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생활연구 - 지방생활정경 제2권
〈외제니 그랑데(Eugénie Grandet)〉는 1833년 9월 19일 《유럽문예(L'Europe litéraire)》 지에 〈외제니 그랑데, 지방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제1장이 처음 발표되었으며, 이듬해 《마담 베쉐(Madame Béchet)》 출판사에서 재출간될 당시에는 각각 소제목이 붙은 여섯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1939년 《샤르팡티에(Charpentier)》 출판사에서 최초의 단행본으로 선을 보인 〈외제니 그랑데〉에는 여섯 개의 장의 구분이 사라지는 대신에 발자크가 이 작품을 집필하는 동안 친분을 맺었던 마리아 뒤 프레네(Maria du Fresnay)라는 이름의 여인에게 바치는 헌사가 등장한다. 『인간희극』이란 제목으로 자신의 작품을 한데 모아 재배열하고자 한 발자크의 의도에 따라 〈외제니 그랑데〉는 1976년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에서 펴낸 플레야드 총서의 3권에 「지방생활 정경」의 첫 번째 작품으로 수록되어 있다.
〈고리오 영감〉과 함께 발자크 사실주의 작품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외제니 그랑데〉는 나폴레옹이 실각한 뒤 다시 왕의 통치체제로 돌아선 복고왕정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소뮈르(Saumur)의 작은 마을에 위치한 낡고 음침한 한 저택을 무대로 펼쳐지는 10년 동안의 이야기는 대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의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자리 잡게 되는 신흥 부르주아지의 탄생 과정에 대한 실증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순진한 시골 처녀가 어느 날 파리에서 온 사촌 오빠를 만나면서 사랑에 눈뜨고, 그 사랑으로 인해 아버지에게 가혹한 시련을 당하게 되며, 끝내는 사랑에 배신당하면서도 첫사랑의 순수한 영혼을 잃지 않는 한 편의 서글픈 연애소설로 읽어도 무방한 작품이다.
소뮈르라는 작은 마을 위쪽에 폐허가 된 성벽에 가려진 채 창백하고 냉랭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집이 한 채 있다. 그 집의 맨 아래층은 진열창도, 진열대도, 유리문도 없이 덜렁 출입문만 달려 있어 동굴같이 눅눅하고 어둠침침한데, 옹벽 앞에 포목이나 그물, 대구나 소금 등을 가득 담은 통들이 진열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 집을 ‘그랑데 씨의 집’이라고 부른다. 이 집 대문 앞에는 통 제조인 펠릭스 그랑데(Félix Grandet)가 나와 앉아 통을 팔고 있다. 겉보기에 그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프랑스 공화국이 소뮈르 지방에서 교회 재산을 매각할 당시 40세였던 그는 돈 많은 목재상의 딸과 결혼해 자신의 현금자금과 부인의 지참금을 챙겨 소뮈르에 터를 잡았다. 그의 장인이 국유지 매각을 감독하는 공화주의자를 매수한 덕분에 그 지역에서 가장 좋은 포도밭과 낡은 수도원, 그리고 약간의 소작지를 쉽게 얻어낸 그랑데는 소뮈르 군의 행정관리로 임명되어 정치적, 상업적으로 영향력을 넓혀 갔다. 집정관제하에서는 읍장이 되어 행정과 포도 수확에 헌신했던 그는 제1제정 시절에는 공직을 떠났다. 그의 나이 47세가 되던 1806년에 그는 장모 가문에게서, 장인에게서, 뿐만 아니라 모계 쪽의 할머니에게서 연속적으로 유산을 상속받았다. 유산의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지만, 이 상속으로 인해 그랑데는 새로운 귀족 칭호를 얻기에 이르렀다. 그 지역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랑데는 1789년에 이미 자유자재로 읽고 쓰고 계산할 줄 아는 힘 있는 통장수였다. 통장수이자 포도 재배자인 그랑데는 포도수확량에 따라 통을 몇 개 만들어야 할지를 천문학자처럼 정확하게 추산했다. 뿐만 아니라 사업 수완도 탁월해, 포도 수확물보다 통 값이 더 나갈 때는 팔 수 있는 통을 확보해 지하창고에 보관했다가 몇 배가 넘는 가격으로 오를 때를 기다릴 줄 알았다. 말하자면 그는 재정적 능력이 타고 난 인물이었다.
