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지우개
어린 시절 내 눈에 비친 집안의 장면은 그다지 화목한 편은 아니었다. 대체로 이러했다. 엄마와 아빠는 틈만 나면 악을 지르며 싸워댔고, 어린 오빠는 내 앞에서 싸우지 말라며 뜯어말렸다. 그보다 더 어렸던 나는 눈썹 주위까지 온통 붉어진 얼굴로 서럽게 울고는 했다. 나의 집은 자주 소란스러웠다.
이혼 얘기가 툭하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때마다 난 덜 자란 마음으로 다시 그 말을 삼키게 만들었다. 혼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러면서도 난 마음의 준비를 했다. 밤마다 엄마를 따라가야 할지, 아빠를 따라가야 할지 갈등의 시소 위에서 휘청거렸다. 어렸던 나는 한 사람에게 가면 다른 한 사람을 다시는 못 보는 줄로만 알았다. 때로 오빠는 내게 자기가 어른만 되면 나를 데리고 집을 나가 살 거라고 말했다. 그 말에 기대하면서도, 겁이 났다. 난 언젠가 외톨이가 될 것만 같았다.
그때의 나는 친구에게 속 얘기를 털어놓는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내게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는 존재는 학교 숙제였던 얇은 일기장뿐이었다. 주변 애들은 뭘 먹었는지, 어디에 갔는지 정도로만 썼지만 난 모든 걸 토해냈다. 오늘 느꼈던 감정, 어떤 말을 들었고,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아주 상세하게. 그렇게 온 마음을 쏟아내고 난 뒤 교탁에 제출하고 나면 담임 선생님이 빨간 펜으로 길게 멘트를 남겨주었다. 조그맣던 나에게 그 말들은 커다랗게 와 닿아 작은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종종 학교에 낼 일기장을 검사하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엄마와 아빠가 심하게 다투고, 난 방 한구석에서 일기 한 장을 빼곡히 써 내려갔다. 연필을 세게 움켜쥔 탓인지 손목이 욱신거렸다. 그렇게 모두 적고 나니 엄마가 일기장을 가져오라고 했다. 펼쳐서 보여주자, 엄마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겁이 날 틈도 없이 엄마는 지우개를 들고 애써 쓴 일기를 박박 지워버렸다.
지우개 가루가 상처의 잔해가 된 듯 작은 탁상 위에서 나뒹굴었다. 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빈칸이 되어버린 일기처럼 내 마음은 텅 비어버린 듯했다. 그저 묵묵히 짙게 남은 연필 자국 위로 새로운 일기를 덧대 썼다. 오늘 뭐 먹었는지, 어디에 갔는지. 그래서 행복했다고 마무리 지었다. 여느 아이의 흉내를 내며. 가짜의 모습을 꾸며 넣었다.
그 일 이후로 일기에조차 가면을 뒤집어쓰는 못된 버릇이 생겼다. 더 이상 일기를 검사할 선생님이 없어졌는데도 거짓을 말했다. 질투가 났는데 기뻤다고 썼고, 속상했는데 괜찮다고 했다. 예쁜 말만 주절거렸고, 창피했던 일은 보이지 않는 서랍 속에 가둬 두었다. 그러고 나면 일기만 썼을 뿐인데 사람을 만난 것처럼 피곤해졌다.
꽤 오랫동안 일기를 제대로 채워 넣지 못하고 여러 해가 지나갔다. 요즘도 가끔가다 하루의 기록을 새길 때면 가면 쓴 자아가 반갑지 않은 불청객처럼 불쑥 튀어나오곤 하지만 많이 사라졌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엄마의 마음을 백번 이해한다. 그러나 섭섭한 마음은 계속 내 주위를 얼쩡거린다.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일기에 적힌 내 마음을 지우고 엄마가 한 번이라도 나를 안아줬더라면 이 일은 그저 가벼운 해프닝으로 잊히지는 않았을까.