거든. 배우려는 자세 같은 거 말이야. 사회에서 중년을 꺼리는 건 중년들이 늘 해왔던 대로만 살고 싶어 하기 때문이잖아. 우리 회사 중년들만 해도 새로 익히는 일은 죄다 아랫사람한테 떠넘기고 자기들은 늘 하던 일만 편히 하려는 궁리뿐이거든."


     흠. 그런가..?


     책을 읽는다는 게 그렇게도 읽힐 수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 없다. 나로선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단단한 내면을 구축하기 위한 자기 성찰이나 정진 같은 쓰임새였기에. 다독을 통해 구축된 내면은 결코 가난해지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요컨대 오로지 나를 위한 행위로 줄기차게 읽어댔을 뿐이다. 책은 나와 분리될 수 없는, 그저 나였다.


     언제부터 책을 읽는 모습이 그런 의미로 해석되었던 걸까. 책을 읽는다는 건 그저 취미나 취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책을 줄기차게 읽으면서도 변화는 극구 꺼리는 사람도 있고, 책을 읽지 않아도 단단한 내면를 지니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유연한 사람도 분명 있다. 어찌 보면 난 오히려 내면이 단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단한 독서를 자구책으로 삼았으리라.


     오히려 나는 책 읽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코러스 시절, 음악 방송 녹화를 가면 온종일 대기였다. 12시경에 방송국에 집합해서 2시쯤 오디오 리허설을 마치면, 5시경에야 카메라 리허설이 예정되고, 본 녹화나 생방은 7시가 넘어서야 진행되곤 했다. 리허설은 겨우 이십여 분씩 진행되는데 중간 대기시간이 하세월이다. 대개의 출연진들은 당구를 치러 가거나 옹기종기 모여 잡담을 하거나 차량에서 쪽잠을 자기도 한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 시절 얘기다. 지금 같으면 하나같이 스마트폰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몰랐을 테지만.) 결국 다들 취미생활을 하는 셈이라 나도 망설임없이 책을 읽거나 쪽번역을 했는데, 이게 늘 말거리가 되곤 했다. 당구나 포커 게임 등에는 무심하면서 왜들 책에는 민감한지 그때나 지금이나 모르겠다. 그때 책에 대한 주변인들의 과대포장에 흠칫 놀란 나는 그때 이후로는 내내 애써 책을 감추거나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서 읽는다. 책 읽는 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즐거우니 난 그저 못 말리게 내향적인 자따일 뿐이다. 게다가 멍하니 있는 시간을 못 견디는 집착적 성격도 한 몫 한다.


     그 시절에 김동률이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자기는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할 뿐인데 그 음악을 대중이 좋아해주니 행운이며 감사할 따름이라고. 계약서를 쓰기 위해 마주앉은 원장실에서 원장은 다시금 책 이야기를 했다. 동률이 말처럼 난 그저 책이 좋았을 뿐인데 그 모습을 나의 숨겨진 또 다른 면모로 해석해준 시선에 그저 감사하다.


     책을 읽는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단순한 행위가 그 어떤 지표로 작용하는 이유는 좋은 취향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것과 게임을 하는 것 따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좋은 취향과 나쁜 취향은 엄연히 존재한다. 하루 딱 24시간. 주어진 시간의 양을 선택할 수 없는 게 인간의 숙명이지만, 적어도 그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요즘엔 대중교통이나 대기시간에 책을 읽는 사람이 흔치 않다 보니 나조차도 책을 든 사람을 보면 흠칫 다시 보곤 한다. 배움의 자세까지는 모르겠고, 적어도 시간 활용 면에서 자기를 통제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보인다. 어떤 의미로든 한 가지 분명한 건 취향은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일 수도 있지만, 길러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어떤 취향을 내가 기르면 그 취향이 다시 나를 기른다.


     어떤 뮤지션은 그저 한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기타를 시작했다고 했고, 또 어떤 지인은 여자를 꼬시기 용이해서 책을 읽는다고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여자의 환심을 사고 난 뒤에 기타나 책을 멀리했다면 음악사에 남을 이름도 고유한 통찰력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 한낱 취미였던 일이 취향이 되도록 밀고 나아가는 시간이 전제되었을 테고, 마침내 취향이 곧 자신이 되어버리는 순간이 도래했을 것이다.


     좋은 취향은 나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 그 취향이 온전히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지난한 시간의 담금질이 요구되지만 지난하지 않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내가 좋아하는 일이 그 자체로 내가 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지치고 지루해지기 십상이기에 그저 좋아하는 마음으로는 내 것이 되지 않는다. 버티는 거. 취미가 취향이 되어 곧 내가 되도록 버텨내면 뜻밖의 나비효과가 일어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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