그랑데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소뮈르 지방의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랑데의 무남독녀 외제니(Eugénie) 양이 과연 누구와 결혼하게 될지가 뜨거운 관심사였다. 그랑데는 집안에 필요한 생필품은 직접 분배하고, 겨울이면 불을 피우는 기간도 엄격하게 통제하는 지독한 수전노였다. 외제니의 어머니는 남편의 구속과 통제에 심한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타고 난 온순한 성격으로 인해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노예만 같은 생활을 감내해온 순종적인 여인이었다. 그랑데 집에는 35년 전부터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하녀 나농(Nanon)이 있었는데 아마도 주인의 이러한 수전노 횡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1819년 11월 중순의 어느 날 저녁 무렵, 나농은 그 해 처음으로 불을 지핀다. 그날은 외제니가 스물세 살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외제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한 소뮈르 재판소장, 공증인 등 여러 주요 인사들과 카드놀이가 한창일 때, 한 청년이 커다란 여행 가방 두 개를 들고 그랑데 집을 방문한다. 몸가짐이나 인격에 있어 완벽해 보이는 이 청년은 그랑데의 동생의 아들이었다. 외제니는 윤기가 흐르며 우아하게 곱슬곱슬한 그의 머리칼과 곱고 섬세한 그의 손을 보며 자기 사촌이 천상에서 내려온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 청년의 이름은 샤를 그랑데(Charles Grandet)였다. 샤를은 그의 아버지가 형님인 그랑데에게 쓴 편지를 그랑데에게 전달한다. 4백만 프랑의 막대한 빚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을 결심한 동생이 죽기 전에 샤를을 형님에게 맡긴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샤를은 아버지의 파산과 자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그랑데는 심난한 마음으로 일단 조카가 묵을 방을 안내하고, 샤를은 낡아빠진 저택과 큰아버지의 위압적인 태도에 내심 놀라 심난해지고, 외제니는 멋진 사촌 오빠의 체류에 마냥 설레는 마음이다.
다음 날 아침, 외제니는 새벽같이 일어나 몸치장을 시작한다. 그랑데는 아침부터 나농과 빵과 생필품을 놓고 실랑이를 벌인다. 그랑데는 조카가 왔는데도 평소와 같은 분량을 고집한다. 그러나 나농은 샤를 때문에 들떠 있는 외제니의 마음을 간파하고 기어이 그랑데를 이겨먹는다. 외제니와 아침 산책을 나갔던 길에 만난 동네 사람이 그랑데에게 파리에서 사윗감이 왔다고들 하더라고 인사를 하자 그랑데는 펄쩍 뛴다. 외제니는 아버지의 격렬한 거부감에 현기증이 인다.
샤를은 잠에서 깨어 콧노래를 부르며 한껏 치장을 한다. 식사를 하러 쾌활하게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는 파리에서 유복하게 자란 도련님답게 아침으로 닭고기나 새끼 자고새 같은 고급스런 식사를 찾는다. 그나마 나농이 치열하게 얻어낸 버터와 달걀을 샤를이 아침으로 먹고 있는데 그랑데가 들어온다. 때마침 커피에 설탕 조각을 넣고 있는 샤를을 발견하고 그랑데는 얼굴이 파리해진다. 이제 설탕은 값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제1제정 시대부터 근검절약이 몸에 밴 그랑데로서는 언제나 가장 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만히 두었다가는 집안 여자들이 샤를 때문에 집안을 거덜 내겠다고 생각한 그랑데는 샤를에게 할 얘기가 있다며 샤를을 데리고 정원으로 간다. 그랑데는 냉혹한 어조로 샤를에게 그의 아버지가 권총 자살을 했고, 그래서 샤를이 무일푼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린다. 샤를은 눈물과 흐느낌으로 무너지고, 집안에 있던 여자들도 연민으로 눈물을 흘린다. 그랑데는 샤를이 무일푼이 되었다는 사실보다 아버지의 죽음에 더 집착한다며 쓸모없는 녀석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랑데는 샤를을 인도로 보내 돈을 벌게 할 작정이다. 샤를은 방에 틀어박혀 슬픔을 가누지 못한다. 외제니는 냉혹한 아버지의 모습에 그 날부터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품기 시작한다. 외제니는 샤를보다 더 슬퍼하며, 혹시라도 샤를이 자살이라도 할까 봐 잠도 깊이 이루지 못하고 밤낮으로 그를 보살핀다. 외제니의 어머니도 딸의 사랑을 눈치 채고 샤를에게 애정 어린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샤를은 큰어머니와 사촌동생의 따뜻한 보살핌에 깊이 감동하고, 외제니의 특별한 아름다움을 알아본다.
