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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섬 Jan 29. 2023

공부하는 인간

     알쓸인잡 마지막회에서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가 자신을 "공부하는 인간"이라고 정의했다. 헉, 내 껀데.. 물론 그 분의 너비감과 깊이감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나 역시 스스로를 배우고 익히는 인간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서울대 정치외교학 교수이자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의 저자인 김영민 교수는 활동 영역이 너무 방대해서 도대체 그 많은 시간을 어떻게 내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한다. 그분의 대답은 간단하다. 동년배 남자들이 즐기는 취미를 전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일테면 음주가무, 등산, 낚시, 골프, 동창회 등등. 감히 비슷한 맥락으로, 나 역시 동년배 여자들이 흔히들 즐기는 취미거리에는 관심도 재미도 없다. 일테면 게임이나 카페 나들이, 골프나 어머니회, 동창회, 드라마나 목적 없는 쇼핑도 즐기지 않는다. 친구들 모임도 연예인이나 화장품 얘기가 주류인 모임은 참석하지 않는다. 시간이 아까웠다. 뭐든 내게 새로운 배움이 되지 않는 시간들은 말 그대로 쓸데없어 보였다.


     그건 아마도 싱글맘 프리랜서로 치열하게 사느라 시간이 곧 경제력으로 환산되는 생활 구조로 인해 저절로 생성된 취향 같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엄마가 있었다. 혈기왕성한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살림만 하기엔 남아도는 정력을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각종 모임을 주체하거나 온종일 전화기를 붙잡고 지인들과 떠들어대는 데 썼다. 동네 아줌마들과 집집마다 돌아가며 떠들다 돌아오면 또 다시 유선 전화기를 붙잡고 해가 지도록 무려 3시간씩 이어지는 통화로 인해 끼니도 건너뛰기 일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 나와 MBTI가 정반대였을 엄마의 놀라운 외향적 주부생활은 당시 어리고 유약했던 내 마음에 의구심을 넘어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유발했다. 같은 여자지만 절대로 저렇게 살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만 정작 어떻게 다르게 살지는 알지 못한  나이가 차오르며 내던져진 생의 바다 한가운데서 헤엄은 커녕 숨만 겨우 쉬며 허우적대는 동안  검은 바다를 버티느라 젊음은 물론이고  자신마저 조리 헌납하고 나니 이미 사십대였다. 그렇게 멍하니 불혹에 도달했을  운명처럼 만난 철학과 교수님이 계셨다. 그분의 철학 강의와 필생의 연구를 위해 내게 내려진 특명이 바로 벨에포크 문학의 통섭이었다. 교수님이 앞뒤 없이 달랑 작가명만 던져 주시면 나는 해당 작가의 생애는 물론이고 시대적 배경과 작품 설정, 인물 구도,  밖의 사회적 연계성을 통섭해서 문서로 작성한다. 그러면 교수님은 내가 올린 보고서를 근거로 철학적 개연성을 부여해 학생들과 난상 토론한다. 이런 독특한 접근의 강의가 가능했던  교수님의 특이 이력 덕분이다. 애초에 교수님은 문예창작을 목표로  문학도였다. 그런데 당시 지도 교수가 창작을 제대로 해내려면 철학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충고했고, 이에 따라 철학과로 편입해 공부하다가 박사과정까지 마치게 되었다. 교수님의  독특한 철학 강의는 결국 문학도로서의 꿈을 이루지 못한 한풀이 같은 셈인데,  해박함이 이루 말할  없었다. 미술, 오페라, 무용, 연극, 클래식, 현대 음악까지 통섭하는 교수님의 해박한 지식 덕분에 그의 철학과 강의는 미학과 다르지 않았다.


     교수님과 작업을 이어가던 어느 날 나는 화장실에서 남몰래 오열하고야 말았다. 동일하게 주어진 한 번의 생애 동안 이토록 무지하게 나이 들어버린 나 자신에 대한 한탄과 애달픔이 한계치를 넘은 탓이었다. 너무 무지해서 교수님의 말씀과 요구사항을 미처 다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태반이었다. 그날 화장실에서 흐르고 또 흐르던 눈물을 어렵사리 멈추며 굳게 다짐했다. 죽는 그날까지 배우고 또 배우리라. 동일한 양의 시간을 살다 가면서 이토록 무지하게 마감할 수는 없다고.


     무언가 아주 약간 인지되는 순간이 도래하지 않는 한,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조차 깨닫지 못한다. 아는 게 없으니 무지도 알 턱이 없다. 교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비교적 많이 아는 축이라고 생각해왔다. 내가 맞닥뜨린 건 교수님 지식의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는데도 그동안 무지로 일관된 채 무지조차 깨닫지 못했던 나의 생이 죽도록 애가 닳았다. 하지만 빙산을 지니신 교수님은 정작 강의를 제외하곤 늘 농담으로 일관하시는 유쾌한 분이셨다. 결국 앎은 다시 무로 통하는 순환이라니.


     그랬다. 무지한 나였기에 내가 무슨 인류 공영에라도 이바지할 공부를 하는 냥, 목뼈가 닳도록 시간에 쫓겼다. 공부하지 않는 인간은 모두 하찮은 존재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매달린 공부에서 나는 전혀 다른 시각을 얻게 되었다. 사실 공부는 그저 나의 행복을 위한 일종의 유희일 뿐이었음을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누군가는 3시간씩 전화를 해대고, 누군가는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해외 골프를 다니는 것도 모두 저마다의 행복한 시간을 위한 유희인 것처럼 나 역시 행복하기 위해 책을 읽고 배우고 익힌다는 것을, 그저 생긴 대로 살아낼 뿐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그래서 이젠 시간을 내어 엄마와 한 시간쯤은 통화해드린다. 여전히 시간이 아깝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의 유희와 엄마의 유희가 본질적으로는 동종의 행복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므로 기꺼이 함께 웃을 수 있다.


     내가 공부하는 인간으로서의 내가 내 마음에 들듯이, 엄마도 다양한 화제로 끝없이 떠들어대는 인간으로서의 그가 그의 맘에 들 것이다. 우린 누구나 자신만의 검은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와중에도 내면의 등대를 따라 자신만의 섬에 닻을 내린다. 공부든 모임이든 골프든, 그 어떤 형태의 삶으로 구현되더라도 우린 모두 자신만의 등대를 지닌 영험한 존재이다. 공부는 대학이나 도서관에만 있지 않았다. 우리네 삶 곳곳이, 우리네 얼굴 면면이 모두 배움과 깨달음의 보고(寶庫) 그 잡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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