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들녘

by 홍탁


“아빠, 1단계는 뭐야?” 파주 오금리로 떠나는 날 아침, 잠이 덜 깬 눈으로 효준이가 물었다. 여기서 1단계는 아이가 신나는 정도를 말한다. 단계가 높아질수록 점점 흥미진진하다는 뜻이다. “메뚜기도 잡고 밤도 따는 거?” “흠, 그건 무조건 2단계지~.”


며칠 전 생태활동가 김승호 소장님이 ‘황금들녘 생태탐사’가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오금리 주민들과 DMZ생태연구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당일 프로그램인데 접경지역의 대자연을 잠시나마 만끽할 수 있는 귀한 기회였다. 선착순이라 부리나케 접수하고 아이들과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을 기다렸다.

이른 아침인데도 출발지인 오금리 마을회관에 삼삼오오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작은 길을 따라 걷는 우리를 들꽃들이 반겨주었다. 개발나무, 여뀌, 고들빼기, 큰엉겅퀴… 이 꽃은 뭐예요 하고 아이들이 묻는 족족 하루 가이드를 자처한 동네 아주머니 몇 분이 꽃 이름을 차분히 일러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 초소를 통과하자 오금리의 황금 들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낟알이 영근 벼 이삭은 고개를 숙이고 햇볕 아래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눈앞으로 휙휙 스쳐가는 잠자리를 재원이와 효준이는 폴짝 뛰면서 쫓아다녔다. “쟤가 고추잠자리 맞죠?” 아이가 생태활동가 선생님한테 물었다. “아니야~ 고추잠자리는 날개까지 붉단다.” 저쪽에서 한 여자아이가 자기 망에 있는 게 여치 맞냐며 들어보였다. 선생님은 곧바로 가르쳐주었다. “아니야~ 얘는 섬서구!” 그동안 원격수업 하느라 지친 아이들 눈이 반짝인다.

아이들은 벼 이삭 가득한 논으로 빠져들 것만 같았다. “논둑을 따라 들어가도 돼요~” 추수를 앞두고 있는데 괜찮을까 싶었지만 걱정 말라고 했다. 사실 길쭉하게 뻗은 몇 평 남짓한 논은 아이들 체험학습을 위해 특별히 경작된 땅이었다. “벼 이삭을 훑어서 맛 한번 봐요~” 효준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조그만 손에 낟알 몇 개를 움켜쥐고 입에 갖다 댄다. “씹으니까 고소해~” 두 형제가 킥킥대며 낟알 맛을 서로 얘기해준다. 아마 이 정도면 효준이 표현으로 5단계 정도는 되지 않을까.


논에 발을 들이자 벼 밑 물 속 생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기어다리는 논우렁이가 아이들 레이더에 잡혔다. 선생님이 우렁이를 들어 올려 보여준다. “우렁이가 농사를 짓는 거예요.” 잡초를 먹어주어 제초제를 쓰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해주는 일등공신 우렁이를 선생님이 소개하자 아이들이 와, 탄성을 지른다.

하늘도 들판도 바람도 한껏 아이들 마음에 차곡차곡 들어설 때쯤이었다. 논들 한가운데 그림처럼 서 있는 정자에 도착했다. 오금리 아주머니들이 직접 지은 밥에 부침개, 김치, 가지나물, 풋고추까지 한상 차려져 있는 게 아닌가. 정자에 앉아 들판을 바라보며 밥을 먹었다. 말 그대로 ‘들밥’이다. “아빠 엄마~ 너무 맛있어!” 다 맛나지만 으뜸은 밥이라고 아이들은 입을 모았다.


깨끗이 식판을 비우고 어느새 사라진 효준이가 “아빠~~~” 거의 기절하다시피 소리를 질렀다. 헐레벌떡 달려가 보니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풀 밑에 아주 커다란 방아깨비가 눈을 껌뻑거리고 있었다. 선생님도 이렇게 큰 건 처음 본다며 모여든 아이들 앞에서 벌레 다리를 한 손으로 잡고선 방아 찧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왜 방아깨비인지 알겠지?” 황금 들판 사이로 아이들의 깔깔대는 소리가 퍼져나간다.


북녘과 마주한 접경지역이라 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오금리. 쌩쌩 달리는 자유로 옆에 이렇게 아름다운 생명의 공간이 있을 거라고는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아이들이 오늘 여기서 가장 많이 한 건 놀라워하는 거였다. 처음 보는 들꽃과 곤충들 그리고 논에서 익어가는 낟알을 향해 끊임없이 감탄을 쏟아냈다. 내게는 그 몸짓이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노래로 들렸다.

탐사를 마무리하는 시간. “이제 모두 놓아주는 시간이에요~.” 선생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는 듯 하나둘 채집통을 열었다. 잠자리를 파란 하늘로 날려 보내며 효준이가 씩씩하게 속삭인다.


"잘 가~ 또 보자!"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함께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