어느 날 밤, 외제니는 샤를의 방을 살피다 잠이 든 샤를 옆에서 파리에 있는 연인에게 쓰다 만 편지를 발견한다. 편지에는 자신의 파산 소식과 함께 결별을 청하며, 지금 현재는 단 돈 한 푼도 갖고 있지 않기에 돈을 벌기 위해 인도로 갈 것이며, 새로운 삶을 위해 외제니와의 결혼을 고려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외제니는 매년 생일마다 아버지가 선물로 주셨던 금화를 모아놓은 주머니를 샤를에게 통째 바친다. 망설이는 샤를에게 외제니는, “돈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던 내게 오빠는 그것을 가르쳐주었어. 돈이란 건 수단일 뿐이야. 그게 다야.”라고 말한다. 샤를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외제니의 금화 주머니를 받아 들고는 반드시 나중에 갚아줄 거라고 다짐한다. 대신에 샤를은 그의 어머니가 금을 채워 주셨던 상자를 외제니에게 맡긴다.
그날 밤부터 외제니의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샤를과 외제니는 정원이나 교회로 함께 산책을 다니며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샤를은 파리 사교계 여인들의 허영심에 찬 헛된 사랑 놀음에 비하면 순수하고 참된 외제니의 사랑에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미로움과 깊은 애정을 느꼈다.
그랑데는 동생의 죽음으로 인한 문제들을 처리했다. 그는 샤를로 하여금 아버지의 상속권 포기서에 서명하게 했고, 샤를의 여권을 얻기 위해 필요한 서류를 작성했다. 샤를과 외제니는 사랑을 고백한다. 외제니는 샤를이 돌아올 때까지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고 약속한다. 두 사람은 영원을 약속하고, 마침내 샤를은 인도를 향해 떠난다.
1820년 새해 첫날, 그랑데는 외제니에게 적당한 투자처가 생겼으니 이제까지 모아온 외제니의 금화를 가져오라고 명한다. 외제니와 그녀의 어머니는 그랑데의 노여움이 두려워 바들바들 떨고 있다. 외제니가 금화가 없다고 답하자 그랑데가 불 같이 화를 내는 바람에 심약한 그랑데 부인은 얼굴이 온통 하얗게 질려 몸져눕고 만다. 어머니를 방에 뉘이고 돌아온 외제니는 금화가 어디 있냐고 무섭게 닦달하는 아버지에게 금화는 그녀 돈이니 그녀가 쓰고 싶은 데 썼다고 답한다. 그랑데는 격분해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며 외제니에게 마구 욕을 퍼부어댄다. 그랑데는 외제니를 저주하며 결코 용서하지 않을 기세로 외제니를 방에 가두고 열쇠로 잠가버린다. 그랑데 부인은 남편에게 외제니를 용서해달라고 애걸복걸하지만 그랑데는 듣는 척도 하지 않는다.
