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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낮엔 일하고 밤엔 그림 그리고

by 퇴근후작가

《내일도 불안할 예정입니다만》

- 불안한 나를 고치지 않기로 한, 아주 개인적인 결정의 기록


Part 2. 두 개의 세계에서 살아내기


2-2. 낮엔 일하고, 밤엔 그림 그리고

- 불안과 나 사이에 생긴 그림이라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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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꿈에서도 그림을 그린다.

퇴근길이면 늘 마음이 급해진다.

지하철을 한 번 놓치면 화실 도착이 15분은 늦어지기 때문이다.


단 15분. 누군가에겐 별것 아닐 수 있지만,

퇴근 후의 몇 시간을 그림에 몰두해야 하는 내게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다.

그래서 오늘도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오르며, 나는 그림을 향해 달려간다.

화실에 도착하면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바로 붓을 든다.

화장실조차 참은 채, 캔버스 앞에 앉는다.


그림을 그리는 이 시간만큼은 나에게도 무게 중심이 생긴다.

하루 종일 외부의 기대와 역할 속에 갇혀 있다가, 오롯이 내 ‘의지’로 서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림을 다시 시작한 건, 몸과 마음이 완전히 무너졌던 몇 년 전이었다.

불안장애와 자율신경실조로 병가를 냈고, 스스로를 ‘망가졌다’고 느끼던 시기였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 그림을 붙잡았다.

처음엔 취미였다. 그저 나를 진정시키기 위한 마음의 피난처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얼굴로 다시 나를 찾아왔다.


“이 정도로 괜찮은가?”

“내가 그리는 이 그림은 충분한가?”

“이건 그냥 낙서가 아닌가?”

“나는 정말 작가가 될 수 있을까?”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시작한 그림이,

오히려 또 다른 불안의 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잘하고 싶은 마음,

남들보다 뒤처지고 싶지 않은 조급함,

스스로에게 더 높은 기준을 들이대며 괜찮지 않은 나를 또다시 몰아세운다.


한때는 나를 살리던 그림이,

이제는 또 하나의 ‘해야 할 일’이 되어버린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머리로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은 결과와 비교에 휘청거린다.


도대체 나는 왜, 좋아하는 일 앞에서도 이렇게 치열하게,

스스로를 다그치고 마는 걸까.

내가 만든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그림을 시작했는데,

그 그림조차 불안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때때로 슬프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있다.

같은 화실에 있는 작가들의 진지한 태도,

조용히 작업에 몰두하는 그들의 모습,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조언 속에서 나는 다시 마음을 붙잡는다.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회사를 다닌다.

경제적 제약이 있다 해도,

퇴근 후 그 짧은 시간 안에 나를 밀도 있게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이 지금의 나를 지탱해 준다.


불안은 여전히 내 곁에 있다.

그림을 그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은 흔들리고, 조급하고, 스스로를 의심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불안과 나 사이에 그림이라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나는 퇴근 후, 종종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무너진 마음을 끌어안고,

조금 흔들리는 손으로 다시 붓을 든다.

그 불안조차 안고서도, 나는 계속 그린다.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한 그림이

또 다른 불안을 데려왔지만,

그럼에도 나는 안다.


그림을 그리는 이 순간만큼은,

불안한 나조차도 나답게 살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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