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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화실에서는 나는 '젊은이'다

by 퇴근후작가

《내일도 불안할 예정입니다만》

- 불안한 나를 고치지 않기로 한, 아주 개인적인 결정의 기록


Part 3. 화실에서, 나를 그리다 — 온전히 내가 된다


3-2. 화실에서는 나는 '젊은이'다


내가 다니는 화실에는 연세가 지긋하신 회원님들이 많다.

연령대로 보면 6070대가 가장 많고, 그다음이 50대, 40대 순이다. 20,30대는 많지 않다.

그중에는 10년 넘게 묵묵히 이 화실에서 그림을 그려오신 분들도 계신다.


이곳은 일반적인 아트클래스와는 조금 다르다.

보통 화실은 2시간 내외의 제한된 수업시간을 두는데, 이곳은 그런 제약이 없다.

자신의 시간에 맞춰 오고, 원할만큼 그리고, 가고 싶을 때 돌아간다.

그렇다 보니 출근 도장 찍듯이 매일 오시는 분들도 많고,

한 번 오시면 반나절 이상 자리를 뜨지 않고 그림에 몰두하신다.


화실 의자는 허리 받침 하나 없는 작은 원형 나무의자다.

한 시간만 앉아 있어도 허리가 뻐근해지기 쉬운데도

그분들은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해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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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중반인 나는, 이곳에서는 ‘젊은이’로 통한다.


가끔 평일 낮에 화실에 가면, 어르신 회원님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나를 반긴다.


“이렇게 젊어서 얼마나 좋아.

그 나이면 뭐든 다 할 수 있지.”

“내가 그 나이만 되었어도, 정말 작가의 꿈을 꿨을 텐데.”


나는 그 말에 늘 웃으며 대답한다.

“회원님처럼 멋진 모습이 저의 꿈이에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하지만,

표정 속에 비치는 부러움과 아쉬움이 마음 한편에 오래 남는다.


한편, 내가 다니는 직장은 다르다.

같은 40대인데도 여기서는 이미 '늙었다'는 말이 농담처럼 오간다.

누군가는 "이제 우리 나이에 새로운 거 시작하기엔 늦었지"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요즘은 다 내려놓고 편하게 살고 싶다"라고 중얼거린다.

아직 한창 일할 나이인데도, 마치 인생이 끝난 사람들처럼 말한다.


그런 말들 속에서 하루를 버티다 퇴근 후 화실에 도착하면,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여기서는 ‘젊은 작가지망생’이다.

연세 많으신 회원님들은 내게 말한다.

“젊은 당신이 부럽고 대견하다”라고.

그 말들은 마치 나를 위한 작은 축복처럼 들린다.


누군가에게 부럽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스스로를 다시 다잡을 힘이 된다.


회사에서는 자꾸만 ‘에너지’를 잃어버린다.

회의, 마감, 이메일, 인간관계...

일은 끝이 없고, 눈치는 끝도 없다.

하루를 다 쏟아붓고 나면 텅 빈 느낌에 휩싸인다.

하지만 화실에서 듣는 따뜻한 말 한마디,

묵묵히 그림에 몰입하는 어른들의 진지한 표정,

그 모든 것들이 내 안에 다시 조용히 에너지를 채운다.

화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늘 가벼운 이유다.


화실은 나에게 쉼이자 회복이다.

누군가와 경쟁하지 않아도 되고,

나이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나로서 있을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나도 할 수 있어’라는 확신을 되찾게 해주는 공간이다.


화실에서 나는, ‘늦지 않은 사람’이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나는 오늘도 회사에서 조금은 지치더라도,

퇴근 후 화실 문을 열며 다시 살아난다.

그곳엔 나를 젊다고,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 말들이 내일도, 나를 다시 꿈꾸게 해 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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