그랑데 부인은 그대로 일어나지 못한다. 그녀의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간다. 그러나 그랑데는 몇 달 동안 아내만 들여다볼 뿐 딸의 이름은 입에도 올리지 않는다. 그는 요지부동으로 매섭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한다. 슬픔에 지친 그랑데 부인이 위독해지자 공증인이 찾아와 의사를 불러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그랑데는 필요 없다고 일축한다. 그러자 공증인은 법률적 지식이 없는 그랑데에게 그랑데의 재산은 부인과 공동소유이기 때문에 부인이 죽으면 딸이 어머니의 재산을 물려받는 거라며, 그러니 딸을 지금처럼 학대하면 딸에게 어머니의 상속을 포기하도록 설득할 도리가 없는 거라고 일깨워준다.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재산을 틀어쥔 채 살고 싶었던 그랑데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사실이었다.
그랑데는 공증인의 조언을 떠올려 모녀에게 나름 한껏 친절을 베푼다. 그러나 그랑데가 아내가 죽지 않도록 그토록 친절을 베풀었건만 그랑데 부인은 빠르게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결국 부인은 숨을 거두고 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슬픔에 겨운 외제니를 붙잡고 그랑데는 재빨리 공증인을 불러 어려운 법률 용어를 동원해 상속 재산에 대한 포기를 종용한다. 법률 용어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외제니는 공증인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그랑데가 원하는 서류에 서명을 해버리고 만다. 상속 포기서이다.
1827년 말, 82세의 그랑데에게 중풍이 찾아와 빠르게 진행된다. 마침내 그는 골격이 파괴되어 꼼짝도 못하게 된다. 자리를 보전하고 죽어가면서도 그랑데는 금화를 바라보며 흐뭇해한다. 그러다 마침내 숨을 거둔다. 그랑데가 죽고 나서야 외제니는 공증인을 통해 그랑데의 막대한 재산 내역을 알게 된다. 외제니는 나농에게 종신연금을 주고 토지와 재산관리인으로 임명한다. 샤를이 떠나고 7년이 흐른 뒤였다.
샤를은 그동안 편지 한 장 보내지 않았다. 샤를은 인도에서 돈을 벌고 있었다. 그는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각종 사업에 쉴 틈 없이 매달렸다. 그는 오로지 엄청난 재산을 모아 파리로 다시 돌아가 잃어버린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처음엔 외제니만 생각하며 지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온갖 여자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하고 온갖 사업과 모험들이 이어지며 소뮈르의 추억을 깡그리 지워버렸다.
그리하여 샤를은 마침내 1827년에 프랑스를 향하는 배에 오른다. 그는 배에서 샤를 10세의 시종관인 오브리옹(Aubrion) 후작 부부를 만난다. 그들 부부는 귀족 칭호에 눈 먼 남자가 있으면 그들의 못생긴 딸을 지참금 없이 결혼시켜버릴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샤를은 이들과 정략결혼에 합의한다. 파리로 돌아온 샤를은 아버지의 부채 청산을 거부한다. 그리고는 외제니에게 편지를 보낸다. 인도에서 벌어온 재산 덕분에 귀족 집안과 결혼을 앞두고 있음을 알리며 외제니가 주었던 금화 값으로 8천 프랑짜리 어음 한 장을 동봉한다. 아울러 외제니가 보관하고 있던 샤를의 상자는 오브리옹 저택으로 보내달라고 청한다.
외제니가 샤를의 편지를 읽고 절망에 차 있을 때 교구신부가 방문한다. 노신부는 외제니에게 이제는 결혼을 해야 할 때라고 부드럽게 종용한다. 이때 공증인의 부인이 공증인이 보낸 편지를 들고 외제니를 방문한다. 공증인은 지금 파리에서 샤를 아버지의 부채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장차 오브리옹 백작이 될 샤를이 이미 한 달 전부터 파리에 머물며 방탕한 생활을 해왔는데, 샤를 아버지의 부채 청산을 거부해 공증인은 샤를 아버지의 파산을 선고할 작정이라며, 그렇게 되면 샤를도 파산하게 될 테니 오브리옹 집안과의 결혼은 무산될 거라고 적혀 있다.
