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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나는 불안장애 환자입니다

by 퇴근후작가

《내일도 불안할 예정입니다만》

- 불안한 나를 고치지 않기로 한, 아주 개인적인 결정의 기록


Part 1. 나에게 불안은 너무 익숙해서


1-1. "나는 불안장애 환자입니다"


또다시, 위가 멈췄다. 이 말을 하면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한다.

“위가 멈춘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체한 거예요?”, “배가 아픈 거예요?”

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다. 내 위는, 정말로 갑자기 ‘멈춘다’. 그건 이렇게 시작된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평범한 오후를 보내던 어느 순간. 속이 꺼지는 듯한 감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위는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는다. 짧게는 반나절, 길게는 1~2주.

물 한 모금 넘기기도 힘들 만큼, 내 안의 공장이 완전히 멈춰버린다.


위경련도 자주 겪는다.

예전에는 갑작스런 위경련 때문에 응급실을 찾은 적도 있고

병원을 찾아 급한데로 수액을 맞은 적도 몇번있지만

결국 처방받는게 진경제라는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그냥 약을 항상 들고다니는 게 습관이 되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갑작스레 아플때도 많아서

이제는 물 없이도 약을 삼킬 수 있는 노하우까지 생겨버렸다.


위는 내 의지로 움직일 수 없는 불수의근이다.

조절할 수 없다는 말은, 멈추는 순간에도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렇게 멈추게 하는 건 언제나 같았다. 스트레스.

스트레스는 내 몸에서 가장 먼저 위장을 두드렸다.

그래서일까. 나는 늘 위가 안 좋다.


장점이라면 살이 쉽게 찌지 않는다는 것이고,

단점은 먹는 걸 좋아하면서도 마음껏 먹을 수 없는 날이 많다는 것.

삶의 가장 단순하고도 큰 즐거움 하나를 자주 포기해야 한다는 건,

생각보다 더 서글픈 일이다.


카페인에도 약하다.

그래도 근로자인 나는 아침이면 디카페인 커피 한 잔으로 정신을 붙잡는다.

문제는 그마저도 조금만 과하면 곧바로 컨디션이 무너진다는 것.

내 몸은 아주 단호하게 경고한다. “그만하라”라고.

예민한 사람일수록 카페인에 취약하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 말, 참 나다운 말이다.


귀에선 자주 소리가 들린다.

처음엔 어디선가 전파음 같은 게 나는 줄 알고 주변을 둘러봤다.

나중에야 알았다. 이명이었다.

컨디션이 급격히 떨어진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온다.

작게 스쳐 가기도 하지만, 가끔은 몇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 웅웅 울려 견디기 힘든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작업할 때 항상 음악을 튼다.

화이트 노이즈로 불안을 달래기 위한 나만의 방식.

그 덕분에 내 음악 취향은 점점 뚜렷해졌고, 그 사실이 문득 나를 웃게 만들기도 한다.

어려운 와중에도 무언가를 배워나가려는 나 자신이, 가끔은 참 기특하다.


스트레스가 조금만 쌓인 날이면, 밤이 되어 침대에 누웠을 때 숨이 막힌다.

말 그대로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누울 수도, 서 있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면, 남편은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 등을 토닥여준다. 어쩔 때는 몇 분이지만 길게는 한 시간이 넘기도 한다.


불안은 밤에 더 또렷해진다.

낮 동안 ‘멀쩡한 사람’처럼 버틴 대가를, 내 몸은 밤마다 이자처럼 되돌려준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내 몸의 반응에 민감해지고, 어느새 ‘예민하고 까다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단지, 불안에 조금 더 섬세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고슴도치.jpg 사진출처 : pinterst / etsy.com


나는 예민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예민함은 날 선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가 명랑하고 차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들 멀쩡해 보이는 그 순간에도, 나 혼자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는 건 나 밖에 모른다.


나는 걱정이 많고, 잘하고 싶은 욕심도 많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는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수십 가지 경우의 수를 상상하고,

그에 대한 대처 방안을 미리 세워두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몸과 마음은 늘 긴장 상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마치 고슴도치의 털처럼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살핀다.

부장님이 툭 던진 말 한마디.

다들 흘려듣는 말속에서 나는 의미를 파악하고, 그 말이 뜻하는 가능성에 대비하느라

일어나지 않은 일에 온 에너지를 쏟는다.


물론, 눈치가 빠르다는 건 때때로 장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촉수가 늘 곤두선 삶은 생각보다 훨씬 피로하다.

긴장을 푼다는 게 어떤 느낌이었는지, 이제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퇴근하면 기진맥진이다.

몇 년 전 나는 자율신경계 이상으로 1년 가까이 온몸이 아팠던 적도 있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내 예민함과 긴장감이 결국 나를 병들게 하고 있었다는 걸.

그래서 요즘은 무던해지려는 연습을 하고 있다.

완전히 달라질 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덜 힘들어지길 바라며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려 애쓴다.


어느 심리학 책에서 본 문장이 마음에 깊이 박혔다.

“가장 바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스스로를 불행에 빠뜨리는 것이다.”


그 문장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됐다.

나는 바보처럼 살아왔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시뮬레이션하며 지금의 나를 계속 희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노력해 본다.


이렇게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며

고슴도치처럼 날 세웠던 내 감각을 조금은 잠재우기 위해.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나도 언젠가는 조금 더 무던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고.

그런데 문득 깨닫는다.


나는 ‘무던해지고 싶다’는 마음으로조차 또 다른 애를 쓰고 있었다는 걸.


예민한 나를 달래기 위해, 다시 한번 긴장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그 애씀이, 또다시 나를 조용히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는 걸.


나는 오늘도, 그렇게 또 다른 방식으로 애를 쓰고 있었다.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그리고 그 애씀이 나를 아프게 한다는 사실이,

오늘따라 유난히,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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