그날 밤 외제니는 방에 틀어박혀 오랜 시간 고심한다. 다음 날 아침 외제니는 고요하고 냉정한 태도로 소뮈르 재판소장을 단둘이 만난다. 소뮈르 재판소장 봉퐁(Bonfons)은 오랫동안 외제니를 향해 연정을 품어온 남자이다. 외제니는 봉퐁에게 청혼을 하며, 그러나 남편에게 바칠 수 있는 건 우정뿐이라며 결혼 후에 처녀로 남게 해달라고 청한다. 봉퐁은 기꺼이 응한다. 그러자 외제니는 봉퐁에게 파리로 가서 샤를 아버지의 채무를 전부 지불해달라고 부탁한다. 봉퐁은 행여 외제니가 다시 샤를에게 마음을 돌릴까 봐 두려워 서둘러 떠난다. 봉퐁은 모든 일을 신속하게 처리한 뒤 오브리옹 저택으로 가서 샤를에게 외제니의 편지와 아버지의 부채를 완전히 청산한 지불증서를 전한다. 외제니는 편지에 샤를의 행복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샤를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아드리는 것뿐이라며 부디 행복하라고 썼다.
파리에서 돌아온 사흘 뒤 봉퐁은 외제니와의 결혼을 공표한다. 그리고 6개월 뒤에 봉퐁은 앙제(Angers)의 왕립재판소 판사로 임명된다. 그러나 수년 뒤 그는 소뮈르의 의원으로 임명된 지 8일 만에 세상을 뜨고 만다. 봉퐁 부인은 겨우 서른세 살의 나이에 80만 프랑의 연금을 받는 부유한 과부가 된다. 그러나 외제니는 막대한 연금에도 불구하고 처녀 시절과 변함없이 검약한 생활을 하며 양로원, 어린이를 위한 기독교 학교, 공공도서관, 교회를 위해 아낌없이 기부한다. 소뮈르 사람들은 나농이 외제니를 재혼시키려 힘쓰고 있다고들 하지만 그처럼 잘못된 소문은 없다. 이제 세상의 부패를 완전히 이해한 외제니는 그녀의 영혼이 지닌 위대함으로 이미 속세에 속하지 않는 여인이 되어 선행의 행렬을 이끌고 천국을 향해 걷고 있다.
발자크는 이 작품에서 황금만능주의와 약육강식의 생존법칙을 실천하여 사회의 주역이 되는 부르주아 남성들의 세계에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는 동시에 남성적 억압과 사회적 소외를 겪으며 예속적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세계를 연민과 동정의 시각으로 대비시켜 보여준다.
외제니의 아버지 그랑데 영감은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수전노의 전형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아내의 지참금을 바탕으로 뛰어난 투기 실력을 발휘하여 그 누구도 정확한 액수를 알지 못할 만큼 막대한 재산을 일군 그는 한때 소뮈르의 읍장을 지낸 마을의 유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리오 영감이 애써 모은 재산을 두 딸에게 아낌없이 나눠준 뒤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랑데 영감은 아내와 딸에게까지 수전노의 생활을 강요하며 죽는 순간까지 황금에의 집착을 버리지 않는, 말 그대로 황금의 노예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랑데 영감이 임종의 순간에 보이는 희극적인 행동은 발자크 특유의 과장된 표현에 힘입어 그랑데라는 인물의 본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탁월한 장면을 이룬다.
발자크는 샤를이 인도로 떠나 다시 파리로 돌아오기까지의 긴 세월을 단 두 페이지로 압축해서 설명한다. 7년 동안 외제니에게 단 한 번의 편지도 보내지 않은 침묵에 대한 설명이기도 한 그것은 순진하고 유약한 한 청년을 사리에 밝은 냉혈한으로 변모시키기에 충분한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통찰에 다름 아니다. 샤를이 오브리옹 후작 딸과의 결혼을 앞두고 외제니에게 보낸 편지는 순박한 외제니의 이해를 얻으려는 기만적 술수인 동시에 복고왕정 시대에 사회의 지배층으로 편입하고자 하는 야심 찬 청년의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초기작 〈결혼의 생리학〉에서부터 줄곧 부르주아 결혼의 폐해를 지적해온 발자크는 샤를의 뻔뻔한 태도와 외제니의 한결같은 마음의 대비를 통해 당시 만연해 있던 부르주아적 결혼관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주인공 외제니는 발자크의 전기에 등장하는 적지 않은 여성들 속에서 그 모델을 찾기 힘든 예외적 인물이다. 시골의 소읍에서 나고 자라 평생 동안 파리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순박한 여인은 아버지가 요구하는 극심한 궁핍 생활과 전제적 태도를 어머니와 함께 묵묵히 견디며 살아간다. 그런 외제니가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저항감을 느끼고 급기야 정면으로 맞설 용기를 내게 되는 것은 순전히 사랑의 힘 덕분이다. 그녀는 졸지에 고아가 되어 실의에 빠진 샤를의 사업자금으로 그동안 아버지한테 받은 금화를 통째로 건네준다. 그 당돌한 행동은 금화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아버지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결국 방에 감금되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례로 여의며 일편단심 샤를만을 기다려온 그녀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외제니는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에도 불구하고 샤를의 정략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작은 아버지의 부채를 갚아주는 의외의 행동으로 독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외제니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결단, 즉 봉퐁과의 ‘백색결혼’에서 독자는 그녀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 샤를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고 보면 흔히 외제니에게 적용되는 ‘순종과 체념의 화신’이란 규정은 일면적인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니콜 모제의 지적처럼 그녀는 대상이 황금에서 사랑으로 바뀌었을 뿐, 아버지의 수전노적 집착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복합적인 인물이다. 그랑데 영감이 뭐든 만지기만 하면 황금으로 바꾸어 놓은 ‘미다스의 손’을 지녔다면, 외제니는 아버지가 모은 재산을 사랑하는 사람과 가난한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성녀의 손’을 지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말 그대로 순종과 체념의 덕목을 구현하는 인물은 오히려 외제니의 어머니이다. 그랑데가 일군 막대한 재산에 대해 충분히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처지임에도 그랑데 부인은 남편의 모욕적 언사를 고스란히 감내하며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림자 같은 여인이다. 그녀가 남편의 폭압을 피하는 방법은 ‘생각마저 없애고 죽은 듯 누워 있는 것’이다. 발자크는 이런 그랑데 부인의 태도를 통해 가부장의 권력 앞에서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부르주아 가족제도의 모순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샤를에게 무한한 연민의 정을 보이고, 아버지의 횡포로부터 딸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랑데 부인의 모습을 통해 지배와 분리의 원리에 충실한 남성들의 세계와는 정반대인 소통과 통합의 세계를 그려 보인다.
인간적 우의가 살아 있는 그 세계에는 그랑데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하녀 나농의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이 작용한다. 그랑데로부터 신임과 동시에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있는 탓에 ‘충직한 개’에 비유되는 나농은 그랑데 부인과 외제니에게 없어서는 안 될 보호자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방에 갇혀 물과 빵으로 연명하게 된 외제니에게 몰래 파이를 만들어 가져다주는 것도, 가족으로부터 스스로 버림받은 그랑데 영감을 향해 “홀아비가 되셨군요.”라며 가시 돋친 비아냥거림을 퍼부을 수 있는 것도 나농이 아니고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그랑데 부인과 함께 외제니와 샤를의 사랑을 지켜주는 수호천사의 역할을 함으로써 그랑데에 맞선 여성들의 연대를 구축한다. 혈혈단신이 된 외제니 곁에 유일하게 남게 되는 그녀는 더 이상 하녀가 아닌 친구로 거듭난다. 발자크는 아버지로부터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은 외제니가 맨 먼저 나농에게 연금을 주는 것으로 그리면서 외제니의 관대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 두 여성의 관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나농은 결혼 후에도 외제니의 집사 일을 보아주는 남편과 함께 과부가 된 외제니의 든든한 의지처가 되어준다.
이처럼 발자크는 그랑데 영감의 비인간적 면모와 샤를의 비열함의 반대편에 우애와 소통 가능성을 지닌 여성들의 세계를 배치함으로써 도덕적 대비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이해타산과 권모술수로 점철된 부르주아 남성들의 세계에 한 가닥 빛을 비춰주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프랑스 사회에 막 자리 잡기 시작한 근대사회의 적법성을 묻는 발자크는 헌신과 배려, 희생과 체념이란 전근대적 속성을 지닌 여성들의 세계에서 일말의 구원 가능성을 찾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외제니의 재혼에 관한 소문을 일축하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의 결구는 한 여성의 불행한 일생에 대한 어떤 현실적 보상도 배제한 채 철저한 고독의 여운을 남긴다. 비록 천사와 성녀의 이름을 얻기 하지만 외제니의 삶에서 비극적 색채를 지우기는 힘들다. 그녀의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딸에게 남긴 “행복은 천국에만 있다.”는 유언은 여성적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체념적 표현으로 읽힌다. 발자크의 종교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이러한 비극적 여성주의는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인식과 함께 발자크 사실주의의 한 축을 이루는 요소이기도 하다.
〈외제니 그랑데〉는 느리고 긴 도입 부분과 강렬하고 긴박한 극적 부분(갈등-결말) 사이의 불균형으로 특징지어지는 발자크적 서술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것을 모리스 바르데슈(Maurice Bardéche)는 〈소설가 발자크〉 (《슬라트킨(Slatkine)》 출판사, 1967)에서 발자크 서술 시학을 이루는 근본 모델로 설명하면서, 이러한 방식이 발자크를 읽는 독자의 기대들을 만족시켜주는 동시에 서로 다른 구조를 지닌 이야기들의 탈선이라 고려한다.
피에르 조르주 카스텍스(Pierre Georges Castex)는 1965년 《클래식 가르니에(Classic Garnier)》 판에서, 발자크가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공간을 완성하기 위해 사용한 소재를 소뮈르가 아닌 투렌(Touraine)에서 가져왔다고 밝혔다. 따라서 소뮈르에서 그랑데 저택을 찾는 것은 헛일이며, 발자크 주변에서 그랑데가 될 가능성이 있는 모델을 찾는 것도 역시 헛수고이다.
또한, 피에르 조르주 카스텍스는 책 속 자료들이 오랫동안 연구되면서 아르파공과 그랑데 사이에 세워졌던 관련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랑데는 현대적 구두쇠, 자신의 재산을 늘릴 줄 아는 투자가일 뿐 축재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피에르 바르베리(Pierre Barbery)는 인물에 대해 심리학적이라기보다는 사회학적인 이런 재해석을 따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1825년 소설 〈반 클로르(Wann-Chlore)〉와 1834년의 〈외제니 그랑데〉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즉 이 책들의 여주인공들은 둘 다 숨 막힐 듯한 가족 관계에 억눌려 있는 어린 두 소녀들이다.
최근에는 하나의 완화된 이미지만 보이는 계몽 소설로 보는 대신 소설의 폭력성에 역점을 두는 연구 작업이 계속되었다. 이 소설에서 우리는 어떤 역설적인 동화를 보게 된다. 즉 외제니에게서는 환각적 쾌락의 형을 선고받은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사랑 속에 그랑데의 탐욕이 포개어진다. 새로운 해석들은 외제니에게 빼앗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성격의 힘을 되돌려주고,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근친상간의 모호함과 그 양면적 감정을 복구시킨다. 유순한 딸이 사랑 때문에 반항하게 될 때 그 딸은 아버지의 상징적인 살인자가 되며, 아버지의 분노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어머니의 간접적인 살인자가 된다.
▶ 작품 배경 / 줄거리는 아래의 문헌의 내용을 제 임의대로 압축해 줄거리 형태로 요약한 것입니다.
▶ 분석은 아래 문헌의 역자 해설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1. 〈외제니 그랑데〉, 발자크 저, 조명원 역, 지만지.
2. 〈발자크 비평(Honoré de Balzac)〉, 조엘 글레즈(Joëlle Gleize), 이정민 역, 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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